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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Jun 29. 2024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커피사유의 책장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읽은 책들에 대한 서평을 연재하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 주세요.




한줄평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 2020.


오늘날 벌어지는 정치 · 경제 · 문화의 전반에 걸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그 원인을 탁월하게 짚어내는 철학적 안목, 그러나 대중 강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은 무성의한 도서




총평


#1.


 김누리 교수의 안목은 정확하다. 그가 제시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오늘날 여실히 정치 · 사회 · 경제 전반에 걸쳐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일상 민주주의’ 없는 ‘광장 민주주의’의 이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던진 “광화문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이 집에 가서는 완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쥐 잡듯이 들볶는 권위주의적 교사요, 혹은 회사에 가서는 갑질을 일삼는 상사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하지요?”라는 질문은 1960 ~ 80년대의 군사독재, 남북의 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립의 심화, 산업 재해로 인한 노동자의 사망, 학벌 계급 질서와 경쟁 사회 속에서의 소외 현상이 이제는 국가의 존립마저 흔들기 시작한 우리나라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혹자는 이 책의 주요한 지적 사항이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에서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68혁명의 부재’와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 역사적 환경에서 근거한 것이므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민족의 현실’을 중시하는 태도를 사회 전반적으로 가져야 한다는 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변화 · 개혁이란 경제학적으로는 자원의 분배를, 정치학적으로는 가치 · 방향의 결정을 행하는 정치와 별도로 진행될 수 없는 것이다. 민의가 모여서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집행하기 위해서는 문화, 즉 우리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들의 총체가 변화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문화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정치의 변동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지향점은 궁극적으로 ‘정치의 변화’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변화’가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대의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유권자 지형을 변화시키는 것이 첫째요, 선거 제도를 변경하는 것이 둘째가 된다. 그러나 둘 모두에는 상당한 장애물이 있다. 전자에 관해서는 유권자, 즉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최소한 우리 개개인에게 사회의 부조리 · 압제를 지각하고 이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식이 신장되려고 한다면 결국 스스로의 내면과 생각들을 성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에고이스트(Egoist)’[1]가 탄생해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기 때문이고, 후자에 관해서는 저자가 지적하는 86세대의 정치 기득권과 잘못된 선거제도에 대한 개혁이 ‘근본적인’ 원인 때문에 어렵기 때문이다.


#3.


 에고이스트(Egoist)가 탄생하기 어렵다는 점은 오늘날 사람들을 유혹 · 고립시키는 SNS와 온라인 비디오 플랫폼 등의 막대한 영향력만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책과 글보다는 시 · 청각 모두에 자극을 퍼부어주는 비디오와 실시간 스트리밍이 정보와 문화에서의 지배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개인이 스스로의 그릇을 깨뜨리고 다시 붙이면서 정신의 성찰과 확장을 꾀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거의 없어지고 있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 우리 사회의 종합독서율[2] · 종합독서량은 심각하게 줄어들고 있다. 2023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종합독서율은 43%이고, 종합 독서량은 평균 3.9권 정도로,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6할은 책을 1년 동안 단 한 권도 읽지 않고, 읽는 사람들도 1년에 평균 4권 정도밖에 읽지 않는다는 결과이다. 독서야말로 한 사람의 가치관과 정신적 통찰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강한 자아’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등장할 가능성을 몹시 낮춘다고 보아야 한다.


 이전에 나는 〈라디오와 함께 몰락하는 것〉이라는 글에서 라디오와는 달리 시 · 청각적인 경험 모두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비디오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서 하이데거의 ‘가까움’의 경험을 거세시킨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여기서 ‘가까움’이란 “사물에 대하여 숙고 · 생각 · 지각하면서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라던가, 사물의 속성 · 특징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정 혹은 그 행위 자체를 말한다. 자유인의 필수적인 조건, 즉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생각 · 감정 · 도덕 · 신념을 일일이 열거하고 분해하며, 자신 안의 ‘억압’을 밝혀낼 수 있는 이 중요한 능력을 빼앗아가는 오늘날의 정보 문화 속에서 과연 사람들은 ‘강한 자아’를 가진 ‘민주주의자’로 재탄생할 수 있는가? 라디오와 독서가 모두 몰락하고 있는 오늘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김누리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배 계급의 질서 · 사고’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4.


