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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Jun 09. 2021

사유(思惟)의 시작

어느 봄의 산책 속, 한 가지 질문에 대한 연쇄 반응 / 사유(思惟)

사유(思惟)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일상 속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자체 선별하여 연재하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일러두기.


 이 글은 꽤 긴 글입니다. 아마도 제가 처음 사유(思惟)라는 이름 하에 제 생각들을 끄적거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고등학교 입시를 막 시작하기에 앞서 쓴 이 글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처음이라는 자격에 맞게 하려고 글이 길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니면 처음 쓴 글이라 정리를 미처 하지 못하고 생각의 흐름대로 계속 각종 인용문 등을 붙여가는 확장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길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지금 고치거나 다듬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다듬어 다시금 써 봅니다. 긴 글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는 그냥 뒤로 가기를 누르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글을 끄적거리기 시작했을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조금씩 읽어가셔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드립니다.




 평소 산책을 즐기지 않던 나 자신이 오늘은 집 앞 강변가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오늘 점심 무렵 부모님께서 다툼이 있으셨기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다툼으로 인해 얼어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는, 방 안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개미'를 계속 읽으며 이 분위기를 잊으려 노력하기보다는, 차라리 밖에 나가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사과의 의미로서 삼겹살 스테이크를 저녁으로 손수 준비하신 아버지의 요리를 질겅거리며 씹다가 - 고기는 두꺼워 씹기도 힘들고 질기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게 했다 - 결국 오후 여섯 시 반 경에 산책을 나가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미,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선 계속 집에 그렇게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밖에 한 번이라도 나갔다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신 바가 있었으므로, 적어도 산책을 나가는 행위가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개미'를 뒤로 하고 집을 나왔다.


 자리를 피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강변의 산책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걸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므로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음악이나 들을까는 생각에 Youtube에서 다운로드한 Jazz 음악들이 가득한 휴대전화와 이어폰을 집어 들었으나, 이윽고 핑계를 댄 이상 오랜만에 사색이라도 조금 해 보자는 생각에 책상 위에서 메모지 몇 장과 가장 좋아하는 델가드 샤프 한 자루를 꺼내 들어 얇은 파카의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무턱대고 나는 그렇게 집을 나서게 되었다.




배우들의 선거


 거리를 걸었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국회의원들의 선거 홍보 포스터와 현수막들이 거리 곳곳에 가득했다. 그것들을 본 나는 문득 오후 일찍이 읽고 있었던 그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제4권에서 읽은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88. 백과사전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배우들은 불의에 맞서 분노하는 시늉을 할 줄 알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랑하는 시늉을 해서 사람들의 굄을 받으며, 행복한 모습을 연기할 줄 알기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배우들은 이제 모든 직업에 침투하고 있다. 198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것은 배우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고명한 사상이라던가 통치 능력 따위는 쓸모가 없어지고, 연설문을 작성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거느리고 카메라 앞에서 멋진 연기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이 온 것이다. 사실, 현대의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은 더 이상 정강 정책에 따라서 후보를 선택하지 않는다(누구나 선거 공약(公約)이 종당엔 공약(空約)이 되고 말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현대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당과 정파의 지혜를 다 합쳐도 모자란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유권자들은 생김새와 미소, 음성, 옷맵시, 인터뷰할 때의 격식을 차리지 않는 태도, 재치 있는 언변 따위로 후보자를 선택한다. 직업의 모든 분야에서 배우 같은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우위를 점해가고 있다. 연기 잘하는 화가는 단색의 화폭을 갖다 놓고도 예술 작품이라고 설득할 수 있고, 연기력 좋은 가수는 시원찮은 목소리를 가지고도 그럴듯한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배우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배우들이 우위를 차지하다 보니,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해지고 겉치레가 실속을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말하는가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떻게 말하는지, 말할 때 눈길을 어디에 두는지, 넥타이와 웃옷 호주머니에 꽂힌 장식 손수건이 잘 어울리는지 따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하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토론에서 점차 배제되어 가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3권




 나는 미련 없이 그 배우들의 놀음의 산물들을 지나쳐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으로 가는 길에는 자그마한 호수가 있었다. 호수를 둘러가는 산책로에는 이제 꽃이 떨어지고 잎새가 나기 시작하는 벚나무가 있었고, 바람이 불어 벚꽃잎들은 바닥으로 흩날리고 있었던 차였다. 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불편한 마음을 털어버리고자 그 벚꽃잎들의 비산(飛散)을 바라보다가, 호수에서 바람에 일렁거리면서 곳곳이 파원이 되고 그 파원에서 전파되는 물결들의 합으로 완성되는 수면을 바라보기도 했다. 바람이 약해지고 강해짐에 따라 바뀌는 물결의 양상, 그리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바뀌는 물결 전파의 방향, 그리고 가장자리에서 다시 반사되어 돌아오는 그 수면파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고등학교 과학전람회 연구를 생각했다. 수학여행을 가던 비행기 안에서, 14시간 동안 커피 5잔이라는 약물에 반중독(半中毒)되어 KESO라는 모 올림피아드에서 제공하는 강의를 보다가 생각났던 나의 연구 주제, 연흔이 그 물결의 모양과 닮았다고 나는 순간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연흔의 생성 과정을 고려하면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간 덕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곳에 연흔이 남는다면 어떤 모양일까?'라는 질문을 휘갈기고 싶었고, 결국 메모지와 샤프를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책상에 대고 쓰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동시에 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글자를 쓰는 것이었으므로 글시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충 휘갈겨졌다. 나는 문득 아이디어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과학전람회 계획서는 빨리 완성되어야 했다. 오전에 손을 대려고 나는 시도한 바가 있었으나, 연구 방법에 대해서 조금 쓰고는 결국 손을 들고, 다른 것들에 빠져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나는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아쉬움이 떨어질 때


