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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Nov 03. 2021

안으로 세움

유한성 속에서, 알고자 하는 욕구에 대하여

 사유(思惟)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일상 속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자체 선별하여 연재하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며칠 동안 지속되고 있는 편두통이 도저히 가시질 않는다. 의사는 긴장성 두통이라고 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펜을 붙들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생활 습관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은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중간고사가 급했으므로, 일단은 의사에게 급한 대로 진통제나 근육이완제라도 처방해달라고 요청했고, 따라서 14일 분량의 의약품을 얻어 돌아왔다.


 내가 몸이 약한 탓일까? 내가 너무 오랫동안 숙이고 있는 탓일까? 이상하게도 내가 느끼기에는 주변 사람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나만 무언가 책상 앞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생활 습관을 바꾸기가 아무래도 어려운 듯한데,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항상 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너무나도 많고, 내게 시간은 너무나도 부족하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나 자신을 지배하는 아주 강력한 욕구는 단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세상의 모습을 최대한 정확하고 있는 그대로 나의 안에 세우는 것이었다. ‘안에 세운다’라는 표현 자체가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존 로크(John Locke)의 ‘표상적 실재론’을 고려해보면, ‘안에 세운다’라는 표현이 사실은 사람의 앎, 그리고 나아가서는 한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정립 과정을 지칭하는 데에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닐까 싶다.


 요즘 내가 취미 삼아 읽고 있는 (따라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로크의 저서인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그는, 사람의 앎에 대한 유일한 대상은 곧 그 사람 안에 있는 ‘외부 세계에 대한 표상’이며, 그것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지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모든 앎은 궁극적으로 감각 기관을 통하여 인간이 과거에 경험한 것들로부터 오는 감각 표상과 그것들의 복합, 내지는 내성(內省)을 통해 형성된 산물로만 구성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표현이 다소 어려워지고 있으므로, 약간의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아주 간략히 요약하자면, 로크 그는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여 마음속에 그리게 된 것, 가지게 된 것’을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인지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세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그것도 모든 것을. 그러나 복잡계의 올바른 이해라는 나 자신의 이와 같은 욕구는 안타깝게도 로크의 ‘표상적 실재론’에 의해 결코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인간이 그의 삶 속에서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그는 ‘경험한 것’ 이외에는 결코 지각할 수 없다는 자신의 특성 때문에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여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것을 경험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며, 단 한 번의 경험이 항상 그 대상에 대한 이해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님을 나는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란 그 수가 거의 무한히,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고, 또한 몸의 한계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또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여 보면, 궁극적으로 한 사람이 그 유한한 인생을 다 바쳐도 세상에 대한 완벽한 표상을 그 자신 안에 세울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 나는 굳이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대한 완벽한 표상을 나 자신 안에 세울 수 없더라도, 그 표상을 가능한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목표가 되면 되지 않을까 – 하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욕망은 솔직히 말하고 보면,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종류의 것이다. 세상에 대한 완벽한 표상을 정립하고자 하는 욕구에는 타인에 대한 그 어떠한 고려도 포함되지 않는다. 오직 그 욕구에는 나, 그리고 나 자신이 아닌 것 즉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인 환경, 그 둘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로크와 같은 사람들, 시대를 거쳐간 모든 수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더욱 증진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한 그 결과물이 지금 나 자신의 앞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이러한 이기적인 욕구는 의외로 용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가지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과정에서, 내가 남기게 될 저작물은 내 삶이 종결에 이르더라도 아마 남아 계속될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이러한 불가능한 목표에, 마치 태양 속으로 달려들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나비와 같은 또 다른 시대의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며 계승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대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끝없이 달려간다는 행위와 다름없다는 점에서 바보 같은 행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바보 같은 도전들과 수많은 죽음들, 남겨진 과제와 아쉬움이 세상을 천천히 바꾸어 오늘날 우리를 여기에 이르게 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나 자신 안으로 최대한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 세상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가지기 위해서는, 세상의 사물을 나 자신 안으로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세상의 사물들을 보는 전통적 · 관습적 시각들을 모두 알아보고, 각각을 의심해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사물들을 인류가 기존에 보아 왔던 시각이 맞다면, 오류의 여지가 없다면 아마도 그 사물은 나 자신 안에 그러한 시각에 따라 올바르게 그대로 세우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각이 틀려서, 오류의 여지가 있어서 의심스럽다면 나는 가능한 올바른 표상을 나 자신 안에 세워야 한다는 대목적에 의거하여, 그 사물을 다시 올바로 일으켜 세운 뒤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모든 학문이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 상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잘못 일으켜 세워진, 그렇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잘못 세워진 사물들을 다시 올바르게 세우는 과정을 통하여, 한 개인이 그가 가지는 세계에 대한 표상들이 가능한 많이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학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학문의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정의와 의의는 나의 이 강력한 욕구와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다. 즉,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학문은 ‘사물을 올바르게 안으로 세움’에 그 정의와 의의가 동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정의로 말미암아, 학문은 공동의 영역에서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물을 올바르게 안으로 세움’을 제공하는 것이 그 목표이자 정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이 모든 것은 가을이 지나가는 중에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망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나의 망상이 아니기를, 따라서 나의 욕망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며 나름의 의미가 있기를 기원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든지 말든지 간에,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움직이는 최고의 동기인 호기심을 좇을 뿐이다. 욕망에 따르는 고독한 인간이기에, 그렇기에 더욱 고독하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호기심’이라는 욕망을 따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이라는 점에서는 아마 고독하지는 않으리라. 그것이 나의 삶이기에, 나는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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