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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Jun 12. 2021

Modern Humanity

다양성이 불가능한 시스템 속에서, 근대 교육에 관하여 / 사유(思惟)

사유(思惟)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일상 속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자체 선별하여 연재하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가끔 나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떠오를 적이면, 한 때 초등학교 숙제로 유행을 탄 덕에 내가 만난 선생님이란 선생님이면 다 방학 숙제로, 혹은 그냥 주간 숙제로 내어 주시던 일기 쓰기를 하도 했던 탓에, 중학교 2학년 즈음까지 쭉 이어오다가 결국은 끊고 만, 나의 과거의 기록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을 종종 가진다.


 일기장을 보면 하도 부끄러운 기억도 많고, 뭔가 슬펐던 기억도 많았던 것 같다.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이러한 순간들이지만, 나 자신이 매번 일기장을 들추어 볼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보는 글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당시의 나 자신이 용감하게도 다음의 문장을 새겨 넣은 어느 가을날 새벽의 일기이다.




 "슬프다. 한편으로는 원통하기도 하다. 나는 기계 따위나 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그들에게 동화되고 있다."




 지난 2년, 대한민국의 어떤 과학고등학교에서 미친 듯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겠다고 버둥거리던 때에 이 문장은 점점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었다. 이 문장을 다시금 떠올릴 만한 자극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문장을 떠올려보았자, 그러한 회의를 다시금 가져 보았자 당면한 경쟁 속에서 낙담에 빠지게 될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 때에는 (다소 오해가 있지만) 극단적으로 회의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사고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라는, 타인이 본 나 자신을 규명하던 이 문장은 그렇게 점점 자리를 잃어갔고, 결국은 내 어딘가 한 귀퉁이에 세월의 흔적을 담은 채로, 구겨진 채 체념한 듯 자리하였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나는 내 친구들의 한 '눈, 귀, 입'이라는 자작 掌편소설이라는 선물로 인하여 다시금 그 구겨진 문장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만 같다.


 가볍게 쓰였든 아니든, 어떤 글을 볼 때면 항상 상당히 비틀어보고 내 마음대로 재해석을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일종의 고집쟁이 독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나는, 역시 이번에도 이 掌편소설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는 습관을 피하지 못했다. 소설을 원래 의미 안에서 해석하는 것도 문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지만, 애초에 나는 '나에게 닿지 못하는 예술, 그건 예술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어떤 작품을 볼 때 일단 '나 자신'과 꼭 연결지어 보아야 직성이 풀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자기변명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근거라도 좀 덧붙여보자면,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결과적으로 사람을 감동시켜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감동이라고 하는 것은, 엄격하게 정의하자면 한 인간의 몸과 마음가짐을 바꾸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함이라서, 내가 감동하지 못하는 것은 예술이 분명히 아닐 것이라는 신념인 셈이다)


 내 친구들이 쓴 이 掌편소설의 내용은 결과적으로는 '한 거짓된 루머로 인해 고통받는 현대인'을 그린 소설이라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치마를 입는 남자'라는 조그마한 사실에서 출발하여 '여자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있는 남자', '여장을 하고 다니는 남자', '게이'에 이르는 악소문의 스노우볼이 제대로 굴러가는 내용이 중심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해석이 되고, 그것이 아마도 일반적인 견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 자신의 이목을 끈 내용이라는 것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악소문의 스노우볼'이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는 다문화와 세계화를 외치지만, 정작 우리는 타(他)를 받아들일 준비부터 되지 않았다."




 타(他)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마치 스스로의 생각과 가치만을 고집하고, 다른 이들의 가치와 관점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과 동치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해석하는 '타(他)를 받아들이다'라는 표현이란 굳이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회나 집단이 '이질적인'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 자신에 생각하기에는 '타(他)'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자신이 정의하는 아(我)와 타(他)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짓는 - 즉 이것은 우리의 것이지만 저것은 너희들의 것이다 - 이렇게 선을 긋는 행위의 결과로써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의 차원이든 집단의 차원이든 아(我) 그리고 타(他). 이 두 단어는 모두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


 나의 친구들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루머'의 발단은 내용의 전개를 보면 어떤 한 남성이 편해서 자신의 누나의 치마를 가끔 입고 다니는 것에서 비롯된다.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당사자와는 달리, 그를 둘러싼 '회사'라는 사회의 반응은 냉담하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통념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한 개인을 분리하여 '이상한 존재'로 규명하는 것에서,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는 듯 하지만, 점차 이러한 분리된 타(他)에 대한 그들의 끊임없는 회자와 인식의 재고는 결과적으로는 차별, 그리고 사회적 격리(혹은 좀 더 속된 말로서, '왕따')로 이어진다.