 그러고 보니 나는 방학에 들어가고 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약 1달을 시간 낭비의 연속으로 보냈었다. 나라는 사람은 참을성이 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불행히도 집에 오면 전자기기를 사용하고 싶은 욕구를 나는 이길 수가 없었다. <수학의 정석>을 펴고 문제를 풀어야지, 대학 3개년 입시 문제 중에서 서울대학교 수학 이공계열 면접 문제는 오늘 A4에 전부 풀어봐야지 - 하고 생각하는 나였지만 결국 나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매일을 끝맺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든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기에,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읽었던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한 계획'에서 등장하는 수첩을 응용해서 9가지 덕목을 만들고 그것을 플래너에 기록하면서 어떻게든 통제권을 회수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도 작심삼일이라는 한자성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금 전자기기가 제공하는 동영상과 게임이라는 수많은 요소들에 허송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그렇게, 어떻게든 다른 친구들을 이기겠다는 비틀린 경쟁심으로 이를 악물며 <수학의 정석>을 풀던 나 자신은, 스스로가 정신적 마조히스트라고 친구들에게 변명하면서 스스로를 한계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인간처럼 보였던 나 자신은, 집에서 허망하게 무너졌다. 때론 나는 스스로의 이러한 나태함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내일은 꼭 오늘과 같이 않게 하리라며 다짐했지만, 그 다음날 또 무너지고, 다시금 새로운 자기 변명으로 스스로의 태만을 애써 설득하며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나는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벚꽃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뒤에서 한 남자 아이가 갑자기 뛰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때였다. 나를 앞지른 그 아이는 석양이 막 지는 강변가로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참이었던 것 같다. 뛰어가는 그 남자 아이의 뒤로 하얀 푸들 종의 개가 달려가며, 그 몸집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한 때 꿈과 목표, 희망과 확신으로 가득 찼었던 나 자신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과학자 - 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노라 하며 순탄대로를 달려간다고 생각하던 나 자신은 고등학교 생활 겨우 1여 년 만에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그런 일명 '쭈글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문득 그 남자 아이처럼, 아름답게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떨어지고 있는 석양과 같은 존재로 달려가고 싶다는 망상을 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며 묵묵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나는 1년 사이에 그것을 잃었다.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나는, 그 결과로 벌어진 스스로에 대한 마조니즘적 태도에 대하여, 어머니로부터 혹여 성적에 대한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느냐는 우려를 주변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진보를 그렇게 갈망했었다. 그런데 1년이라는 짧고도 긴 이 시간 사이에 나는 스스로의 진보에 대한 원동력을 상실했던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저 눈 앞의 즐거움을 쫓고 싶다는 일탈의 사상인 것 같기도 했다. 혹여,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도대체 내구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계속 마음 한 켠에서 질문으로 남겨둔 채, 나는 일상의 무료함을 쫓고 순간의 쾌락을 찾으려고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들을 온라인 세계에서 보냈던 것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지난 1년의 시간은 나에게 자신감을 앗아간 것 이외에도 꽤 많은 변화를 안겨 준 시간이었다. 처음 접한 고등학교라는 환경은 나에게 심한 위기감과 스트레스라는 전혀 원하지 않는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나의 사고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나는 어느덧 '확신'의 세계에서 '혼란'의 세계로 전이해있었다. 고등학교 이후로 나는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몇 가지 질문들, 이를테면 현실에서 근원했을 것이라 추정되지만 유용한 질문일지 여전히 의구심이 드는 이른바 '쓸데없는 질문들'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국어 시간 이래로는 읽은 다양한 텍스트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관점들과 사상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고, 그것을 조금씩 다시 곱씹게 되는 습관이 조금씩 형성됨과 동시에 나는 책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던 손을 붙잡고, 조금씩 몇 가지 구절들을 블로그나 공책 따위에 옮겨 놓기 시작했다. 단순명료하다고 믿어왔던 머릿속은 스파게티 면을 삶다가 완전히 면을 건지는 때를 놓쳤는지, 물에 불어 터진 면들이 이리저리 꼬여서 먹기 참 그렇기도 하고 버리기도 참 그런 몰골이 되었고, 모든 '명료'의 순간들은 '미지수 x'로 대체되었다. 수과학에 꽤 자신이 있었던 나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맞닥뜨리면서 세상에서 처음 보는 시험 점수를 맞아보았고, 나 자신보다도 더 뛰어난 아이들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까지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생활기록부에 들어가는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약간의 활동을 하고, 그것들에 근본을 두기는 하지만 약간의 거짓들을 섞어가면서 선생님들께 제 생활기록부를 이렇게 써주십사 - 하고 대략적으로 나 자신이 생활기록부를 나 자신이 써서 부탁하기도 했고 (학교에서 시키기는 했다.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 한 학년이 100명이나 되는 학교이고, 그들의 생활기록부를 모두 선생님들이 완벽하고 꼼꼼하게 작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현 교육 시스템의 암울한 그림자였다) 때로는 다른 아이들을 친구가 아닌 경쟁 상대로 인식하면서 철저하게 계산적이게 된 나는 모든 인간 관계도 손익 관계로 파악하기 시작했으며, 조심성없게도 그러한 생각을 밥을 먹던 중 무심코 입으로 뱉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나는, 그렇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동화되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한 세계에서 '뭐든지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신조는 하나의 십계명과 다를 바가 없었고, '제발 꼴찌는 면하게 해 달라'라고 기도하면서 나는 달려왔던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이상한 나라의 신이 그의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나 던져 주었는지 아니면 나에게 추가적인 번뇌를 선사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나마 준수한 성적표를 그 자아의 비틀림을 제물로 하여 얻어냈다. 선생님들께서는, 그 성적으로는 관련 영재교육 진흥법에 따르면 조기졸업까지 생각해볼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러한 대략의 운명이 공개되었을 때, 주변에서는 조기졸업을 점차 권유하더니 조금씩 강요하기 시작했다. 빨리 대학으로 가라고 주변에서는 이야기했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집에만 가면 태만이 전신을 지배하고, 경쟁자들의 감시와 생기부를 작성하여 한 아이의 인생을 완전히 결정할 수 있는 선생들이 있는 학교에서, 마치 연극 배우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나 자신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나는 조기졸업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입장을 밝혔다. 주변에서는 저 놈은 성적도 되는데 왜 빨리 나가지 않느냐면서 미친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자기 자신들의 입시를 위해서 첫 번째 경쟁에서 승리한 너는 그만 꺼져 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첫 번째 경쟁에서 나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나는 패배했다는 것을. 진정한 경쟁자는 주변 친구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정한 경쟁자는 나 스스로였다. 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고, 수많은 나태에 시달리면서도 위선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마조히즘적 태도를 주장하고 다녔으며, '노력한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으리라'라는 근대 사회의 신조를 맹신하면서도 스스로가 지성적으로 어느 정도 발전하고 있다고 느끼는 바가 없다는 그 모든 사실들은, 나의 패배를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씁쓸함을 다졌다. 커피가 절실했다. 이런 경우에는 집 근처 미술관에 자주 들리곤 하는 커피 전문점이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는 자주 들이키던 카페 라떼는 최근 들어 우유 맛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터라,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해는 떨어지고 있었고, 바람은 불었으며, 길가의 벚꽃잎은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코로나-19의 창궐로 공원에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얼마 전 가까운 한 큰 건물에서 확진자가 나온 덕에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전체가 다시 바이러스의 전염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영향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이 시국 덕에 개학도 연기되면서 학교는 네이버 카페와 밴드 서비스를 통해 각종 공지사항을 남발했다. 그중 하나는 문제의 조기졸업 및 조기진학과 관련하여 몇 월 며칠까지 의사 변경을 하려는 자는 다음 이메일 주소로 양식을 송달하시오 - 라는 식의 공지였다. 중학교 선생님과의 몇 차례의 면담, 그곳 교무실에서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 중학교 선생님들과 함께한 식사, 가족이 함께한 수많은 논쟁과 설정, 스스로의 고민, 수많은 결정과 그에 대한 번복을 거친 끝에 나는 조기졸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자격이라도 주어졌으니 한 번 시도는 해 보되, 영 아니다 싶으면 조기졸업 시험을 말아버리자는 심산이었다. 그 공지가 다시 떠오르며, 나는 다시 씁쓸한 맛이 커피 없이 입 안에 도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자기에 대한 힐책이 끝없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나는 그러지 않아야 했다.




