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로, 공존이 결여된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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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로(Aggro)'라는 낱말이 있다. 원래는 '폭력'이나 '성가신 문제'를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많은 이들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전자기기의 보급과 통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이 낱말의 뜻은 바뀌고 말았다.
이제 '어그로'는 온라인 상에서 타인에게 혐오 ·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행위, 즉 상대방을 도발하는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바로 이 바뀐 의미에서의 '어그로'가 문제이다. 몇몇 커뮤니티나 특정 웹사이트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당장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Youtube, 근래 들어 급부상한 인터넷 방송 스트리밍 플랫폼인 Twitch, 중앙일보 · 조선일보 · 한겨레 · 경향신문 등과 같은 인터넷 신문사들의 홈페이지 댓글, 네이버 · 다음과 같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그리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이 우리의 일상이 됨과 동시에 어그로도 우리의 일상 속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어그로'는 민주주의에 있어 치명적이다. 흔히 광분에 휩싸인 이만큼 사람이 비이성적인 때는 거의 없다. 민주주의는 올바른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구축된 개인의 견해들이 공동으로 숙의(熟議)된 이후 가장 공익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선택으로 나아가는 것이 기본적인 동작 방식이다. 그런데 비이성적인 태도는 이 민주적 의사결정의 핵심인 숙의 과정에 개인이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만드는 데다가, 비이성적인 태도에 흔히 동반되는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일종의 전염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비이성적 태도는 그 자체로 전염성이 있다. 즉, 비이성적인 사람은 또 다른 비이성적인 사람을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비이성적인 태도는 민주주의에 있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한 개인에게 비이성적인 태도를 유발할 수 있는 '어그로'는 건강한 사회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적에 다름없으며 당연히 추방되어야 하는 종류의 것이다.
한 개인이 무엇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를 명확히 사실과 논리에 근거하여 판단하지 못하면 오류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오류의 누적은 사회적인 오해와 소통의 실패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긴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수많은 전쟁들도 하나같이 누적되어 온 작은 오해들이, 몇 번의 소통과 이해가 있었더라면 빚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 그러한 잘못된 의사 전달이 누적된 결과로써 터지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역시 '어그로'는 사회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감히 선언해도 될 것이다.
왜 어그로는 발생하는가? 어그로는 사회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사회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 이 어그로를, 발하는 사람들이 왜 존재하는 것인가? 가능한 대답은 여러 개일 수 있지만, 어쩌면 하나의 대답이란 공익적으로는 해롭더라도 어그로가 한 개인에게 모종의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그리고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능력이 결여된 이들이 기꺼이 타인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고자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최대화되고 손해가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물론 인간의 본성을 가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수천 년의 학문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이익-손해의 연산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지 않던가.
혹자는 인간이 가진 이 본성 때문에 어그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변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음을 강조하고 싶다. 인간은 이익과 손해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 심지어 자신의 생명이 다한 다음의 일까지도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스스로에게 가져다줄 이익과 손해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그리고 주변에 어떠한 결과를 미칠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들 중에서는 보다 불확실한 공공의 이익이나 먼 훗날의 이익보다는 당면할 수 있고 확실한 자신의 이익을 압도적으로 높게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들 중에는 아마 어그로를 발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가져가는 확실한 이익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규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어그로가 도대체 이들에게 어떤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들은 어그로를 발하는가? 내가 생각하기로 이들이 가져가는 확실한 이익이란,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 종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첫 번째 종류는 '감정적인 이익'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다. 어쩌면 어그로를 남발하는 이들은 자신의 계획 · 발화 · 행동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이 광분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타인의 감정이나 상태를 조작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들은 그러한 타인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자신은 저렇게 비이성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각인하면서 타인과 자신의 비교로부터 오는 우월감을 계속 맛보고 싶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간적인 쾌락, 순간적인 감정의 이익이 어쩌면 어그로를 남발하는 이들의 욕망 한편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종류는 '금전적인 이익'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이른바 '1인 방송'이 가능해지면서 오늘날 사람들은 Youtube나 Twitch 등의 플랫폼, 그리고 후원 서비스를 통하여 모종의 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예술가들과 인터넷 방송인들은 자신의 후원 페이지를 열어두고 자신의 노동에 대가를 자율적으로 지불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중의 지갑을 여는 것이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극히 소수만이 지갑을 연다. 그들의 목소리와 색깔에 매혹되거나 감동받은 (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들만이 지갑을 열 뿐이다. 후원이 아닌 광고를 통한 수익도 쉬운 것이 아님은 매한가지이다. 콘텐츠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되고 소비될 때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광활한 인터넷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므로, 금전 앞에서 인간의 욕심이란 더 많은 노출과 전파를 향한 욕심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그러한 욕심이 당위의 영역에서 저지되지 못하고 금기시되는 도발을 통한 주목받기의 서사로, 즉 어그로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혹자는 말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좇을 수 있으며 손해나 위험을 최소화하거나 피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함께 살아가기'이다. 사회는 단 하나의 개인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사회는 복수의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이들 복수의 개인은 제각각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따라서 생각도 다른 사실상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환경 속에 위치한 유기체라면, '사회' 속에 위치한 유기체라면 사회와 자신이 공존할 방식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에, 그리고 한쪽을 패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은 자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라는 사실에 당연히 동의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다. 과거의 원시 인류야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 문명이 발명한 분업과 특화, 숙달은 개인의 타인에 대한 의존성을 압도적으로 높였다. 이제 '나'는 주변의 다른 이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인류라는 고도로 연결된 사회에서 공존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제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하여 타인과 협력하고 공동의 규칙을 준수하는 '이기적'인 행위로 구성된다. 따라서 공존을 위협하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주장되는 행위들은 결코 '이기적'일 수 없다. 이들은 '파괴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그 행위들은 당장 행위자 스스로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그 스스로에게 파멸을 가져다줄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공존의 질서를 흔드는 어그로는 우리 사회에서 철저히 추방되어야 한다. 시전자에게 단기적으로 이득 아닌 이득이 될 뿐, 장기적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이익이 될 수 없는 무용한 행위는 사회에서 당연히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이들은 어그로를 범하는 이들은 이른바 '관심종자'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들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말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혐오와 무관심이 아니라 세밀한 구별 그리고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무관심은 이미 효과가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으며, 게다가 무관심은 어그로가 '함께 살아가기'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스스로의 눈을 돌리는 비겁한 행위에 다름 아니지 않던가.
민주주의 사회는 이제 타인에게 혐오나 분노를 유발하는 도발 행위, 즉 어그로를 보다 세밀하게 구분하고 이들이 어떠한 이유에서 일어나는지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인터넷은 이제 우리 모두가 이용하고 있는 기술이므로, 그 기술의 한편에 괴상한 모습으로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아주 당연한 '공존'을 가로막고서 서 있는 '어그로'는 이제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논의하고 대응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무관심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이제 그 어떠한 피해도 추가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어그로가 초래하는 파괴적인 효과가 더 이상 발생하지 못하도록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구분하고 분석하여, 적절한 규칙과 제한을 정하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혹자는 여전히 나의 견해에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다음을 강조하고 싶다. 인간은 이익과 손해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 심지어 자신의 생명이 다한 다음의 일까지도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스스로에게 가져다줄 이익과 손해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타인과 주변에 어떠한 결과를 미칠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