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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스트 조윤정 Oct 21. 2021

주연

영화를 보면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순간이 있다.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의 주인공인 이발사 에드와 <패터슨>의 버스 운전사 패터슨이 그렇다. 자신이 이발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과묵한 이발사 에드는 드라이클리닝 ‘사업’을 꿈꾸고,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은 시를 쓴다. 이것이 이들의 정체성이다.


나는 어떤 점에서 이들과 공감하는가?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업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들은 조연이다. 이때 이발사는 작고 통통하고 수다스럽고 너스레를 떠는 인물이며, 버스 운전사는 난폭하거나 의미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그런데 이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과묵하게 잘생기고, 시를 쓰면서.


직업의 영역에서 보면, 주인공의 자리는 대개 의사나 교수나 변호사가 차지한다. 이때 의사는 수술을 하고, 교수는 강의를 하고 변호사는 법정에 있음으로써 그들의 일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업무를 담당한다고 시사한다. 만약 그들의 일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과 나를 같은 처지라고 여겼을 것이다.


코로나 19 백신을 맞으러 집 앞 병원에 가면, 의사는 똑같은 문장을 반복해 말하며 환자의 팔에 끊임없이 주사 바늘을 꽂는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의사의 일은 이발사, 운전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공이다. 이를 악물고 의대와 법대에 가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발사와 운전사가 주연이 되려면 그들이 자기 직업에 안주하지 않고, 일상의 탈출을 꿈꾸고 시를 써야 한다. 교수와 의사가 될 수 없다면 시인이나 드라이클리닝 사장이라도 되어야 한다. 사회가 직업에 귀천을 두고, 그들이 버는 돈의 액수에 차등을 두는 한, 이발사와 운전사의 일상은 지키고 유지할수록 찌질해진다. 이는 바리스타도 마찬가지이다.


당신도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삶을 긍정하며 자기 만족의 최면을 걸어야 한다. 시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발사가 그랬듯이 총을 들어야 한다. 적어도 성자가 된 청소부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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