의문, 그리고 믿음과 구원의 필요 사이에서


 2주 전에, 나는 스스로가 18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래도 꽤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하게 된 한 친구를 만나서 그즈음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곁들여 털어놓은 것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것 같지만 - 그것도 이제는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중학교 학생회 이야기를 다량으로 포함해서 - 여튼 그때 나는 그에게 그 당시의 혼잡스럽던 머릿속에서 대충 건져내 그럴듯하게 끼워 맞춘 다량의 변명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변명들 중 하나는 한 가지 이상한 질문이었는데, 그것은 '생각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될까?'라는 것이었다.


 그 2주 전의 질문은 공원을 걷는 내 머릿속에는 이런 문장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생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 기괴한 질문과 나 자신에 대한 힐책의 연쇄가 기막히게도 머릿속에서 강렬한 화학 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또 하나의 혼돈이자 무지의 영역이었다. 걷고 있던 나는, 해가 거의 넘어가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카페인이 절실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또 하나의 일은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한 친구가 와서 나에게 포스트잇 한 장을 내밀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네가 왜 살고 있는지 좀 적어줘." 그때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었던 것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즈음에 들던 생각들을 이리저리 짜집어서 그럴듯하게 이어 붙인 단 하나의 문장을 포스트잇에 대충 휘갈기고 도로 자습 시간이라 씨름하고 있던 수학 연습문제로 되돌아갔었다. 그 문제의 문장을 나는 희미하긴 했지만 어쨌든 기억은 하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끝까지 믿기 위해서 살아간다." 아,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때 나는 아마도 절대성을 의심하고 있는 중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인생 친구라고 생각되는 그에게도 설명했던 내용이, 그때에도 이미 태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것의 '절대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 자신이 모든 추상에 대하여, 그러니까 이를테면 '대화에서는 논리가 필요하다', '과학은 인류의 진보에 가장 크게 기여한다', '수학은 진리와 동치이다'와 같은 몇 개의 명제들, 그리고 '국가', '타인', '학교', '교육' 등과 같이 실제 세계의 물질로만 설명하기에는 덧없이 부족한 관념들에 대한 절대성을 의심학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인생 친구라고 말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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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대화에서는 논리가 필요하다', '수학은 논리 전개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수학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와 같은 문장들 - 사실 명제에 가깝지만 - 은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그것들은 결국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 아닐까? 생각해보자고, 우리는 일단 원시인의 상태로부터 출발해 각종 진화와 발명, 발견 그리고 그것들의 산물을 이용한 살육의 끝없는 반복을 거쳐 오늘날에 도달했음을 알고 있잖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금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추상들, 이를테면 '민주주의', '과학의 중요성' 따위는 역사책을 조금만 뒤져 보더라도 대략 20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중요성이 덜했고, 그 이전에도 끝없이 중요성이 변화했단 말이지. 즉,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변해왔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거야. 이것을 고려하면, 그리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대한 연구에서 밝혀진 그들의 행동과 뇌 용량을 생각해볼 때 오늘날 그리고 과거를 지배했던 생각들은 처음부터 있었다기보다는, 역사의 흐름 속 어느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공유된 것으로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들은 원래부터의 절대성을 그 속에 내포했다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종의 과정을 통해 절대성을 가지게 된 것일 테지. 그러면 그 생각들이 - 이제부터는 차라리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기로 할까 - 이데올로기들이 절대성을 확립받기 위해서는, 다르게 표현하자면 즉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나는 그것이 혹여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고 있어.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은 그러니까 옳고 그름 이전에 많은 이들이 단지 그것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지배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닌가 - 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아마도 어떤 생각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그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 자체도 하나의 생각이거니와 그 생각 또한 권위의 원천이 그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에서 근원하므로, 무의미하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어. 곧, 이 세상에는 옳고 그름 따위는 애초에 의미가 없고, 생각과 믿음이 단지 권위를 구성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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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혼란스러운 대화 속에서 그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솔직하게, 나 자신이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말을 정리해버린 탓에 제대로 전달한 것도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몇 주에 걸쳐 이 이상한 문제를 고민할 시간을 가졌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내가 절대적으로 믿어왔던 것들 - '과학', '성실', '공부는 성공의 어머', '노력의 중요성' 따위를 모두 의심했고, 결국 그 절대성을 폐기해버리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남은 것은 단 하나, '허망'이었다.


 나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은,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기피하고 탈출하기를 원했던 '허무함'을 다시 불러 들어오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 결론을 피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던 얼마 전의 나 자신이 둘러댄 변명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 또한, 그 친구와의 대화에서 커피 한 잔이 거의 비워지던 중에 나온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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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런 식으로 모든 생각을 의심해버리다 보면 세상에 이것이 맞다! -라고 하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단 말이야.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무언가 믿을 만한 것이 있고, 무언가 신봉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일이 진행되는 듯 싶어. 그렇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어려운 질문이긴 하지. 물론. 하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이래.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자는 거야.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그냥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서 살자고. 그러면 그 믿음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게 될 것이고, 그 세계에서 - 어떻게 보면 물론 허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스스로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방을 하나 만든 다음에 자기 스스로를 그곳에 감금하는 꼴인 것 같기도 하지만 -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거지. 그 방을 아마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계관 또는 가치관이라는 말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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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자'는 그날의 말에 대하여 아직도 이의는 없었다. 무언가를 믿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에 있어 동기부여에 꽤 도움이 된다는 사상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지난 1년의 풍파에 나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이 희미해져 이제는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의 꿈, 그러니까 '자신의 미래에 대해 믿고자 하는 것'의 변천사는 스펙터클했다. 한 때는 쓰레기 짐차가 지나가는 것만을 보고 그것을 운전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고, 소방관, 파일럿, 요리사, 버스 운전사 등을 연이어 말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에 이르러서 과학 과목을 접하면서 그 길을 과학자라는 방향으로 굳혀갔다. 그 이후에는 과학자라는 카테고리 내에서 신재생에너지연구원이라는 직업을 희망하기도 했고, 한 때는 화학자를 희망하기도 하다가, 고등학교의 풍파에 완전히 깨지면서 '지구과학자', 그리고 취미로 즐기는 수준일 뿐인 얼마 되지도 않는 정보과학 실력에 취하여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를 생각하기도 했다. 재미는 정보과학에 있으면서도 억지로 지구과학을 좋아한다고 거짓말하기도 하면서,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의 꿈이 불투명해진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디선가 나는 '꿈은 장래희망이 아니다. 이루고 싶은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꿈은 무엇이었나? 직업을 가지겠다 - 는 열망도 하나의 꿈이 될 수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원대한 목표는 무엇이었나 -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었다.


