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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나무 Jun 14. 2020

[90년대생 며느리] 김치싸대기, 스파게티싸대기라니

전국시어머니협회가 있다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초반, 남편과의 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내가 시부모님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시키는 일이었다. 나는 시부모님은 좋아하지만, '가부장제'를, '명절 문화'를 싫어한다. 혹자는 '그게 다른 거냐?'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단언할 수 있다. 정말 다르다.



누가 '시어머니'를 악역으로 만드나
'스파게티 싸대기'짤로 유명해졌던 MBC 드라마 이브의 사랑


이 드라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몇 년 전 우연히 보게 된 이 '싸대기 짤'이 준 인상은 꽤나 오래 남아있었다. 알고 보니 '김치 싸대기'로 유명한 PD가 연출한 드라마였다고 한다. 지금 이 장면을 보니 쓴웃음이 나온다. 아무리 그래도 연출을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하는 씁쓸함과 답답함 때문이다.


구글 이미지 검색 화면 캡처(검색어 : 시어머니)

그녀들은 대체로 화가 나 있다. 그녀들은 자기 아들만을 최고로 여겨 남의 딸을 업신여기거나, 돈만 밝히고 인정머리가 없거나, 교양없고 경솔히 행동하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신기한 것은 한 드라마 안에서도 여자의 어머니는 어질고 착한 성향으로, 남자의 어머니는 부정적인 성향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내가 만약 아들을 둔 '시어머니'라면, 아니 만약 '전국시어머니협회'가 있다면 분명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싶었을 것 같다.


나도 방송물을 조금은 먹었기에 안다. 이래야 시청자의 시선을 멈추게 할 수 있고, 화제가 되고, 기사가 나오고, 조회수가 오른고, 광고가 붙는다는 것을. 하지만 연출과 극본을 맡으신 분들께 이 한마디는 하고 싶다.


"제발 적당히들 하세요. 정말"


시부모님, 아니 당시에는 남자 친구 부모님을 처음 만나러 가던 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에게 '컨펌' 받은 단정한 옷에 높은 구두를 신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기차에 올랐다. 시부모님은 먼 길을 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놀랄 만큼 호의적이고 친절하셨고, 유쾌하셨다. 그리고 혹시 내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계속해서 내 표정을 살피셨다. 하지만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첫 만남 당일엔 체했고 집으로 돌아와선 며칠을 아팠다. 사실 지나고 보니, 그럴 필요 없었는데 지나치게 잘 보이려 애쓰고, '밉보이지 않아야 한다' 생각하며 지나치게 곤두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긴장에, 미디어가 그려낸 '무서운 시어머니'상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또, 미디어가 시어머니, 시월드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타인이 모두 다른 성격이듯 이 세상의 시어머니들도 다 각자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왜 드라마에서는 보여주지 않을까? 여전히 혹독한 시월드를 경험하고 있는 여성도 많지만, 분명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편향됐고, 과장됐다. 미혼인 여성들에게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니 처음부터 너무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라고 알려주고 싶다.



시부모님이 좋지만, 명절은 싫은 이유

나는 시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절대 나는 감당치 못할 크기의 희생을 감내하며 살아오셨고 그 희생의 결과물이 내가 사랑하는 그 남자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두 분이 며느리인 나를 배려하려 노력하시고, 실제로 사랑을 주고 계신다는 것도 안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겪고 있는 괴로움은 '고부갈등'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렇지만 두 분이 나를 사랑해주시고, 친절하시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60년대생 시부모님과 90년대생 며느리, 그 30년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살아온 시대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시부모님에게는 제사가 너무나 당연하고, 거기서 여자들은 부엌에서 일하고 남자들은 방안에 있는 구조가 익숙하다. 하지만 나는 성별에 따른 차별은 잘못된 것이라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왔다. 비록 현실에 불평등이 잔존할지라도, 그것은 그른 것이며 바뀌어야할 악습이라고 말이다.


과연 이 간극을 좁힐 수 있을까,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생각의 전환을 하게 한 계기가 있었다. 첫 명절 이후 친정에 가서 엄마에게는 한참 괜찮은 척을 하던 때였다. 최대한 밝은 척했지만 엄마 앞에서 표정을 숨기기란 힘들었다. 결국 시댁에서 낯선 제사 문화를 경험하며 힘들었던 걸 말했다(친정엔 제사가 없다).


엄마 - "네가 이제 막 들어가서 그 가족의 일원이 됐잖아. 당장 뭘 어떻게 바꾸겠니? 그런 것도 시댁 문화니까, 너도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하는 거야."

나 - "엄마.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근데 나는, 다른 건 다 맞출 수 있다? 만약에 '자 우리 집 문화는 추석에 떡국 먹고, 설날에 송편 먹는 거야. 여기에 맞춰!'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맞출 수 있지. 그런데 이건 달라.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문화에 적응하고 맞추라고 하는 건 나한테 너무 힘든 일이야. 치명적이야. 상상만 해도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내가 만약에 딸을 낳는다면 딸에게 그런 걸 대물림해줄까 봐 겁이 나. 만약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이런 문화, 이런 세상을 가르쳐주고 싶지가 않아. 그래서 엄마. 이건 내가 앞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니까, 그냥 응원해줬으면 좋겠어."


엄마는 한참 말이 없다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딸. 엄마 참 바보 같지?
열심히 살긴 했는데 좀 바보 같았던 것 같아.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아, 엄마의 인생.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위해 타지로 혼자 나와, 낮엔 공장에 밤엔 학교에 다녔던 엄마. 타지에서 만난 남자와 스물 셋에 결혼해 남편과 자식에게 모든 걸 맞추며 살아온 엄마. 진부할 정도로 전형적인 '가난한 농가 출신 60년대생 여자'의 삶을 살아온, 사랑하는 나의 엄마. 내가 어떻게 감히, 그대를 바보같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지나온 세월이 미안하고 안타깝다.


이 시스템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엄마도 아빠도 삼촌도 조카도 이모도 힘들다.


엄마와의 대화에서 여실히 느낀 건, 모두가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내 아버지도 가부장제 속에서 막중한 책임을 지고 힘들게 살았다. 시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사회, 문화적 억압 속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그저 열심히 살아온 인생의 군상들. '시월드'는 태초부터 나를 괴롭히기 위해 준비된 단체가 아니라,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서로가 주고받은 억압과 왜곡된 욕망으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새삼스레 말이다.


그래서,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너무 일찍 비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계기만 생긴다면,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절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지레 짐작했던 것은, 미디어 속 '철옹성 같은 시월드'의 이미지가 내게도 은연중에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미 많이 바뀌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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