국가대표(2009)
오래된 외장하드를 정리하다가 2009년에 쓴 영화감상문을 발견했다.
지인의 교양수업 과제를 도와주느라 작성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0. 프롤로그
국가대표가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나저제나 보러 갈까 틈을 엿보고 있던 차에 마침 기존 상영분의 15분가량이 재편집되고 새로이 7분이 추가된 감독판 버전을 상영한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인적이 뜸한 오전시간을 골라 조조할인을 받은 티켓을 내밀고 극장에 들어섰지만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자리가 채워져 있어 영화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1. 시놉시스
1996년, 무주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이름도 생소한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이 급하게 꾸려진다.
어머니를 찾아(왜 자신을 버렸느냐 따지기 위해) 한국에 온 미국 입양인 밥, 나이트 웨이터 흥철, 고깃집 아들 재복, 귀머거리 할머니와 지능이 모자란 동생 봉구를 부양하는 칠구. 밥은 과거 주니어 알파인 스키 국가대표 선수로 잘 나갔지만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신세가 되었고 흥철과 재복, 칠구 트리오 역시 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의 우수한 선수였지만 흥철의 약물복용 탓으로 제명되어 버린 신세다. 고물상도 안 주워갈 것 같은 이들은 불러 모은 것은 어린이 스키교실 강사지만 스키의 영어 스펠링도 모르는 방코치.
이들을 이용해 한몫 잡아 볼까 싶은 방코치는 올림픽 유치가 무산되면 바로 해체되는 팀이란 것을 숨긴 채 금메달 획득 시의 각종 포상―특히 ‘군대완전면제’를 강조해 가며 대한민국의 첫 번째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을 구성한다.
훈련시설이 미비한 관계로 점프대 공사장을 전전하며 오토바이 헬멧, 공사장 안전모를 눌러쓰고 맨몸으로 훈련에 임하는 열혈 4인방(에 플러스 봉구까지). 무협영화 찍듯 나무 꼭대기에 밧줄을 걸어 대롱대롱 매달리질 않나 달리는 승합차 위에서 스키점프 자세로 서서 위험천만한 곡예장면을 연출하고 심지어 놀이공원의 후룸라이드를 점프대로 개조해 본격적인 실전연습에 몰두하는 등 온갖 기상천외한 트레이닝을 동원해 배꼽을 쥐게 하더니 서서히 선수다운 모양새를 제법 갖춰가기 시작한다.
동계올림픽 유치가 무산되자 팀의 수명도 이것으로 끝인가 싶었지만 방코치의 집념으로 결국 오버스트도르프 월드컵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헌태의 알파인 스키 대표선수시절 라이벌이었던 미국팀 선수의 모욕적인 언행으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출전 금지 통보를 받는다. 좌절한 이들에게 하늘이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는지 기상악화로 경기가 중지되고 참가국 전원에게 나가노 동계 올림픽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
1998년 나가노―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좋은 성적을 거두며 메달권에 진입한 한국팀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친다. 1차 시기, 자욱한 안개가 경기장을 뒤덮어 대기하던 칠구에게 심판은 경기 속행을 종용한다. 결국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채 점프를 한 칠구는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 대한민국은 13개국 가운데 최하위로 밀려난다. 황망함에 말을 잃은 방코치와 선수들을 향해 엔트리 선수로 등록된 봉구가 실실 웃으며 중얼거린다.
“나도 할 수 있는데…”
형들 따라 훈련하는 데 노상 끼어있었던 봉구에게 마지막 기대를 거는 방코치와 선수들. 수많은 관중들을 향해 멋지게 활강하는 어린 봉구의 모습에 모두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비록 착지에 실패하는 바람에 메달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어느새 경기장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 다섯이 이뤄낸 작은 기적을 향한 관중들과 중계진의 찬사와 박수갈채로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마치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갓 하늘을 날아오른 국가대표 선수들의 심장처럼…
2. 영화 분석
가) 캐릭터
a) No.1 밥/차헌태
“나한테 기대하지 마세요. 나도 대한민국에 기대하는 거 없으니까.”
어릴 적 미국 콜로라도 덴버로 여동생과 함께 입양된 스물일곱의 청년, 밥.