 얼마 전 나는 2019학년도 2학기가 끝나갈 때 즈음에 새로운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생각의 절대성을 의심한 이래로 나는 스스로가 믿고 싶은 것을 믿겠다는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였는데, 그러면 스스로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이 있으니 - 이를테면 맹신으로 인한 오판 등 - 이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계관들, 즉 생각들이 부딪히고 상호 붕괴되는, 즉 접촉을 통해 세계관이 붕괴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생각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맞붙여보는 동아리를 만들겠노라 원대하게 계획하고는 그 동아리 이름을 '알고 보면 쓸데없이 신박한 잡소리꾼'을 줄인 '알쓸신잡'(솔직하게 인정하건대, 인기 TV 프로그램 이름을 따와 의미를 억지로 부여한 것이긴 하다)으로 짓고 몇몇 친구들을 모으고 모집 공고 게시글을 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존의 고등학교 동아리 체제에서 나 자신이 느끼던 각종 불만들 - 이를테면 동아리 단체 티를 입고 미쳤는지 다른 동아리들을 깎아내리는 이상한 풍경, 동아리의 활동은 보지 않고 이름과 인맥, 명예를 염두에 두고 뛰어드는 동아리 선발 시험, 생활기록부라는 어쩔 수 없는 요소로 결국은 비슷비슷하게 전개되는 동아리 활동들 - 을 모두 해결해보겠다고 '쓸데없는 짓을 해보자'라는 야심찬 목표 아래 몇 가지 규칙을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모든 노력의 결과는 결국 동아리 설립이 흐지부지 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같이 하겠다고 약속한 친구들은 나의 '비정규 동아리'로 운영하겠다는 선언과 각종 이유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생활기록부에 동아리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가입 의사를 철회했고, 모집 공고에는 아무도 이름을 적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끝없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다양한 생각들은 계속 일관성 없이 얽히고만 있었다. 나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에 제격인 것은 믿음뿐이라고 믿었다. 믿음은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나는 생각했으므로, 나에게는 믿음이 절실했고, 따라서 믿음의 정의에 따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필요했다.




6. 백과사전


 또 당신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내 책의 두 번째 권을 발견했다는 얘기가 된다. 첫 번째 권은 지하 사원의 보면대 위에 눈에 잘 띄게 놓여 있을 테지만, 이 두 번째 권을 발견하기는 그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쨌든 경하할 일이다. 당신은 정확히 누구인가? 내 조카 조나탕인가? 내 딸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가? 미지의 독자인 그대에게 먼저 인사를 보낸다. 나는 당신은 더 잘 알고 싶다. 이 책장들을 넘기기에 앞서 당신의 이름과 나이, 직업, 국적을 말해 주기 마란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가? 이런,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책장에 닿는 당신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 그것도 기분 좋은 손길을 말이다. 당신 손가락 끝의 지문에서 나는 당신의 가장 내밀한 특성을 알아낸다. 지문은 당신 몸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 거기에서 나는 당신 조상들의 유전자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죽어 버렸더라면 당신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짝짓기를 한 끝에 당신이 태어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당신이 내 앞에 보이는 듯하다. 아니, 웃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있어 주기 바란다. 당신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다. 당신은 스스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다. 당신에겐 하나의 사회사가 담긴 성과 이름이 있지만 그것이 당신의 전부일 수는 없다. 당신은 71퍼센트의 물과 18퍼센트의 탄소, 4퍼센트의 질소, 2퍼센트의 칼슘, 2퍼센트의 인, 1퍼센트의 칼륨, 0.5퍼센트의 황, 0.5퍼센트의 나트륨, 0.4퍼센트의 염소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다 큰 숟가락 한 술 분량의 여러 가지 희유원소, 즉 마그네슘, 아연, 망간, 구리, 요오드, 니켈, 브롬, 불소, 규소를 함유하고 있다. 또 소량의 코발트, 알루미늄, 몰리브덴, 바나듐, 납, 주석, 티탄, 붕소도 가지고 있다. 이상이 당신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이다. 이 모든 물질들은 별들이 연소하면서 생겨나는 것으로 당신 몸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당신의 물은 흔하디 흔한 바닷물과 다를 바 없고, 당신의 인은 성냥개비의 인과 한 가지이며, 당신의 염소는 수영장 물을 소독하는 데 쓰이는 염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단순히 그런 물질들을 합쳐 놓은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하나의 화학적 구조물이며 훌륭한 건축물이다. 구성 물질들이 적절히 배합되고 안정되게 평형을 이루면서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 그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당신을 이루는 분자들은 다시 원자, 미립자, 쿼크,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모든 것들은 전자기적인 힘과 인력과 전자의 힘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 절묘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각설하고, 당신이 이 두 번째 권을 찾아냈다는 것은 당신이 꾀바른 사람임을 말해 주는 것이고 당신이 벌써 나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첫 번째 권에서 당신이 얻은 지식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하다. 혁명이 일어났는가? 개혁이 일어났는가? 물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 책을 더 잘 읽기 위해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바란다. 등을 곧게 펴고 호흡을 잔잔하게 고른 다음 입의 긴장을 풀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의 모든 것 중에서 쓸모없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당신도 물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하루살이 같은 당신의 삶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 당신의 삶은 막다른 골목으로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저마다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신이 내 글을 읽고 있을 때쯤이면, 이 말을 하고 있는 나는 구더기들의 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풀의 새싹을 무성하게 키워줄 비료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세대의 사람들은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겐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보잘것없는 자취인 이 책뿐이다. 나에겐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만 당신에겐 시간이 있다. 편하게 자리를 잡았으면 근육의 긴장을 풀고 오로지 우주만 생각하라. 그 속에서 당신은 그저 하나의 티끌일 뿐이다.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흘러간다고 상상해보라. 응애, 하고 당신이 태어난다. 흔해 빠진 하나의 버찌 씨처럼 어머니 몸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쩝쩝거리면서 당신은 수천 끼의 갖가지 음식을 먹어 치운다. 수천 톤의 식물과 동물이 이내 똥으로 변한다. 억, 하고 당신이 죽는다. 당신의 삶이 그런 것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덧없는 것이랴. 물론 당신은 그런 삶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행동하라! 무엇인가를 행하라! 하찮은 것이라도 상관없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당신의 생명을 의미 있는 뭔가로 만들라. 당신은 쓸데없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는지를 발견하라. 당신의 최소한의 임무는 무엇인가? 당신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명심하라.


