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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Nov 13. 2023

철학의 맛, 요리

정서적 허기로 인한 폭식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거짓된 배고픔에 몸과 마음이 장악되면 무척 조급해지고 단순해진다. 뇌의 일정 기능이 망가진 사람처럼 일차원적인 욕구가 주는 쾌락에 안달이 난다. 먹을 것을 입에 쑤셔 넣는 것만이 태어난 유일한 이유인 마냥 행동한다. 지금, 당장 뭐라도 먹어야 그나마 지구에 나를 붙들어 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 순간 폭식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안식처, 친구, 가족, 애인이 되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정신이 돌아오면 무거운 현실이 여지없이 나를 덮친다. 물을 듬뿍 먹인 두툼한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덮은 것 마냥 숨도 못쉬게 짓눌린다.


또 먹어댔구나.


스스로가 덮은 이불 안에서 축축하게 버둥대다가 간신히 고개만 쏙 내민다. 오, 이러니까 숨 쉴 만한데? 싶다가도 또 먹는다. 개복치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아이구 참, 이불 밖은 위험해!



어쨌든 이랬던 내가 드디어 폭식을 절제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경험의 동물이라고 1) 폭식, 2) 정신 차리고 널브러진 쓰레기를 보며 자괴감, 3) 자책하며 현실 도피 하도 이 루틴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샌가 이후 있어질 일들이 예상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문득 1) 폭식 뒤에 2) 정신 차리고 널브러진 쓰레기를 보며 자괴감을 갖는 루틴이 너무 지겨운 것 아닌가? 우스갯 소리로 한 때 ENPF였던 사람 답게 더이상의 자괴감과 자책은 재미도 없고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에라이 하며 먹다 남은 잔해물을 치우다 갑자기 집 청소에 마음이 동하길래 거기에 응했다.


이불을 정돈하고 바닥을 쓸고 닦고 밀린 설거지를 했다. 꽉 찬 세탁물을 넣고 세탁기를 돌렸고 분리수거를 여러번에 걸쳐 내놓고 내친 김에 화장실 청소까지 했다.


그러자 당연히 2) 자괴감 수순 뒤에 왔어야 할 3) 자책하며 현실 도피가 당황한 듯 보였다. 갈 길 잃은 자책은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는 듯 끝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건드리고 퇴장했다.


멍청아, 진작에 이랬어야지.


그놈의 쓸데 없는 자책이 마지막까지 툭 치고 떠나가자 갑자기 나의 자아가 꿈틀대고 올라왔다.


누군가 나에게 잡초같은 사람이라고 했었던 게 오랜만에 기억났다. 그래, 밟히고 밟혀도 생명력 질기게 자라고 빛나는 사람이 나였다.



이젠 진짜로 내가 나를 사랑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제일 어려운 뜬구름 아닌가?


운동해주고 잘 자주고 취미 가져주고 등등의 당장 와닿지 않는 그런 이상적인 말 말고 뭐 없나 하며 며칠 곰곰히 생각하다가 문득 무릎을 쳤다.


아니, 뭐 이렇게 쉬운 개념이 있나! 사랑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나를 나로 대하지 않으면 되네!


즉 나를 타인 대하듯 대해버리는 거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언제나 나를 따라오니까 내가 너무 편한가보다. (언어 파괴자 같은  문장이네)


하지만 만약 내가 타인이라면? 적어도 예의를 갖추고 막 대하진 못할 것 아닌가. 예를 들어 더 먹기 싫다는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권하며 입에 쑤셔 넣어준다면 그건 진상 아닌가. 아니 진상보다도 더한 상종도 히기 싫은 미를 친놈이지. 그간 나는 나에게 그러고 있던 꼴이었지만.


이게 ‘메타인지’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나를 위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 같은 뭐 그런것과 (정확한 용어를 모르겠다.)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하며 도 닦은 사람 마냥 한 번 더 무릎을 쳤다.


그런데 조금 억울했다. 옛날엔 이걸 굉장히 잘했다고 자부하는데 내 감정을 수용해주자고 마음 먹은 이후부터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다. 두 개의 자아가 꽉 붙어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 곤욕을 치루는 느낌이다.


뭐 어쩌겠나. 나라는 사람에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과정인가보지.


나를 살살 달래주며 만약 아주 소중한 누군가가 우리 집에 초대했을 때 가장 먼저 뭘 해주고 싶냐고 물어봤다.


요리였다.


