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적당한 카페인 수혈과 당충전은 필요합니다.
작은 거인이 쿠키를 오븐에 굽는 날은 카페 안이 한동안 달달한 냄새로 요란했다. 갓 내린 원두의 고소한 향과 달콤한 쿠키의 냄새는 정말 찰떡 궁합이었다. 그런 날엔 손님들이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카운터 안을 한 번씩 더 훑고 지나가기도 하고 음료만 주문하다가 우리, 쿠키 하나 먹을래? 하기도 했다.
초콜렛 쿠키, 다크 초콜렛 쿠키, 오트밀 쿠키, 마카다미아 쿠키가 있었는데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건 초콜렛 쿠키였다. 오븐에서 갓 나온 초콜렛 쿠키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오븐 열기에 의해 적당히 녹은 초콜렛은 윤기가 좌르르 돌며 입맛을 당겼고 적절한 흙갈색의 도톰한 쿠키의 몸통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알바생들은 쿠키를 굽는 일만큼은 자진해서 하고 싶어 했는데 목적은 하나였다. 굽다가 부서진 쿠키는 손님에게 제공할 수가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이! 알바생들이 해치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손님에게 예쁜 쿠키를 제공해야할 의무가 있는 서비스직이자 판매직이지 않는가. 하지만 작은 거인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표면상의 이유는 뜨거운 오븐에 알바생들이 다칠까봐였지만 글쎄,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녀만의 특권이 되어버린 쿠키 굽기. 굽는 것 자체는 사실 어렵지 않았다. 본사에서 생지가 배달이 왔기 때문에 오븐 판에 종이 호일을 깔고 생지를 잘 배열 시켜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오븐에 넣은 뒤 알맞은 시간이 지나면 두툼한 장갑을 끼고 판을 꺼낸 후, 조금 식혀준다. 그 후 익은 반죽을 살살 떼어내어 포장지 안에 넣고 바구니에 진열하면 상품성을 갖춘 쿠키가 완성됐다. 그나마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 하면 쿠키를 종이 호일에서 살살 긁으며 떼어내는 일이었다. 넓게 퍼진 반죽이 너무 뜨거울 때 긁어내면 모양이 흐트러졌고 너무 식은 다음에 떼어내면 쉽게 툭하고 부러져버렸다. 나는 작은 거인이 쿠키를 긁을 때 그녀가 집중하지 못하도록 말을 제일 많이 걸었다. 부러트려라 부러트려라 하면서 속으로 주문을 외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인은 그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도 쿠키를 뜯어내며 나보다 더 말을 많이 했다.
그날따라 너무 힘이 들었다. 과제와 시험과 연습과 과제와 시험과 연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인간관계와 헛헛하게 밀려오는 공허함. 카페인 수혈이 너무 필요해진 나에게 카페 아르바이트는 천국이었다. 매장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일한 곳은 음료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고 젊은 피였던 나는 그 날 하루에 커피를 8잔 마시는 개인 신기록을 세웠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기본 투 샷이 들어가니 16샷을 내 혈관 속에 때려 부은거다. (지금은 그때처럼 마셨다간 바로 몸에 무리가 갈 거다. 이제 절대 그런 짓은 안한다.)
그 쯤 되니 슬슬 속이 쓰리며 입이 텁텁했다. 아, 이제는 카페인 수혈이 아니라 당 충전이 필요하구나를 깨달았다. 혀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쌉쌀함을 달콤함으로 중화시켜 주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방세를 빼고나니 300원. 쿠키 하나 값도 안 됐다. 그리고 내 눈 앞에는 작은 거인이 열을 식히기 위해서 올려둔 쿠키를 구운 오븐 판이 있었다. 하늘이 준 기회일까. 작은 거인은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웠고 카운터에는 나 혼자 뿐이었고 홀에는 손님도 없었다. 심한 내적 갈등이 올라왔다. 먹을까 말까, 먹을까 말까, 차라리 부러트릴까, 말까. 아니면 한쪽 귀퉁이만 잘라서 먹고 완전범죄를 꿈꾸는 건 어때?