-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2권


※ 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 中




결과: 질문의 나무, 그리고 꿈


 이러한 생각들이 뒤엉켜서 낳은 종국적인 결론 지점이란 생각 외로 간단했다. 죽기 전에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인생을 허망함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 나는 보다 큰 목표이자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하는가? 다르게 말하여, 어떤 문제를 나는 죽기 전에 해결해볼 것인가? 답은 오래가지 않아 다행히도 발견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나는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란, 장학금을 받기 위해 서류를 제출하는 과정 중 자신의 목표를 소개하는 글을 쓰라길래 대충 짜집어 지어낸 것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나쁜 생각은 아닌 듯 싶었다. 그때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라는 것은 일종의 공유 플랫폼 서비스였다. 나는 언제인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책에서 역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젊은 해커가 모든 정보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대부분을 유로 서비스로 책정하고 대중의 접근을 제한해오던 논문 사이트를 털어 논문들을 인터넷에 공개해버리는 일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행위는 분명한 범죄였지만, 적어도 '모든 데이터의 흐름은 자유로워야 한다'라는 그 해커의 신조는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논문과 관련한 공유 플랫폼 서비스라는 이상한 아이디어를 그 당시의 서류에 적고 말았다. 생각의 바탕은 간단하기는 했다. 유명 논문 저널인 Nature라던가, Science라던가 그런 저널들은 보통 전문진을 구성하여 논문을 실어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논문의 엄밀성, 권위적 측면에서는 괜찮은 절차라고 생각할 수 있기도 하지만, 조금 생각을 비틀어보면 '권위자'라 이른바 불리는 이들이 '비권위자'의 논문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므로, 그들 사상에 도전하는 것들은 혹여 사장되는 문제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는 결국 어떻게 보면 하나의 검열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자유로운 사상의 표현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자유롭게 대립하여 새로운 사유와 생각이 탄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나의 세계관 자체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권위자'의 심사가 없는 하나의 논문 공유 플랫폼을 생각했던 것이었다. 나는 어떤 논문을 제출하였을 때 그것의 신빙성을 소수의 '권위자'들이 평가하기보다는 다수의 연구진들이 평가하면 어떨까는 생각을 했다. 마치, 최근 제4차 산업혁명이니 무어니를 연신 보도하기를 일삼는 언론이 가끔 언급하던 블록체인 기술이 중앙 서버가 거래 정보를 기록하고 감독하는 것에서 거래 정보를 다수의 컴퓨터에 분산 저장하는 방식으로 획기적인 기술의 전환을 이끌어낸 것처럼, 다수의 연구자들이 다른 이들의 논문을 자유롭게 평가하고, 코멘트를 달고, 비판하고 논쟁하며 때로는 서로가 맞다고 다투기도 한다면 꽤 괜찮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과거의 사유가 떠오르면서 나는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저서에 있었던 하나의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저서인 '나무' 중에 등장하는 '가능성의 나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내가 요약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생각을 해낸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 보다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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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에 나는 이런 일을 상상했다. 사회학자, 수학자, 역사학자, 생물학자, 철학자, 정치가, 과학 소설 작가, 천문학자 등 지식의 모든 지평에서 온 남녀들이 외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장소에 함께 모여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클럽>을 결성한다. 그 전문가들은 갖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지식과 직관을 결합할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무 모양의 도표를 만들어 갈 것이다. 미래에 지구와 인류와 인류의 의식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표시한 수형도를 말이다. 그들의 의견은 서로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때로는 그들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대한 모든 전망을 도덕적 판단에 매이지 않고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축적된 전망들은 우리가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의 데이터 뱅크가 될 것이다. 그 나무의 잎사귀에는 이런 식의 가정들이 적히게 될 것이다. <만약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면>, <만약 기상에 중대한 이변이 생긴다면>, <만약 지구에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부족하게 된다면>, <자본가들이 인건비가 전혀 들지 않는 노동력을 얻기 위해 인간 복제 기술을 이용한다면>, <만약 우리가 화성에 도시를 건설한다면>, <만약 어떤 고기를 먹는 사람들 모두가 그 고기 때문에 똑같은 질병에 감염된다면>, <만약 우리 뇌를 컴퓨터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만약 바다에 침몰한 러시아 핵 잠수함에서 방사능 물질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면> 등등. 그런 심각하고 중대한 가정뿐만 아니라 훨씬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가정이 적힌 잎사귀들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미니스커트의 유행이 다시 돌아온다면>, <만약 정년을 낮춘다면>, <만약 노동 시간을 줄인다면>, <만약 자동차의 대기 오염 허용 기준을 강화한다면>하는 식의 가정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거대한 나무에서 우리 종의 미래상을 보여 주는 가지와 잎이 계속 퍼져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든 작업이 그 나무 그림 속에 온전히 반영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예언자>를 자처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기들의 작업이 <미래를 예언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에는 사건들의 논리적 연관을 보여준다는 특별한 장점이 있을 게 분명하다. 미래에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보여주는 그 나무를 통해서 사람들은 내가 <최소 폭력의 길>이라고 부르는 것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또한 어떤 결정이 지금 당장에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피하는 길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정치가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실용적인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의 나무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제가 이런 정책을 취하는 것이 당장에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중대한 위기를 피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는 대중도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들 자녀와 손자 손녀들의 이익을 내다보며 행동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처럼 환경 보호를 위해 반드시 취해져야 할 조치들이 집단 이기주의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가능성의 나무는 최소 폭력의 길을 찾아내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대에게 살기 좋은 지구를 물려주기 위해 그들과 정치적 협정을 맺게 해 줄 것이다. 가능성의 나무는 굵기로 보나 높이로 보나 굉장한 거목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나무를 그린다면 매우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그림이 나올 게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나는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방법을 상상해보았다. 그 나무의 가지들을 낱낱이 그릴 수 있고 원하는 가지들을 따로따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말이다. 내 생각에는 체스 게임 프로그램의 엔진과 조금 비슷한 엔진을 이용할 수 있을 듯했다. 몇 수 앞으로 내다보며 최선의 응수를 찾아내는 체스 프로그램의 원리를 이용하면 인류가 나아갈 최선의 길을 보여 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요인이 다른 모든 요인에 미치게 될 영향을 계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노동 시간을 줄인다면>이라는 가정이 적힌 잎사귀가 <만약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면>이라던가 <미니스커트의 유행이 다시 돌아온다면>이라는 잎사귀에 간접적으로라도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나는 어떤 섬에 있는 거대한 건물을 상상했다. 건물 한복판에는 컴퓨터가 있고, 거기에 가능성의 나무라는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다. 컴퓨터 주위에는 강당과 회의실과 휴게실 등이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거기에 와서 며칠씩 머물며 자기들의 지식으로 가능성의 나무에 물을 주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일에서 크나큰 기쁨을 얻게 되리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폭력을 방지하고 다음 세대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을 연구자가 누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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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위와 같은 나무를 상상했었다.