귀한 손님이 왔는데 편의점 빵이나 대용량 과자, 아무런 소스도 바르지 않은 냉동 베이글 몇개 그리고 생라면을 대접하며 드시라 할 상상하니 진짜 면목이 없었다.


그래, 요리하면 정성이다. 그렇게 정성이 들어간 요리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의 크기이기도 하지 않은가.


당장 유튜브에서 요리 레시피들을 검색해봤다.

그러나 요리의 첫 시작부터가 난관이었다.


‘5분만에 완성하는 **’

‘단 돈 이천원으로 만드는 **’

‘딱 세 가지 재료로 만드는 **’


너무나 쉬워보이는 요리조차 만들 수 없었다. 집에 조미료부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금, 후추, 간장, 식초, 참기름, 굴소스, 참깨, 고추장, 고춧가루, 전분 등등. 생각보다 갖추어야 할 기본 템들이 많았고 의외로 이것들은 비쌌다.


쩝… 시작도 하기 전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가뜩이나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 요리인데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사라지려... 하기 전에 일단 집 밖을 나와 장을 봤다. (번외로, 폭식에서 멀어지는 방법 중 좋은 건 생각한 건 “일단 ... 하자.” 하고 바로 실천하며 움직이는 거였다.)


그나마 취미 중 하나가 ‘장보기’였던게 다행이다. 막상 사는 건 가공품이나 간편식이었지만 어쨌든 큰 마트를 천천히 둘러보면서 이것 저것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향했다.


요리 초보인 내가 제일 먼저 구매한 것은 식초, 간장, 고추장, 설탕이었다. 소금은 언제 받은지도 모를 굵은 소금이 있어서 대충 이걸로 만족했다.


그리고 만들기로 작정한 반찬은,

양파장아찌, 당근라페, 오이무침이었다.


이유는 쉬운 레시피와 좋아하는 재료들이었기 때문이다.특히 양파장아찌는 오래 두고 먹어도 괜찮은 반찬이라 첫번째 픽이었다.


사실 당근라페는 홀그레인머스타드가 들어가기에 초보 요리사가 많이 응용할 수 있는 소스는 아니다. 하지만 카페를 운영할 당시 샌드위치를 해볼까해서 여러 레시피로 연구하던 중 만들어본 당근라페가 내 입에 너무 맛있었다. 만드는게 그리 어렵지도 않고 베이글 샌드위치 속재료로 넣어 먹을 용으로 픽한 반찬이다.


오이무침을 하려고 보니 국내산 고춧가루가 이렇게 비싼 줄 몰랐다. 몇 번을 고민했다. 내가 요리를 계속 할 수 있을 것인가? 고춧가루야 사면 오래 쓴다지만 괜히 자리만 차지하는 것 아닌가 몰라.


끝내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오이무침 레시피를 찾기로 했다.


이렇게 모든 재료와 레시피를 다 모으고 나니 시간이 저녁 9시. 야행성인 내가 무언가 하고싶다는 의지가 점점 불타오르는 시간이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요령이 없는 터라 집에 있는 온갖 식기가 장 안에서 다 나온 것 같다. 저 세 가지를 하는데 끝마친 시간은 11시 30분. 두 시간 반에 세 가지의 반찬을 만든거면 처음 치고 나쁘지 않지 않나? 물론 아직 설거지옥은 남아있지만...


나는 곧 우리 집에 방문하실 귀한 손님을 위해 나름 예쁘게 담아 사진까지 찍었다. 그리고 내일 그 손님에게 어떻게 대접할까, 또 먼 길 오셨으니 어디를 데려가 드릴까 생각하며 설거지를 마무리 했다.


우당탕탕 요리를 마치고 잡다한 냄새에 찌든 듯한 몸을 개운하게 씻고 나오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장보고 요리를 하느라 지쳐서 그런건지 아니면 뭔갈 했다는 이유로 정서적 허기가 달래진건지 신기하게도 입맛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습관처럼 생라면 한 봉지 뜯었을 텐데 귀한 손님을 위해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


그래도 평소처럼 금방 잠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어느새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아주 달콤한 잠을 잤고 개운하게 일찍 눈이 떠졌다.


자,

그럼 오늘은 건강한 밥을 먹어보자.

귀하디 귀한 나와 함께.




그래도 아직까진 손님 대접 나름 잘 하고 있다.


사실 이 철학의 맛 시리즈도 폭식을 예방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안이다. 짐승처럼 먹어대던 중, 인간으로써 누려야 할 맛의 미학과 음식의 이유를 잊지 말고자 쓰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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