 정치 지형 그리고 선거 제도의 개혁에 대한 어려움에 관해 논의하자면, 어쩔 수 없이 저자가 말하고 있는 86세대의 정치적 특성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해야만 한다.


 저자는 86세대가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우리나라의 정치 민주화를 이끌어낸 주역들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어떠한 비전도 결여한 채,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정작 중요한 우리 사회의 개혁에 집중하기보다는 정치적 게임과 기득권 유지에 열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지적하듯 우리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 계열’의 정당들의 공략이 소위 ‘보수 계열’의 정당의 공략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사실상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 정치의 현대사에서 이들에 의한 ‘도덕성 공격’이 너무 빈번함이 보여주듯 이 정치 세력이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 기득권 유지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86세대가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어떠한 비전도 결여되어 있으며, 기득권 유지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축출 대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급진적인 시각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86세대를 대표하는 ‘민주당계 정당’의 권력이 유지될 수 있는 본질적인 원인은 그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 혹은 묵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떠한 정당 혹은 정권이든 적절한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부패하거나 민의에 반하는 방향으로, 즉 국민을 ‘소외'[3]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개인적인 시각으로는 민주당 계열은 물론이거니와 민주화 이후 정치 권력을 교대로 가져간 양당이 모두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5.


 이를테면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협의 없는 입법 독선, 당대표를 둘러싼 여러 ‘방어적’ 시도의 우려스러운 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다. 22대 국회의 개원 이후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여소야대를 넘어선 압도적인 의석수를 주 근거로 하여, 원을 거의 단독으로 구성함과 동시에 정부 · 여당과의 협의 없이 이전 국회에서의 법안들을 재발의 · 최대한 빠르게 통과시키고자 하고 있고당 대표는 언론에 대해 날선 반응을 보이며관련 의원들은 형사사건에서 피의사실 공개를 금지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동시에 관련 판결에 대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정부 · 여당의 독선적인 형태 때문에 다수의 국민들이 야당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뜻을 받들어’ 정부 · 여당의 잘못된 행정 작용들을 교정하고 견제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행한다는 방향은 틀리지 않았지만, 이 방향이 의회의 본질적인 타협을 무너뜨리고 정치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언론과 사법제도에 대한 공격까지 이어지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지나친 행위이다. ‘지나친 행위’라고 일갈할 수 있는 것은 총선의 압승, 그리고 ‘민의를 받들고 있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부진한 정당 지지율 때문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것이 정말로 다수의 국민들이 원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주권자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대의 기구에 대한 지지율이 부진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갤럽이 6월 18 ~ 20일에 조사한 정당 지지율은 국민의힘 32%, 민주당 28%, 조국혁신당 9%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모두 합쳐도 37%로 국민 다수, 즉 이들 정치 세력에게 압도적인 의석수를 준 주요 주권자들의 의사와는 괴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정부 운영을 책임지는 여당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 집권 세력 역시 우리 사회에 산적한 경제 개혁 · 노동 개혁 · 교육 개혁과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86세대 이상으로 그 어떠한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금 개혁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면서 ‘공론화’라는 편책을 이용하여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4] 결론을 도출한 뒤에 뒤늦게 ‘모수개혁’ 보다는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태도를 뒤집는다던가“공정 · 상식이 원칙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집권한 이후에는 채상병 사망 사고나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하여 정부 출범 당시의 슬로건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적절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총선에서의 패(敗) 이후에는 정작 우리 정치에서 여성 · 청년이 과소대표되고 있다는 주요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 구조에 대한 개혁안이 아닌, 노인 비례대표의 확대라는 근시안적인 정책까지 제시하고 있다한국갤럽의 6월 18~20일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미 정부 지지율은 26%, 국민의힘은 32%으로 조사될 정도로 정부 운영에 있어서 거의 정치적 원동력을 거의 상실한 듯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