 그 두 가지의 잡념이 머릿속에서 엉켜 낳은 결과란 꽤 흥미로웠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미술관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고 해는 이미 떨어진지 오래였다. 나는 예전에 깨달음의 순간은 너무나 광명이 깊어서 그 자리에서 기쁨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미처 날뛰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그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의 깨달음의 순간이라 칭할 수 있을 그 순간은, 마음이 갑자기 고요해지더니 그냥 무언가 심장 박동이 더 잘 느껴짐과 동시에 약간 먹먹하고 찡한 기분이 드는 그런 것이었다. 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질문의 나무'를 생각해내었다. 이는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개미" 제5권에 대략적으로 나오는 '개미 혁명단'의 작은 소사업과 비슷했다. 누군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질문에 답을 한다. 누군가는 다른 답을 내어 놓는다. 그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논리와 데이터를 들고 와서 격렬히 논쟁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유가 탄생하던가 승부의 판가름이 난다.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나의 생각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가능성의 나무'와 조금 다른 부분은 '가능성', 즉 작가의 if에 대한 질문이 모든 의문사로 확장되었다는 것, 그리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는 가능성의 나무를 기르는 정원사들을 소수의 전문가들을 외딴섬의 건물에 맡기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나는 가능한 인류 전체가 참여하는 나무를 상상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이 '질문의 나무'가 그 유명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페이스북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페이스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다른 이들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다른 이들의 일상 속에서 발견하면서 안도를 느끼기도 하며, 여론의 선동과 다른 이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지 않던가. 비슷하게 나의 플랫폼에서는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되는 호기심이 그 원천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질문이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다른 생각들을 접하고 논쟁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깨고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것은 마치 니체가 주장한 '위버멘쉬', 즉 '자기 초극의 의지'의 일종이 아닐까.


 꽤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괜찮은 목표라고 생각했다. 네이버 지식인, QnA 게시판, 포럼 게시판의 신조를 극한까지 밀고 올라간 듯한 이 생각을 실제로 현실에 구현해보면 꽤 재미있지 않을까는 생각을 나는 했다. 질문들이 브레인스토밍을 한참 진행 중인 어느 회의실의 칠판에 붙은 포스트잇들처럼 붙고, 그것들에 대한 대답들이 그를 덮고, 그것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그것들의 집합의 총체에 대한 새로운 주석이 붙고, 몇 개의 포스트잇은 다시 떼어지고....... 나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해야겠다 - 그런 생각이 들었다. 꽤 신선한 시도가 될 것 같았고, 죽기 전에 한 번 매달려 볼 프로젝트로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의 구현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정보과학에 대하여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으니 이를 목표로 설정하면 나 자신의 관심사와 맥락을 같이 하는 바가 분명히 존재하므로, 재미있게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된 순간이라 정의하기 시작했다.




샛길, 목표, 계획, 그리고 혁명


 미술관으로 가는 샛길로 빠진 나는 카페에 들어가 4,200원어치의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그러한지 <전 메뉴 테이크-아웃 가능>이라는 현수막이 눈길을 끌었다. 밖으로 나왔다. 공원이 새단장된 뒤로 저녁의 몇 시간 사이에 시에서 켜 주는 조명들이 나무들을 제각각의 색상으로 비추고 있었다. 나무의 색상은 분홍색에서 주황색으로, 주황색에서 노란색으로, 노란색에서 녹색으로, 녹색에서 청록색으로, 청록색은 다시 보라색으로, 그리고 보라색은 다시 분홍색으로. 회귀.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의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꽤 셌다. 파카의 지퍼를 나는 올렸다. 손이 조금씩 시리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의 온기에 의지하고자 잔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쌌다. 그러곤 다시 걸음 그리고 사유의 세계로 입성했다.


 꿈을 가진 자들은, 즉 목표를 가진 자들은 으레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법이다. 나 또한 그런 관습에 맞추어, 어떻게 내가 조금 전에 생각한 꿈을 달성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우선적으로 나는 학업에 더욱 정진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수학이 더욱 그러했다. 머신 러닝을 코세라라는 온라인 강좌로 대충 훑어보고 있던 나는 선형 대수학 및 각종 정리, 통계학에서의 각종 이론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이때 나는 수학의 중요성을 꽤 느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학업에 정진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아니, 사실은 두 가지일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들의 합이라서 하나가 되는 이유였다. 두 생각 중 첫 번째의 것은 얼마 전의 일에 대한 생각이었다. 몇 주 전의 일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날 우리 집의 식탁에서는 야심한 시각에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가 계셨고, 나는 그 옆에서 안주를 조금씩 집어 먹고 있기는 했다. 무슨 경로로 문제의 논쟁에 진입했는지 나는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중간에 있었던 아버지의 말씀은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힘을 가져야 한단다. 어떠한 힘을 가지지 않고서 세상을 바꾸려 해 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반면 둘째 생각이라는 것은 아까 총선 포스터를 보면서 떠올렸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그 구절과 관련된 또 다른 구절 하나였다.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82. 백과사전

