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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Aug 03. 2021

그릇이란 무엇인가

'그릇'과 그릇의 동형성, 그리고 '도공' / 사유(思惟)

사유(思惟)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일상 속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자체 선별하여 연재하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일러두기.


 이 글은 필자의 지난 글,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에 대한 후속 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 여전히 우리에게는 질문이 남아 있는 듯하다. "그릇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한 용어를 정의하는데 있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란 그 용어가 지시하는 추상 혹은 실체가 가지는 속성들의 집합을 만들어 그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므로 (무정의 용어) '그릇'의 속성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과정으로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초 첫 번째 질문이었던 "그릇의 크기는 변할 수 있는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질문은 결국 "그릇은 불가변적(不可變的)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인데, 이는 또한 “그릇은 선천적(先天的)인가?”라는 질문과도 분명히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에게는 자료와 경험이 너무 부족하므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직관이 가리키는 바, 그리고 나의 믿음이 분명히 가리키는 바는 이 모든 질문 즉 “그릇은 불가변적인가?”와 “그릇은 선천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동일하게 “아니오.”로 하고 싶음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릇’의 또 하나의 속성을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릇’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그릇’이 부정된 이상 이것의 속성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므로 ‘그릇’이 존재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잠시 나의 믿음은 치워두고 ‘그릇’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어 보도록 하자. 우리의 ‘그릇’과 현실의 그릇은 분명 어떤 동형성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므로, 현실의 그릇에 대한 어떤 관찰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질문은 이것이다. “그릇은 혼자서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다르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릇은 자기-지시적(self-directed)인가?” 그런데 현실의 그릇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혼자서 그릇이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릇의 발생을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담아 잡는” 어떤 것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 “담아 잡는” 것의 존재로 인하여 “텅 빔”이라는 속성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릇은 그제야 ‘그릇’이라는 추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릇은 그릇이 아닌 다른 존재의 개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릇은 주체가 아니며, 오직 어떤 주체의 행위들에 의하여 형성된 자연의 어떤 한 부분이 “담아 잡는”이나 “텅 빈”이라는 속성을 가질 때에 형성되어 그 부분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이다. 즉, 그릇은 자기-지시적이 아니다. 곧 그릇은 혼자서 만들어질 수 없고 그릇을 형성하는 누군가, 그릇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그릇’과 현실의 그릇 사이에 형성된 동형성이 이 경우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면,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실질적 추상인 ‘그릇’도 형성을 위하여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나는 이 다른 누군가를 흔히 현실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인 ‘도공’이라는 말로 칭하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우리의 ‘그릇’에 대한 ‘도공’은 무엇인가? ‘도공’은 (만약 존재한다면) 신(神)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나는 신에 관한 한은 불가지론자이므로 사실은 둘 중 어느 결론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신(神)이 존재하는 것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경우에 따라 누군가 보기에는 불경하다고 할 수도 있을) 어느 직관에 따라, 나는 ‘도공’의 후보 중 전자(前者)는 탈락시키고 후자의 후보로서 ‘도공’을 확정하고 싶어 진다. 즉, 개인에게 ‘그릇’이 존재한다면, 차이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 개인의 ‘그릇’을 빚는 ‘도공’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주장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나의 어떠한 주관적인 믿음이 개입된 도출 과정에 따라 나온 결론이므로, 여전히 정답은 알 수 없다.


 혹자는 계속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선천적인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러한 질문 밑에 깔린 ‘사람의 차이는 선천적인 요소에서 기원한다’라는 명제가 명백히 참인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명제에 대한 답이 아마도 ‘전혀 아니다’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사실 사람마다의 차이를 ‘선천적’으로 부여된 어떤 것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것에는 우리가 현실의 어떠한 모순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나름의 자기변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본다.


 … 여전히 우리에게는 질문이 남아 있는 듯하다. “그릇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그 대답은 우리 스스로의 믿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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