 두 양당의 지지율이 모두 부진하다는 점, 그리고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무당층이 23%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각 당의 정치적인 행보가 모두 지지율의 상승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비교적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이다.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 결사체인 정당이, 지지율의 상승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러한 행위들을 왜 계속해 나가는가? 물론 하나의 현상에는 하나의 원인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당의 지지와 의사 결정에서 핵심이 되는 유권자 또는 당원들의 적절한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국민의 각 이해집단들의 견해가 정치 결사체인 정당의 기구들과 제도들을 통하여 당론으로 올바르게 선정될 수 있다면, 굳이 의회 바깥의 시위까지 가지 않더라도 각 이해집단을 대표하는 정당들의 토론과 교섭으로 의회 안에서 조정과 타협을 통해 주요한 국가 정책이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당론을 선정하는 과정이 각 정당과 관계된 집단이나 개인들에 의하여 적절히 견제된다면 당연히 특정 정치 세력의 견해만이 당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당론 선정 과정에 모든 관련 집단과 개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만약 어떤 정당이든 특정 정치 세력에만 이익을 가져다주고, 그 외의 세력에게는 이익보다는 손해를 미치는 정책을 당론으로 채택한다면 그 정당은 그 세력 이외의 모든 세력에게는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권자와 당원들의 ‘정당에 대한 적절한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인가? 전통적으로는 ‘TK’, ‘호남’ 등의 단어가 가지는 정치적인 의미와 같이 지역에 따른 특정 정당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보수성, 그리고 국민 일반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성이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후자인 무관심성의 경우, 이 정치 세력이든 저 정치 세력이든 모두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 참여를 거부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모습들이 대표적인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선거는 항상 ‘차악을 선택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가 자신을 대표할 대의자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을 넘어 아예 선거에서 교체를 통한 견제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필연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단일계급으로 구성된 수적 다수에 의거한 계급입법을 할 위험’을 그대로 방치하는 무책임한 태도[5]이라는 점에서 경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무관심성이 특히 경계되어야만 하는 이유란 강성 정치 세력에 의한 정당 의사 결정의 좌우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참여’가 항상 긍정적인 것으로 비추어지는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에 아예 완전히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현상의 핵심은 ‘강성 정치 세력’의 견해들이 주로 정당에 반영됨으로써 정당 간 타협의 여지를 축소시킨 끝에 우리나라 정치의 극단화와 극한 대립을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만약 ‘개딸’, ‘대깨윤’과 같은 일부 용어들이 대표하는 강성 정치 세력들만큼 다른 중도 정치 세력이나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한다면, 혹은 최소한 그 정치 세력들에 동조하는 정당이 아닌 제3의 정치 세력을 지지한다면 과연 주요 지지층에 의존하고 있는 양당이 중도층 확장을 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즉 주요 선거에서 정당 혹은 후보들의 당락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모호하게 두지 않고 명확하게 표명한다고 한다면, 과연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콘크리트 지지층만의 지지에 힘입어 정권을 가져올 수 있는 정당이 존재할 수 있을까?


#7.


 우리나라 일반 국민들 · 강성 정치 세력을 제한 그 외의 중도 정치 세력들의 낮은 정치 참여 혹은 무관심으로 인하여 의회 정치에서 정당의 극단화가 일어나면서, 아예 그 어떤 정책마저도, 혹은 주요한 사회 구조의 변화에 대한 합의마저도 사실상 오늘날에는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부분적으로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장시간 이어져온 양당 정치의 역사로 인한 정치적 효능감의 부재 그리고 네거티브 정치 공학으로 인한 부작용, 또는 SNS 등으로 인한 확증 편향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들이 ‘풀뿌리 민주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는, 즉 어느 장이든 어느 때이든 자신의 견해를 당당하게 표출하고 요구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극단적인 대립으로 얼룩진 우리 정치에서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을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선거 제도가 이러한 우리 정치 구조 · 문화가 뿌리부터 유지되는 이상, 당연히 바뀔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한 결론이라고 할 것이다.


