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남녀가 만나게 된다면
불행하기로 작정한 듯이 불행한 남자와 발버둥 칠수록 불행해지는 여자가 있다. 형사 재곤과 마담 혜경이다. 결핍을 가진 두 남녀가 만난다면, 서로를 갉아먹으며 공멸할까? 아니면 서로에게 기대어 일어날 수 있을까. 항상 저 질문을 쉽게 답할 수 없었던 나는 <무뢰한>을 보고 어느 정도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나처럼 불행한 사람을 만나면, 불행한 적이 있기에 서로의 빈 곳을 보듬어 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불행할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욱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한 자는 경계심으로 점철되어 있어 일말의 감정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단 한 번의 연민 혹은 동정으로도 무너진다. 작은 눈빛으로도 바닥 끝까지 불행해질 수도, 세상 가장 행복해질 수도 있는 사람들. 그 두 사람이 만난다면, 반드시 한쪽은 상처받고 한쪽은 상처 준다. 그러나 <무뢰한>은 서로를 배신하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서로를 사랑해서 불행해지는 이야기다.
영화는 재곤과 혜경이 착 가라앉은 새벽 공기 속을 거닐고 헤집으며 진행된다. 이 습하고 차가운 촉감은 혜경이 숨어 살고 있는 재개발 아파트 단지와 만나며 더 두드러진다. (실제 군산에 있는 재개발 단지에서 촬영했다) 오래되어 싸구려 취급을 받으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재개발되어 허물어지고 대체될 아파트는 혜경의 팔자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는 퇴물 마담에 비도시권에서 운영하는 단란주점은 손님들에게 싸구려 취급을 받는다.
“나 김혜경이야.” 손님에게 외상값을 받으러 간 혜경은 별다른 위협적인 말 없이, 손님 위에 올라타 멱살을 잡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이 말을 반복한다. 이는 자신이 밑바닥 인생에서 마담까지 올라와 살아 남았다는, 독기 가득한 사람이라는 암시를 보여주는 듯하다. 자신의 인생에 자부심이 있다기보다는, 내세울 것이라고는 자신이 세상에 남아 있기에 불릴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 존재감 없는 불행한 인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존재감.
재곤은 이런 혜경을 사랑하나? 사랑의 감정은 아닌 듯하다. 살인자의 애인이기에 범인을 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혜경을 뒤쫓아야 했다. 살인자의 감방 동기로 위장하여 처음부터 거짓으로 혜경에게 다가간 재곤이다. 그렇게 혜경의 단란주점 영업부장이 된 재곤은 혜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기에 적합한 위치가 된다. 그럴수록 살인자를 위해 차리는 밥상을 그대로 버리는 모습, 그와 잠자리 대화, 그녀의 상처와 처지….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녀의 팔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다 보니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한다.
열심히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의 눈은 회의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감정이 호기심으로 바뀐 건 혜경의 뒤를 밟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처음으로 혜경의 허락을 맡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간 날, 혜경으로부터 곁에 둬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 살인자에게 밥을 차려 주던 혜경은 이제 재곤에게 밥을 차려 준다. 요리 하나는 잘 한다고 하면서. 혜경의 상처를 봤던 재곤은 이제 혜경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상처를 말이다. 그러곤 ‘나랑 같이 살래?’라는 무책임하지만 가장 진심에 가까운 말을 혜경에게 던지지만, 순간 상처 없이 깨끗한 눈빛으로 진짜냐고 묻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답해 버린다.
이 장면은 <무뢰한>을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상처를 다 밝힌 지금, 부끄럼 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순간. 이제는 나와 같이 살며 불행으로 향하는 삶을 멈추자고 하는 재곤. 그런 그에게 놀라며 한순간에 무장 해제되는 혜경. 그런 그녀를 다시 불행으로 내치는 그의 대답. 혜경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남자 친구에게 확실한 사랑을 받지 못하며,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마담으로서의 위치도 확실치 않고, 재개발 단지에서 혼자 꿋꿋하게 살아가는 불안정에서 했던 혜경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했다. 서로 불행을 덕지덕지 바른 사람끼리 또 다른 불행을 안겨주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불행한 사람들을 보면 안쓰러운 감정이 든다. 분명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가 이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 거기서 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있을까. 그렇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본인이 그 삶을 구제할 수도 없고, 구제하지 않아도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곤과 혜경도 서로의 삶을 구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비슷한 위치에 있기에. 그래도 환기해 줄 수 있었다. ‘이렇게나 불행하지만, 누군가 나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 있구나.’ 하면서.
<무뢰한>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혜경의 불행한 인생에 약간의 변주를 주며 마무리한다. 약쟁이를 수발하며 이전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그녀에게 자유를 선사해 줬지만, 정작 혜경의 가장 큰 결핍인 외로움의 구멍을 더 크게 만들며 헤어진다. 그렇기에 참 잔인한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