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과 와인. 그리고 세바스챤

남녀불문, 척하지 않는게 더 매력 있어요.

by 겨울해



다른 매장에서 근무했었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 곳은 홍대에 위치한 카페와 펍을 같이 운영하던 매장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낮에는 카페였다가 저녁 즈음에는 와인과 양주를 다루던 곳이었는데 인테리어가 꽤나 분위기 있다며 커플들이 많이 왔다.


그날도 많은 커플들이 가게에 찾아왔고 그중 한껏 꾸민 원피스, 한껏 차려입은 정장의 커플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소개팅 자리였다. 둘은 서로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지금 이 세상에는 우리 둘 밖에 없죠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보며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이미 식사를 끝내고 이 곳에서 2차 데이트를 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와인 좋아하세요?"


나에게서 메뉴판을 건네받은 남자는 광대가 한껏 올라간 잇몸 미소로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좋아하는데 잘은 몰라요 하며 여자가 수줍게 웃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음... 하며 신중하게 손가락으로 메뉴들을 짚는 그는 와인 이름 옆에 적혀 있는 설명을 재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이걸로 주세요."


하필이면 그가 열심히 찾아낸 와인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는지 "오... 저는 늘 그것만 마셔서요. 그럼 추천 좀 해주시죠?" 하며 나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나는 그들이 적당히 음미할 수 있을만한 와인을 성심성의껏 추천했지만 그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거 말고 이걸로 할게요."


그가 선택한 것은 1865 화이트 와인. (그의 있어 보이는 발음을 다시금 떠올리고 싶진 않아 정확한 이름을 얘기하진 않겠다.) 마치 집사 세바스챤을 부르듯이 나를 보며 위아래로 고개를 까닥거리는 그의 모습을 나는 최대한 지켜주려 노력했다. 소개팅이니까.



지극히 개인적으로 와인과 커피에서 느껴지는 텁텁한(?) 맛을 좋아한다.




그들이 주문한 음식을 주방에 전달하고 잔과 함께 와인을 가져가 다시금 시키신 와인이 맞는지 확인해드렸다. 그러자 남자는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갖다 대며 와인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술 잘하세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아요 하며 여자가 또다시 수줍게 웃었다.


"와인은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금방 취하거든요. 하하."


그 뒤로도 그는 시키신 와인이 맞는지 물어보는 내 질문에 답은 않고 여자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래, 지금 이 세상엔 니들밖에 없구나 하는 마음으로 대기하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에서 오프너를 잠깐 갖다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나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말한 뒤 (물론 그들은 전혀 듣질 않았다.) 혹시 몰라 넉넉히 오프너를 두어 개 챙겨 옆 테이블에 가져다주고 다시 소개팅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제야 그들은 내 존재를 인지했고 나는 그들 세상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거 이리 주세요."


아뿔싸, 남자가 내 손에 달린 오프너를 발견했다. 손님 이거는... 하면서 설명을 드리려 했는데 그는 그래그래 알았어, 다 알고 있어 세바스챤 하는 느낌으로 손바닥을 내게 보여주더니 오프너를 가져갔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말했다.


"와인 오픈할 때가 전 제일 좋아요. 코르크 마개를 수집해볼까, 생각도 했다니까요."


그리고 그는 잠시 와인을 이리저리 만지작 거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이봐, 세바스챤.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저 힘내세요 주인님 하듯 미소를 띠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입구 여기저기에 스크류를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야속하게도 그 작고 단단한 것은 자꾸 미끄러졌다. 여자는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다칠까 봐 걱정되는데 그냥 우리 부탁하죠. 하며 여자가 매너 있게 달랬지만 남자는 끝까지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가 쓰는 오프너는 이게 아닌데 그래서 그런가... 손에 안 익네요. 하하."


세바스챤! 뭐해. 그런가 봐요, 주인님 하며 얼른 내 말에 동의해하고 외치는 그의 눈빛을 무시한 채 나는 그에게서 와인을 가져와 린넨으로 한 번 쓰윽 그의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린넨으로 와인의 입구를 잡고 소주병 따듯 돌려서 캡을 열었다. 이 와인은 그냥 돌려 따는 와인이었다. 손으로.




배배~ 꼬였네.





잠시 뒤, 그들의 테이블에서 다시 웃음꽃이 피는 걸 보니 여자는 남자의 허세를 귀엽게 받아들이고 넘어가기로 했나 보다. 따르는 건 됐으니 넌 이제 가봐하고 세바스챤을 황급히 내쫓은 남자의 얼굴에 다시 자신감이 뭉개 뭉개 피어올랐다.


그들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는 종소리가 울리자 나는 그래도 그들의 소개팅이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주방 실장님에게 파슬리라도 많이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따끈한 파스타와 샐러드를 가지고 다시금 조심스레 그들만의 세상에 발을 디뎠다.


"저기요. 저희는 왜 잔이 작아요?"


아까와는 달리 단번에 나의 존재를 눈치챈 주인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불렀다. 다른 테이블보다 그들의 잔이 작다는 이유로 아직도 와인을 따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그녀에게 남부럽지 않은 것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 아닌가. 여자 쪽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엔 그녀가 직접 나를 희생양으로 택한 것 같았다. 남자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그녀는 온 정성을 다해 나를 힘껏 째려보았다. 네, 손님. 이 와인에는 이 잔이 나갑니다. 내가 침착하게 설명을 드리자 남자 주인님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래요? 그럼 오신 김에 와인 좀 따라 주세요.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나에게 공을 넘겼다. 나는 서비스 마인드를 잊지 않으며 그들의 잔에 와인을 따라드렸다.


"아니, 왜 색깔이 이래요?"


자기는 레드와인을 시켰는데 왜 색깔이 투명하냐는 그에게, 제발 그놈의 입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이 소개팅 반이라도 갈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하고 휘갈겨 쓴 쪽지라도 던지고 싶었다. 여자가 이제 그만하자는 말투로 맛있어 보이는데 그냥 마시죠 라며 잔을 들었다. 그때 눈치껏 빨리 그 테이블을 떠났어야 하는데 바보 세바스챤은 주인님이 첫 모금을 드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어으 시큼해."


주인님은 레드(red) 와인의 드라이(dry)함을 좋아하는데 이건 도저히 못 먹겠다며 세바스챤을 쳐다봤다. 세바스챤은 아이고 하며 짧은 탄식과 함께 손님이 선택하신 와인은 이게 맞으신데... 하며 여자 쪽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남자를 향해 다음엔 그냥 소주를 마시죠. 저 소주 좋아해요 했다.


다음이라니. 어지간히도 남자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어쨌든 주인님의 소개팅은 그래도 성공적이라는 것을 확인한 세바스챤은 맛있게 드십시오 하고 자리를 떠났다.





여자와 남자는 들어올 때처럼 이 세상엔 우리밖에 없지 자기야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보며 기분 좋게 나갔다. 아이쿠, 본의 아니게 또 한 쌍의 커플이 탄생하는 기적적인 순간을 목격했잖아.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그들이 남긴 핑크빛 잔해들을 치우러 향했다. 시큼해서 도저히 못 마시겠다던 화이트 와인은 텅텅 비어있었다. 빈 병을 뒤집어 보니 한 방울도 안 나왔다. 나는 앞으로 소개팅 자리의 세바스챤이 되지 말고 차라리 도베르만이 되어 볼까 하고 중얼거렸다. 도베르만이라면 허세 가득한 주인님 소리에 같이 멍멍하고 짖어줄 수 있지 않을까? 목줄을 잘 다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주인님의 역량이겠지만.


세바스챤도 dry한 와인을 좋아해요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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