검열


 옛날에는 정보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단순하고 노골적인 검열 방법을 사용했다. 체제에 도전하는 서적들을 간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검열의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이제는 정보를 차단하지 않고 정보를 범람시킴으로써 검열을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이 오히려 한 층 효과적이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무의미한 정보들 속에서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정보가 어떤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텔레비전 채널이 늘어나고, 프랑스에서만도 한 달에 수천 종의 소설이 쏟아져 나오며, 온갖 종류의 비슷한 음악들이 어느 곳에나 퍼져 나가는 상황에서 혁신적인 움직임이란 나타날 수 없다. 설령 새로운 움직임이 출현한다 해도 대량 생산되는 정보들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결국 이 거대한 진창 속에서는 대중 매체가 만들어낸 상품들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상품들이 가장 인기가 있다는 점 때문에 마음놓고 소비한다. 텔레비전에서는 게임과 쇼, 문학에서는 자진적인 사랑 이야기, 음악에서는 <수려한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단순한 선율에 담아 제시하는 사랑 노래들이 판친다. 과잉은 창조를 익사시키고 비평은 마땅히 이 예술적 범람을 걸러 낼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홍수 앞에 주눅이 들어버린다. 이 모든 것이 빚어내는 결과는 자명하다. 기성 체제에 도전하는 새로운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음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3권




 나는 내가 목표한 바를 정확히 그리고 제대로 구현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말씀도 맞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지적도 정확했다. 수많은 정보들과 이데올로기들이 흘러나오는 현실 속에서 나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대중 매체들을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대중 매체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 힘을 얻는 초입 단계는 입시가 분명하기는 했다. 나는 하나의 목표를 얻었고, 그것의 수단으로써 학교와 사회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서는, 어쩌면 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하나의 혁명이 되면 좋겠다는 망상을 즐겼다. 하나의 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경종은 끊임없이 울렸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질문의 나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의 가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많은 사람이 참여해줘야 잘 운영되고 운영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수가 아닌, 인류 전체에 의한, 다수에 의해 함께 구현되는 미래를 향한 전진. 그것이 직관이 나에게 속삭이는 바였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순간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언젠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나는 <설국열차>를 보았다. 선생님은 모 평론가의 글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그 글 중에,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본 적이 있었다. "혁명은 기차를 멈추는 것인가, 아니면 앞문을 따고 들어가서 기차의 기관차를 차지하는 것인가?" 작 중에서 이 질문은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문의 폭파를 두고 갈등하면서 고조된다. 커티스는 앞문을 따고 기관차에 진입하자고 했고, 남궁민수는 옆문을 따고 기차를 멈추자고 했다. 그것은 혁명에 관한 한 분명한 그들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나는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기차를 멈추는 것', '기차의 기관차를 차지하는 것'이라는 것보다는 보다 괜찮고 그럴듯한 다음의 대답을 떠올리게 되었다.


 "혁명은 수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감동이라고 함은, 그의 몸과 마음이 바뀌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이다."


 반환점이었다. 나는 산책을 나갈 때 걸어서 왕복으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다리까지 가기로 생각했었으므로, 커피 몇 모금을 마시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혁명에 관한 생각은 이 즈음에서 그치기로 했다. 아무래도 관련된 생각을 계속 하는 것은 과거의 내 주특기이자 아직도 못 말리는 나의 잘못된 버릇인 자기 기만의 늪으로 다시 빠질 염려를 재촉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커피잔에 담겨 점점 식어가는 커피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 모금을 더 마시고는, 그 전으로 돌아가 좀 더 깊은 질문은 없을까 생각했다. 나는 내 '질문의 나무'에 관해 다시 생각했다. 괜찮은 생각이 연이어 떠오르는 데에는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호기심, 세계를 예측하고 싶다,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질문의 나무'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되는 호기심에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호기심이라는 것은 왜 생기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은 왜 질문을 던지는가?" 라는 물음. 그 물음에 대하여 나의 양쪽 반구 모두 이상한 생각의 늪에서 이것저것을 들쑤시고 또 이어붙인 끝에 꽤 괜찮은 작업물을 하나 내어놓는 듯 싶더니... 그 작업물이 무언가 '스침'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 직감이 말한 바는, 예전에 국어 시간에 독서 토론의 일환으로써 몇 권의 책을 읽고 수업 시간에 논의하던 도중 들었던 다음의 내용을 떠올려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항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낯선 것에 맞닥뜨릴 때 생각을 한다."


 나는 그 구절을 직관의 권유에 따라 다시 곱씹어보았다. 낯선 것에 맞닥뜨릴 때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도으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은 어떻게 출발한 것인가? 낯선 것에 맞닥뜨릴 때에, 위 문장과 같이 그냥 떠오르는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왜 굳이 우리는 낯선 것에 맞닥뜨릴 때에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인가? 수많은 질문은 다시 머릿속을 혼잡하게 했다. 다만 그 중에는 이런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전의 몇 가지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면서 스스로의 세계관을 구성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논쟁을 통해 그 세계관을 붕괴시키고 남의 세계관도 붕괴시키면서 서로가 각자의 세계를 초월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남의 공격에 대하여 스스로가 변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방어한다......


 "변명."


 어쩌면,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세계를 너무 강력히 구축하고 있는 나머지 너무 우리 뇌로는 이해하기 힘든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서의 예측과 다른 결과를 가져줄 때면 실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계를 저주하기도 하고 스스로의 절망을 구렁텅이로 밀어넣고는 열심히 채찍질하기도 한다. 야심한 밤 시각에 방문을 잠그고 좋아하는 음료 - 어른의 경우는 대부분 알코올이 포함된 것이긴 하겠지만 - 를 꺼내어 홀짝거리면서 눈물이나 콧물을 훌쩍거리기도 하며,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일련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붕괴되고 있는 세계의 고통을 덜어주는 모르핀 마냥, 스스로가 스스로를 향해 쏟아내는 변명. 어쩌면 호기심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예측하고 싶고, 그 예측대로 세계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습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다시 미술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는 그 온기를 다해 가고 있었다. 나의 사유도 종착점에 점차 다다르고 있음을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열기를 앗아가는 봄의 자녁, 강변 바람을 피해 저마다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세계를 예측하고 싶고, 그 예측대로 세계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순간적인 직관은 먼 예전의 역사를 가리켰다. 그것은 마치 칼 세이건이 그의 유명한 저서 "코스모스"의 중간 어디에 수록한 이야기와 비슷했다. 그 구절이 순간 생각났다.




