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사촌동생 결혼식엔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요?
결혼은 부부의 세계가 아니다
작년 7월이었다. 남편의 사촌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기꺼이 기쁘게 축하해주고픈 마음이었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의 첫 결혼식이라,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단정하면서도, 민폐하객이 되지 않으면서도, 격식을 차린 티가 나는(!) 적합한 옷을 고르기 위해 한참을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였다. 그리고 결혼식 2주 전 옷이 도착했다. 꽤 마음에 들었다. '이거면 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어머니였다.
"ㅇㅇ이 결혼식날 한복 입도록 준비해놓으렴~”
물론 한복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다. 남편과 한 달 전쯤 그런 대화를 했었다.
남편 - "근데 결혼식 때 너 한복 입나?"
나 - "이 여름에? 덥고 무겁고. 안 입을래"
남편 - "그래."
그렇게 우리 부부는 대화를 일단락했었지만, 시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던 거다.
아, 깜박했다. 결혼은 '부부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시어머니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나도 안 입히려 했는데 주변에서 다 입혀야 한다더라."
"어머님~ 근데 저 한복 입기 싫어요"
"그러게 말이야. 나도 안 입히려는 생각이었는데 주변에서 백이면 백 다 입혀야 한다고 하니 어쩌겠니. 알겠지?"
"네... 알겠어요."
사실 이건 내 입에서 나온 첫 '싫어요'였다. 그동안 불편한 느낌이 있어도 웬만해선 어머니께 싫단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불편함에 대한 의사 전달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셨다.
내 일에 대한 결정권이 내게 없다는 것
이 대화를 곱씹을수록,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은 '입힌다'는 표현이었다.
서른 살 먹고 내가 다시 '입히다'의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시어머니께선 별 뜻 없이 쓰신 표현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내 입장과 위치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기' 수준의 결정권을 가진 것 같은 느낌. 보통 시부모님이 며느리를 부를 때 쓰는 '아가'라는 표현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대체 내가 입을 옷을 왜 내가 선택할 수 없단 말인가. 마음에 거부감과 반항심이 솟구쳤다.
그러고 나니, 결혼식이나 집안 행사에서 왜 여자만 한복을 입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또 그 요구가 왜 '결혼한 여성'에게만 가해지는가 의구심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미혼 여성이 친척 결혼식에 한복 차림으로 참석하는 일은 없지 않은가? 유독 결혼한 여자에게 '전통적인 여성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한복으로써 표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도 한복을 좋아했고, 결혼하며 맞춘 한복이 퍽 맘에 들어서 '뽕을 뽑아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런 생각을 하니 한복을 입는다는 행위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 모멸감까지 느껴졌다.
결국 정장 원피스를 입기로 했다
마음은 힘들지만 괜히 힘을 빼고 싶지 않아 잊고 지내고 있을 때쯤, 다시 시어머니께 전화를 받았다.
"그냥 한복 입지 마. 다른 어른께 여쭤보니 더운데 그냥 입지 말라고 하시더라."
알겠다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사실 마음은 더 힘들었다.
남편과도 이 일에 대해 대화했지만, 내 감정을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그래서, 결국 한복 안 입기로 했으니까 된 거 아니야?"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 말은 도화선이 되어 꾹 눌러 놓았던 내 감정을 폭발시켰고, 남편과는 대판 싸웠다. 나는 감정이 북받치면 울음이 터져 말로 잘 표현하지 못했고, 남편은 내가 울기만 하니 답답해서 보채고, 그러다 내 감정이 더 격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남편은, 잘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그렇게 이날 일은 일단락됐다.
정리하자면, 내게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어떤 옷을 입느냐가 아니었다. 자기 결정권에 대한 문제였다. 내가 입을 옷이 타인에 의해 좌우되어야 하는 처지. 이것이 이 집 안에서 나의 위치를 정의 내려주는 것 같았다.
내가 입을 내 옷도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데, 대체 다른 그 무엇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이날, 조금의 발전이 있었다면 내가 처음으로 '싫어요'라는 의사표현을 한 날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 내가 '며느리'라는 위치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원인이 '자기 결정권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갈 길은 멀겠으나, 느리지만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는 것에 위안을 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