그는 주니어 알파인 스키국가대표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됐지만 어찌 된 사연인지 아침마당 입양인 특집쇼에 출연 중이다. 인심 좋게 생긴 양부모 밑에서 무난하게 성장한 그였지만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대한민국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방송국까지 쫓아와 스키점프팀에 들어오라는 방코치의 끈질긴 회유에 무관심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네가 어머니를 찾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널 찾게끔 해야 한다며 메달을 따면 포상으로 아파트를 준다는 말에 설득된 밥―한국이름 차헌태는 그의 눈엔 쓰레기나 다름없어 보이는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무주로 향한다.
특히 첫 만남부터 어긋난 버린 흥철과는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지만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었던 헌태는 팀원들과 동고동락하는 과정을 통해 어느새 ‘한 식구’라는 개념을 몸으로, 마음으로 익히기 시작한다.
방코치의 딸인 수연의 깜찍한 아이디어로 어머니의 소재지를 알아낸 헌태는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며 새파랗게 어린 주인집 딸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한다.
어차피 이렇게 살 거면서 왜 나를 버렸느냐고 악에 받친 원망조차 못한 채 그저 몰래 뒤에서 지켜보며 분함과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한데 섞인 눈물을 삼키는 헌태의 모습은 어김없이 우리의 눈시울을 적신다.
서슴없이 쓰레기라고 지칭했던 팀원들을 ‘식구’라 부르고, 비록 나를 버렸었지만 어릴 적 즐겨 먹던 간식과 앨범을 몰래 건네주고 간 엄마 때문에 온통 눈물범벅이 된 헌태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한동안 먹먹하게 만든다.
b) No.7 흥철과 No.20 재복
흥철은 마약성분이 들어간 감기약을 다량으로 복용해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들의 메달과 선수자격까지 박탈당하게 만든 못 말리는 양아치다. 단순무식한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여자와 군대면제뿐. 가진 건 개뿔도 없으면서 자존심 하나는 대통령 부럽지 않은 흥철에게 헌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수연의 일이며 헌태의 출신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둘은 급기야 주먹다짐을 벌인다.
흥철은 복싱 경험자인 헌태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속 편한 너하고 다르게 우리는 목숨 걸고 하는 거라며 헌태의 속을 뒤집어 놓고야 만다. 그러나 월드컵 출전 중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과거 동료였던 미국 선수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꾹 참고 있는 헌태를 대신해 발차기를 날리는, 대책 없지만 알고 보면 속정 깊고 귀여운 구석도 있는 바람둥이다.
한편 소심하고 어수룩해 뵈는 재복은 훈련하다 말고 단체손님이 왔다며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숯불을 피우러 달려가는 착한 아들이다. 아니, 사실은 강압적인 아버지가 무서운 나머지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툭하면 운동하지 말라고 골프채로 두들겨 맞지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아버지라고 답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그런 한편 식당에서 일하는 연변 출신 종업원이 재복의 애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아버지가 펄펄 뛰자 이미 혼인신고도 마쳤다는 말을 조용히 내뱉는 외유내강의 캐릭터.
c) No.12 칠구와 No.38 봉구 형제
귀머거리 할머니와 형이 군대 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약간 모자란 동생 봉구를 부양하는 집안의 가장이다. 따라서 칠구는 선수들 가운데 가장 이를 악물고 묵묵히 훈련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내가 군대를 끌려가면 할머니와 동생은 당장 살길이 막막해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반드시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야 하고, 그래야 군대 면제도 받고 아파트에서 편히 살 수도 있다.
이렇게 기특하고 안쓰러운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칠구에게 할머니나 철없는 동생 봉구는 얼핏 짐스런 가족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다리가 부러진 칠구를 대신해 2차 시기 점프를 준비하던 봉구가 무섭다며 형에게 달려온다. 그런 봉구에게 칠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소리친다.
“이 병신새끼야, 네가 뛰어야 내가 군대를 안 간다니까!”