그 시기 즈음 작은 거인이 새로운 점장님과의 갈등으로 예민의 예민을 달리던 때여서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잔소리와 함께 신세타령을 한 바가지로 먹어야 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래도 어쪄랴. 지금의 내 몸이 저 초콜렛 쿠키에 들어있는 당을 원하는 걸. 나는 마약을 눈 앞에 둔 중독자처럼 흐르는 침을 꼴닥 꼴닥 삼키며 집히는 대로 아무 빵칼이나 잡고 쿠키 가장자리를 살살 긁어냈다. 카페인 과다 섭취에 당이 현저히 떨어진, 게다가 저혈압을 가진 20대 여자의 손은 야속하게도 바들바들 떨렸다. 아, 제발 빨리 빨리. 작은 거인이 화장실에서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그래서 어느정도 먹을건데, 다 먹을거야? 아니면 가장자리? 얼른 선택해!
"뭐해?"
누가 명치를 어퍼컷으로 때린 것 마냥 놀란 나는 펄쩍 뛰었다. 어... 아니... 언니 힘들어보여서 내가 대신 해줄라고 그랬는데 하하.. 아, 근데 이 칼이 아닌가.. 아 별로 안 건들였어요! 작은 거인은 횡설수설 하는 나를 지나쳐 말없이 반죽칼을 들더니 쿠키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에 머쓱해진 나는 텁텁한 혀만 다시며 마시던 커피잔을 들었다.
툭-.
"에이, 이거 망했네. 자."
작은 거인의 손에 쪼개진 쿠키가 보였다. 누가봐도 일부러 반절을 부러뜨린 모양새였다. 나는 동그란 토끼 눈을 하고는 입을 벌렸다.
"왜, 이거 말고 다른 맛 먹고 싶어?"
작은 거인은 무심하게 반죽칼로 마카다미아 쿠키의 정 가운데를 내리꽂았다. 마장동에 있는 정육점 주인이 돼지 고기에 칼을 쑤셔 박는 듯한, 꽤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멋있었다.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쿠키를 와득 씹어먹는 그녀에게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아아, 그녀 역시 당이 필요했던 거다. 그럴만하다. 그녀 역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쿠키를 돈 주고 사먹자니 점장님 매출 올려주기는 싫고, 일 끝나고 집에서 다른 걸 먹자니 희한하게 이 맛이 안 나고.
내게 쿠키를 건네는 그녀의 눈은 다크서클로 인해 퀭했지만 눈빛 속에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나는 초콜렛 쿠키를 받아서 한 입 깨물었다. 역시... 오븐에서 갓 나온 쿠키는 진리였다. 적당히 남아 있는 온기 뒤에 숨겨진 강렬한 달콤함, 부드러운 반죽과 바삭한 가장자리... 쿠키와 함께 나의 피곤도 사르르 녹아 흐르는 기분이었다. 습관적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려고 하자 작은 거인이 팔뚝을 툭 쳤다.
"적당히 마셔."
술자리 흑기사한테서나 들을 법한 멘트를 던진 작은 거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멀쩡하게 구워진 다른 맛의 쿠키를 거침없이 잘랐다. 나는 언니 이거 한 판 다 먹을거에요? 하면서 놀라는 척 했지만 속으로 그녀의 칼질을 열렬히 응원했다. 아쉽게도 작은 거인의 칼질은 거기까지였지만 그래도 달달함에 적셔지기엔 아주 충분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들때가 참 많다. 우리의 당을 저 깊숙이 떨어지게 만드는 상황과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떨어졌다면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갈 에너지가 생긴다. (물론 아메리카노 8잔 같이 과하게는 말고, 적절한 양의 카페인과 당으로 말이다.)
만약 스스로 채우고 또 채워보다가 도저히 안될 때는 함께 쿠키를 먹어 줄 사람을 찾아보면 어떨까? 구태여 많은 말이 오고가지 않아도 작은 거인처럼 부러진 쿠키라도 만들어서 당신에게 선뜻 건네줄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다. 당신이 힘들듯 그 사람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수도 있다. 서로의 처지를 동병상련 할 필요 없이 그저, 먼저 발견한 사람이 쿠키를 쪼개서 건네주면 된다. 따뜻한 쿠키가 서로 오고가면서 분명 채워지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뭐든 나누어 먹으면 더 맛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