 "

 이를테면 호모 속의 유년 시절, 즉 불이 처음 발견되던 때를 상상해보자.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조상들은 별을 과연 무엇이라 여겼을까? 가끔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그 시대에도 틀림없이 살고 있었다고 상상한다. 이제 나의, 아니 그가 걸어온 상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우리는 열매와 뿌리를 먹고 산다. 나무 열매와 잎 그리고 죽은 짐승. 어떤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리고 또 어떤 것은 죽여서 먹는다. 우리는 어떤 것은 먹어도 되고 어떤 것은 먹으면 위험한지 알고 있다. 어떤 것은 혀만 대도 죽는다. 그러한 것을 먹은 죄로 우리는 그냥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나쁜 짓을 일부로 한 게 아닌 데도 말이다. 어쨌든 디기탈리스나 독당근을 먹으면 죽을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과 친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위험한 것들은 먹지 말라고 그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다. 사냥을 나갔을 때 우리는 짐승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짐승의 뿔에 찔릴 수도 있다. 짓밟힐 수도, 먹힐 수도 있다. 동물이 하는 일이 우리의 생사를 좌우하기도 한다.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떠한 자취를 남기는가? 짝짓는 때와 새끼 치는 때, 돌아다니는 때가 언제인가?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알아 둬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것을 알려 준다. 그 아이들은 또 제 아이들에게 같은 사실을 전해줄 것이다.


... (중략) ...


 어떤 별은 하늘을 떠돌아다닌다. 우리의 사냥감들처럼. 그리고 우리처럼. 몇 달 동안 자세히 관찰하면 그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들처럼 그들은 모두 다섯이다. 그들은 별과 별 사이를 천천히 떠돈다. 만일 별이 모닥불이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 별들은 커다란 불을 들고 다니는 방랑하는 사냥꾼들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가죽에 뚫린 구멍이 돌아다니는 별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은 뚫린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구멍은 움직이지 않는다. 또 나는 자신이 불꽃의 하늘로 둘러싸여 있지 않기를 바란다. 가죽이 떨어진다면, 밤하늘은 밝아질 것이다. 너무 밝은 것이다. 마치 사방에 불꽃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되면 불꽃 하늘이 우리를 전부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하늘에는 힘센 이들이 두 편으로 갈라서 있는지 모르겠다. 불꽃이 우리를 잡아먹기 바라는 나쁜 이들 그리고 불꽃이 우리에게 닿지 않도록 가죽으로 막아 놓은 좋은 이들. 이 좋은 이들에게 어떻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알아야겠다. 나는 과연 별이 하늘에 떠 있는 모닥불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별이 가죽에 뚫린 구멍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히 힘이 센 불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구멍인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어떤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또 다른 때에는 저렇게 생각하게 된다. 모닥불도 구멍도 아닌,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 다른 것이라 생각했더니 모든 게 이해하기 너무 힘들어졌다. 통나무에 목을 대고 반듯이 누워 보자. 머리가 뒤로 졎혀진다. 그러면 오로지 하늘만 보일 것이다. 언덕도, 나무도, 사냥꾼도 안 보인다. 그저 하늘만 보인다. 어떤 때에는 하늘로 빠져 들어갈 것 같다. 만일 별들이 모닥불이라면, 나는 그 주위에 있을 사냥꾼들을 만나 보고 싶다. 방랑하는 자들 말이다. 그럴 때에는 하늘에 푹 빠져들고 싶다. 하지만 만약 별들이 가죽에 뚫린 구멍이라면 나는 두렵다. 구멍을 통해 하늘에 빠져들어 힘센 불꽃 속으로 들어가기가 싫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모른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




 칼 세이건이 이 구절을 저서에서 제시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가 제시한 가상의 이야기에서 내 사유의 최종장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원시인들은 왜 동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떠한 자취를 남기는지, 짝짓는 때와 새끼를 치는 때, 그리고 돌아다니는 때가 언제인지 알아두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려고 했는가? 그것은 그들을 안전하게 사냥하고 그들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원시인들이 만일 별을 보다가 미지의 별들을 검은 가죽으로 가려진 모닥불들이 뚫린 구멍으로서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을 때, 왜 그 가죽이 떨어지지 않는지를 생각하게 된 것인가? 그들이 알 수 없는 어떠한 것이 그들을 위협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질문, 그들은 왜 안전한 사냥을 통해 확보한 고기들을 먹어야 했고, 그들이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그들을 위협할까 두려워해야 했을까? 그 답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나는 믿었다.


 "생존."


 인간은 수많은 역사의 논증을 통해서 삶에는 한계가 있고 그 끝에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 죽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각종 요소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아무래도 가장 좋은 도구로서 '호기심', 그리고 '세계를 예측하고 싶다는 욕망'을 개발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믿음이라는 것도, 혁명이라는 것도, 인류의 역사 곳곳에 숨어 있는 수많은 생각들과 그들이 했던 행동 모두가, 그들의 생존 욕구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일으켰던 농민들의 혁명, 왕을 끌어내린 공화정으로의 혁명과 같은 모든 혁명들, 인본주의, 민주주의, 과학, 수학의 각종 정리.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도구들, 그 모든 발명과 발견과 예견과 선지와 진보를 향한 갈망,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죽음으로부터의 공포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혁명을 통해서, 자연을 관찰하고 각종 도구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하려고 시도하고, 각종 생각들을 글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예술의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죽었을 때 스스로의 어느 한 조각이라도 세계에 남겨놓고 감으로써, 계속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존속할 수 있게 되는....... 리처드 도킨슨의 주장이 떠올랐다. 부모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는 이유는 사실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자식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부모는 스스로를 세계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또 하나의 존재에 대한 생존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결론


 잡념이 많았다. 커피가 다 식었다. 서둘러 나는 그것을 들이키고 쓰레기통을 찾았다. 길을 헤매던 차에 운동 나온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나를 힐책하셨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 전화는 진동 모드로 되어 있는 상태로 파카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으니, 당연히 전화가 왔다면 진동이 느껴졌을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부재중 전화 몇 통과 아버지의 걱정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사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깊게 갔던 모양이었다.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집중해본 것이,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집중해본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었던 까닭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혼자 생각할 것이 조금 많았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그 생각한 것들 중 하나를 말해보라고 하셨다. "생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요." "이상한 놈." 아버지의 대답이셨다. 그리고 지금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옆에서 쓸데없는 짓을 몇 시간이나 붙들고 있냐며 나를 힐책하는 어머니가 계신다. 하지만 나는 쓸데없는 짓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며, 가장 쓸모있는 것이라는 견해를 조심스럽게라도 말씀드리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별로 없다. 아직도 두 분은 화해하지 못하셨으며, 여전히 집안 분위기는 냉랭하고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예민하시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 하나는 찾아냈다.


 "생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생각은 인간이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미지에 맞닥뜨릴 때, 죽음에 대한 공포의 반사작용으로서 나타나는 호기심과 세계를 예측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근원하는 질문으로부터 탄생한다. 때로는 그런 생각들 중 몇몇이 많은 이들의 믿음을 얻고 권위를 얻어 세계를 지배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1시간 30분 동안의 짧은 사유 - 그리고 그 전부터 몇 달 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몇몇 질문들과 생각들에 대한 나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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