형의 마음을 읽은 봉구의 눈에도 눈물이 흐른다. 형제란, 가족이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끈끈하게 그들을 이어주는 강력한 무언가가 존재하는 법이다. 봉구는 이내 공포를 극복하고 점프대에 오른다.
d) 방조삼 코치와 그의 망나니 딸 방수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이 천생 한 핏줄인 부녀.
방코치는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로 팀이 와해되자 짐을 꾸려 달아날 궁리를 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지 마음을 고쳐먹고는 조직위원장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해 월드컵 출전 허락을 받아낸다.
한편, 다단계에 빠져 여기저기 불법제조 옥매트를 떠넘기며 형사를 상대로 눈 하나 깜짝 않고 사기를 치는 뻔뻔스러운 캐릭터인 수연은 대낮부터 소주를 두유처럼 홀짝거리는 알코올중독 환자다. 옥매트 부작용으로 생긴 두드러기를 갖고 에이즈 환자라는 거짓말로 성가시게 엉겨 붙는 흥철을 단번에 떼어내는 실력 하며, 조폭이나 다름없는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신세인 걸 보면 딱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이런 수연과 방코치의 어그러진 관계는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징그럽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민폐최강 닮은 꼴 부녀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나) 닮은 꼴 영화 ― <쿨러닝>과의 비교
평생 동안 눈 한번 맞아본 적 없는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단의 실화를 코믹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낸 <쿨러닝>과 각자 한 많은 사연을 지닌 오합지졸들이 모여 대한민국 스키점프 대표선수로 발돋움한다는 <국가대표>.
두 영화는 일단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위에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부터 시작을 같이 한다. 게다가 한 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실패자에 불과한 코치와 예나 지금이나 별 볼일 없지만 올림픽에 나가겠다는 꿈으로 가득 찬 네 명의 선수들이 등장, 그들의 우여곡절 요절복통 성장과정과 가슴 벅찬 성공을 다룬 휴먼 드라마―라는 플롯 역시 상당히 닮아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영화 개봉 당시에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봅슬레이와 스키점프는 둘 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갖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선수들이 필연적으로 겪는 금전적․심리적인 문제들이 비일비재할 테고 그런 척박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여러 에피소드의 유사함은 마치 성격도 외모도 전혀 다르지만 같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자란 형제를 보는 시선쯤으로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영화 모두 그 주제와 플롯이 평화와 화합의 제전인 올림픽 정신에 부합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근대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쿠베르탱(Pierre Coubertin)이 제시한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라는 올림픽 강령의 메시지를 스크린에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a) 비교대조표
다) 영화 밖 이야기
영화의 흥행에 따른 후광효과가 잇따라 기사화되고 있다. 특히 스키점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그동안 막노동을 하며 자비로 훈련을 해왔던 두 명의 선수가 극적으로 소속팀을 구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3. 총평
한국영화 역대 8위 흥행성적 기록.
관객수 800만을 넘어 전년도 흥행작 <과속 스캔들>의 자리를 빼앗은 <국가대표>.
김용화 감독의 전작 <오 브라더스>와 <미녀는 괴로워>는 각각 <레인맨>과 동명의 일본만화에서 모티브를 얻거나 리메이크를 거친 작품이다. 이번 영화 역시 트레일러 영상을 보고 <쿨러닝>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으니 이쯤 되면 감독의 취향을 알 법도 하다.
전작과 분리시켜 생각하기 힘든 주인공의 암울한 가족사와 우울한 성장과정, 그러나 꿈을 말하는 눈동자만큼은 반짝거리는― 어찌 보면 대한민국 평균이하인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스피디하고 박진감 넘치는 스키점프 장면에 특유의 유머를 버무려 슬그머니 풀어놓는다.
무난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스토리와 다채로운 볼거리 등으로 호평을 얻은 영화는 입소문의 날개를 타고 하루가 다르게 관객 스코어를 올리는 중이다. 전형적이고 노골적인 전개 때문에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악평과 싸구려 쇼비니즘과 신파로 순진한 관객을 무장해제 시킨다는 곱지 않은 평가도 간혹 눈에 띄지만 적어도 800만이 넘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적어도 감독이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대중 영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에 꼭 맞는 작품을 내놓는 성실한 창작자라는 위치를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결과물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