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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Nov 08. 2023

철학의 맛, 사과

내가 세 살 정도 되었을 무렵 친오빠가 본인이 슈퍼맨이라며 2층에서 뛰어내렸다. 두르고 있던 빨간망토는 초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곤두박질 쳐서 오빠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몇 주간 중환자실에 있다가 간신히 일반병실로 옮겨졌지만 의식은 차리지 못했다. 어린 나를 혼자 둘 수 없던 엄마는 나를 데리고 면회를 갔는데 그 순간 오빠가 기적처럼 눈을 뜨며 머리맡에 있는 사과를 내게 건넸다. 사과는 오빠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엄마는 놀라서 의사를 부르러 갔고 나는 오빠 옆에서 사과를 쭉쭉 빨아댔다.


...고 한다.


안타깝게도 내겐 기억이 전혀 없으므로 엄마에게 전해들은 남매의 우애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든 내가 어릴 때부터 사과를 무척이나 좋아한 건 맞다.


아삭한 식감, 달콤한 맛, 적당한 과즙, 쫄깃한 껍질, 영롱한 색감까지. 사과는 정말 매력적인 과일이다. 특히 풋사과는 그만의 싱그러움이 있어서 여름을 담고 있다. 푸릇 푸릇한 표면을 한 입 베어물면 입에서 시원한 청량함이 뛰어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풋사과 뿐이랴 홍로는 또 어떤가. 생긴것부터가 윤기가 좔좔 흐르니 고 놈 보기만 해도 참 예쁘다.


내가 사과를 좋아하는 만큼 오빠는 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어릴 적 나는 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꺼끌꺼끌한 표면, 물렁한 식감, 너무 많은 과즙, 가볍게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크기 등이 정이 안 가게 만들었다. 반대로 이러한 것들이 오빠가 배를 좋아하는 연유이기도 했고 또 사과를 즐기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도 우리는 이렇게나 취향이 달랐다. 오빠는 고기파였고 나는 야채파였다. 오빠는 요리를 좋아했고 나는 설거지를 좋아했다. 덕분에 밥상 머리에서 싸울일이 없었지만 중요한 건 삶을 꾸리는 가치관까지도 너무나 달랐다. 그 누구보다도 k장남이었던 오빠가 지극히 현실주의에 원칙주의자였다면 나는 자유를 추구하며 이상주의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때론 너무나 증오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는 게, 오빠한테 연락도 없고 서운하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시간을 보아하니 오후 9시가 넘은 시각. 평소 전화 한 통 없던 오빠한테서 며칠 전부터 부재중 전화가 찍혔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다시 전화를 걸지 못했는데 의외로 오빠한테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가 친한 남매였나? 싶은 마음이 들어 어색함에 낯을 가렸다. 혀가 꼬부라진 오빠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른 남매들처럼 너랑 장난도 치고 싶고 안부도 묻고 싶은데 아니, 너는 날 오빠라고는 생각하냐?’ 이거였다. 만약 오빠가 맨정신에 전화했더라면 나는 아마 울었을거다. 눈물의 의미는 모르겠다.


‘나는 학창시절에 오빠한테 맞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것 같다.‘ 라고 말했다.


돌아온 답변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느냐.’ 였다. 이어서 ‘네가 맞을 만한 짓을 했겠지’ 였다.


후자의 말은 장난기 섞인 말이었다. 분위기를 풀고자 건넨 말인게 분명했다. 오빠는 말하면서 화가 차오르는 스타일이었다. 핸드폰 너머 오빠의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감정을 들으며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을 솎아 냈다. 그래, 그의 본심은 화가 아니리라. 다만 어색하게 건넨 농담이 날카로운 살이 되어 상대방과 스스로를 찔러대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 뿐이었다.


그 뒤로도 오빠는 간혹 술에 취하면 나한테 전화를 걸곤 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건지, 대체 누구한테 영향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20대 때의 나에게는 달갑지 않은 전화였다.


"맨정신 때 전화할 거 아니면 하지 마."


내가 쐐기를 박자 이후 오빠의 연락이 뜸했다.


나는 가끔 오빠와 나의 핏줄이 갈변된 사과같다는 생각을 한다. 공기에 노출된 버얼건 사과는 얼룩덜룩하고 쪼글 쪼글하다. 맥 없이 변해버린 사과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씁쓸해진다. 시간이 지났으니 변하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미안하다.'


언젠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빠는 나에게 사과했고 나도 오빠에게 사과했다. 우리 둘 다 얽매어 있던 어린아이로부터 한 발 나아온 뒤였다. 갈변된 사과마냥 물렁 푸석했고 뭔가 떨떠름한 맛이었다.


그래도 분명한 사과였다.




요즘 나는 배를 즐겨먹는다. 나이 들면 입맛이 바뀐다더니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게 길들여졌는지 배 껍질이 그렇게도 맛있다. 원래도 껍질을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배 껍질은 독특한 별미였다. 잘 세척한 배를 씹어 먹으면 까끌 까끌한 그 표면의 식감이 참 재미있다. 배에서 흘러나온 단 물이 껍질의 쌉쌀함과 잘 어우러지는게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왜 그간 배라면 질색 팔색을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정말 모르겠다.


어느날 보니 오빠도 사과를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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