 자신의 견해를 환경과 무관하게 제도를 통하여 표출하고 요구하는 사람들, 즉 ‘풀뿌리 민주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는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결국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를 가로막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법은 단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스스로가 바뀌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어느 사회 변혁이든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변혁은 항상 실패하거나 부분적으로는 성공하더라도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사회 변혁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일어나는 것임을 우리는 항상 상기해야 한다.


#8.


 김누리 교수의 안목은 정확하다. 그러나 이는 비단 그가 제시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오늘날 여실히 정치 · 사회 · 경제 전반에 걸쳐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안목이 빛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가 이 책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자’의 부재라는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올바르게 짚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말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과 김누리 교수의 지적은 정확히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남은 질문이란 이제 우리가 스스로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 성찰을 바탕으로 우리가 사회 · 정치 · 경제 · 문화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 한번 재정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다.


#Appendix.


 이 책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자의 부재’라는 핵심 문제를 짚어낸 김누리 교수는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라는 점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지만, 이 책의 내용 구성을 고려할 때 상당히 무성의하거나 무책임한 지식인이라는 비판을 결코 피할 수는 없다.


 물론 이 책이 그가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 ‘대중강의’를 재구성하여 정리한 ‘강의록’의 형태로 출간된 도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는 지식인으로서 그 강의에서 언급한 구체적인 자료 혹은 통계의 출처를 밝혀서 관심 있는 독자들이 찾아볼 수 있도록 할 수 있었고, 동시에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 지우기를 강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물론 저자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자료 제시를 생략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일 수도 있으나, 도서의 가격이 1만 6,000원 정도로 비슷한 도서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는 최소한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비판만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1] 여기서 내가 사용하는 ‘에고이스트’란 세간의 ‘이기주의자’의 의미라기보다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초자아(Superego)’와 ‘리비도(Libido)’ 사이에서 발달하는 ‘자아(Ego)’를 ‘전문적으로 하는, 길러내는 자(-ist)’의 의미로서의 ‘에고이스트’가 되겠다.


[2] 최근 1년 이내에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 중 적어도 1권 이상을 읽은 비율을 ‘종합독서율’이라고 한다.


[3] 여기서 ‘소외’란 저자가 사용한 철학적 용어로서의 ‘소외’, 즉 본래 사람이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낸 존재가 ‘낯설어지더니’ 역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당 · 정권이란 주권자가 자신의 의사를 반영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결사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해이’에 의하여 그 주권자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하고 그 결정으로 인한 피해를 주권자가 볼 수 있기 때문에 ‘소외’라는 철학적 용어가 결부될 수 있다.


[4] 연금 개혁과 관련해서 우리 사회에서 ‘다수결’로 논의하는 것 자체는 일전에 전석재(a.k.a. 슈카월드)가 지적했듯 넌센스이다. 오늘날 연금 제도에 대하여 제기되고 있는 문제는 인구 구조 변화로 인한 ‘지속가능성에 대한 위협’인데, 이 위협의 직접적인 대상자는 나이 제한으로 인하여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과 청소년 세대들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주요 당사자를 제외하고 다수결로 투표하는 경우에는 이미 ‘다수’로 기운 청년층 이상의 이익 관계가 주요하게 대변되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5] Mill, J. S.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rvernment. New York: E. P. Dutton and Company, Inc. 1951 / 손호철, 마르크스주의와 선거, 마르크스주의 연구, 8(4). 2011. pp. 18-19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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