 솔직하게 나 자신도 뜨끔했던 것 중 하나는, 치마를 입고 다니는 남성을 상상하였을 때에 아직도 안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최근 들어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고, 나 또한 그들에 대해서 자유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별 상관없고, 그들의 자유대로 사는 것이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식의 입장을 표명해왔지만, 이 꺼림칙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 자신의 위선성을 아주 정확하게 드러내버린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이 치마 형태의 의복을 입어온다는 것을 사회 시간에 배운 나였고, 성교육 시간에도 이러한 낡은 통념에 대해서 지적하는 말들을 들어왔지만, 여전히 이러한 관념은 내 머릿속에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었다. 인지하고 있되, 뿌리를 뽑지 못하는 나는, 결국 이 점에서 위선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근데. 나 스스로를 위선자라고 규명하기 시작하니 무언가 오기라도 올라오는 것인지, 아니면 애써 구태여 자기변명이라도 해 보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괜스레 나 자신이 이외의 다른 것을 탓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결국 뿌리를 뽑지 못하는 생각의 주체인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인간은 '혼자'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으므로,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답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슬프다. 한편으로는 원통하기도 하다. 나는 기계 따위나 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그들에게 동화되고 있다."




 그 해답이라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한 때 획일적이라고 지적한 교육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기본적 성질에서 출발했다. 교육이라는 개념 자체는 기본적으로 국가적인, 혹은 사회적인 시스템 하에 있는 것이므로, 일련의 사회에서 원하는 인간상에 걸맞은 개인을 양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방침이다. 이 점에서 교육은 정부 혹은 관리자에 의한 전면적인 통제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도 비단 예외는 아니어서, 대한민국 정부도 교육부라는 별도의 부처를 설치하고 장관까지 앉혀, 대한민국을 매년 뜨겁게 달구는 대입 문제와 수능 문제의 출제, 나아가 교육 과정의 결정과 편제 등을 담당하게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러한 중앙통제적인 교육은 결과적으로는 결코 다양성을 반영할 수 없지 않은가 - 하고 나의 직관은 판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조금 더 풀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이를테면 제n차 교육 과정을 편제한다고 생각해보자. 역사 교과서에 대한 내용을 이제 결정할 차례인데, 최근 정부에 대한 평가를 수록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아주 당연하게도 직관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바는, 정치적 이념의 갈등과 많은 이들의 견해 차이로 인하여, 이 수록에 대한 문제가 사회 전체로 공론화되어 각종 반발과 논쟁을 낳을 것이 아주 분명하다는 것이다. 일부 시민 단체들은 얼마 전의 정부에 대하여 정의롭고 당당한 정부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어떤 다른 세력들은 부패하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정부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두 세력의 견해는 결과적으로 보면 전 정부가 보여준, 어떤 시각에서는 모든 대상이 가지는 양면성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인데, 지면이 한정되어 있는 교과서에 이 양측의 의견을 모두 수록하면서 양면성에 관한 상세한 설명까지 붙이기에는 양이 방대해질 위험이 너무 클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일반적으로 이러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양 측에서 모두 문제가 되지 않을만한 일반적인 견해 - 혹은 다소 생략된 견해, 일부로 논쟁의 대상을 기피하는 내용들만으로 대충 채워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나온 교과서는 결과적으로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상황, 그리고 현재의 모든 논쟁을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 즉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는 거짓말의 일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지탄받을 만하다. 그 과정에서 의도가 개입되었든 아니든, 결국 그러한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세계란 실세계의 단편에 불과할 것이며, 이는 주의를 그렇게 기울이지 않는 학생들에게 당연하게도 이 문제와 주제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을 간과 혹은 무시하게 만드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사례를 검토하여 보면, 나는 이처럼 교육의 기본 성질에는 피교육자의 '획일화'가 필연적으로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획일화'를 포함하는 교육은, 그 자체로 이미 스스로의 모순을 절대 해결해낼 수 없을 것이다. 다양성의 존중을 매번 제도권 교육 시스템을 관할하는 자들은 호소하지만, 지금 교육의 기본적 형태인 '표준화된 교과서와 선생', 그리고 '동일 공간에서의 생활' 등 '동일함'이 '공평함'의 이름 하에 과도하게 강요되고 있는 현 상태에서는 그 꽃을 피울 수 없을 것이 아주 분명할 것이다. 즉, 불행하게도 우리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시스템 내에서는 우리가 주장하고, 변화를 모색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소리지르고 있는 '함께 더불어'라는 사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화,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기존 교육 시스템 자체에 '다문화 교육', '글로벌 시민 교육'이라는 약간의 향신료만을 더하자는 것에서 만족하는 현재의 추세는 이러한 점에서 결코 옹호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심장이 주된 병의 원인임을 알면서도, 심장에 관한 수술을 고려하기보다는 심전도계를 고쳐야겠다고 말하는 돌팔이 의사와 다름없는 행동이다. 나 스스로가 고찰하였듯, 기존 시스템이 이미 내포하고 있는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즉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뒤바꾸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획일화'의 문제, 그리고 그 비극으로 인하여 양성되는 수많은 '획일화된 개인'들은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기본 통념에 종속되어 다양한 생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박탈당한지 오래일 것이다. 그러므로, 작 중에 등장하는 '치마를 입은 남자'를 결국은 퇴사에 이르게 하는 수많은 루머와 차별, 그리고 사회적 격리에 대한 책임은 비단 나의 생각 자체에 있는 것에서 나아가, 어떻게 보면 시스템적인 책임도 어느 한 켠에는 존재할 것이다.


 아무래도, 근대(Modern)의 인간성은 그 근대 교육의 자기 한계 때문에 이미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없는 특이점에 이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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