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핑추추추추추추추가

휘리릭 휘리릭 얼마나 맛나게요

by 겨울해



생크림, 휘핑크림, 버터크림 같은 크림에서 느껴지는 묵직함과 헛헛함이 있는데 그게 참 매력적이다. 달콤한 크림을 입 안 가득 넣고 묵직한 크림 바다 위에 몸을 맡기고 넘실 넘실 표류하고 있다 보면 갖고 있던 걱정들이 사르르 녹는다. 크림의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한참을 헤엄치다 보면 어느새 파도는 녹아 사라져 버린다. 얼른 다시 파도를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나만의 망망대해로 유유히 떠난다. 그렇게 반복해서 여행을 다녀와보면 어느새 크림이 동이 나있다. 그러면 밀려오는 헛헛함을 메꾸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들이키면 아주 개운해진다. 이렇게 작은 행복으로 인해 그날의 스트레스는 말끔하게 해소된다.






이러한 나의 크림 사랑은 카페 일을 할 때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휘핑이 올라가는 음료나 허니브레드, 브라우니 등을 만들 때 그랬다. 손님이 크림의 양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휘핑을 넉넉하게 드렸다. (물론, 그전에 휘핑을 원하시는지 아닌지를 물어본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풍성하게 올라간 휘핑크림은 구름같이 몽실몽실해서 보기만 해도 참 기분 좋아졌다. 어머, 크림 예쁘다 하고 손님이 감탄을 할 땐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휘핑을 올리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얼음이 들어간 음료나 갈아 만든 음료는 그나마 괜찮은데 따뜻한 음료에서는 은근한 힘 조절과 섬세한 돌리기 기술이 필요하다. 컵 안쪽 벽을 제대로 타고 돌리지 못하면 넋 나간 뱀 한 마리의 또아리나 도마뱀의 잘린 꼬리 같은 희한한 모양이 되어버렸다.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나는 휘핑을 올릴 때, 진지하게 프로 의식을 발휘했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완성하듯 심혈을 기울여 휘핑을 정갈하고 예쁘게 탄생시켰다.



초코휘핑.jpg 크림을 조금만 더 올렸다면 완벽했을 텐데...





제가 크림을 좋아해서 그런데... 휘핑을 많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느 앳된 손님의 주문이었다. 나는 동지를 만난 것처럼 아유, 그럼요 하고 진동벨을 건네드렸다. 앳된 손님이 주문한 블렌딩 음료를 만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휘핑기를 흔들었다. 심지어 휘핑을 올리기 아주 적합한 음료야, 뭘 좀 아시는군 하면서 힘차게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 다섯 바퀴...

꽤 많은 바퀴를 돌리고 난 후에야 내 예술혼은 멈췄다. 마무리로 초코칩을 살살 올려준 다음 뚜껑을 닫으면 완성... 할 수 없었다.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다.


혹시 가져가시는 거라면 휘핑을 조금 덜어드리고 뚜껑을 덮어드릴까요? 하고 묻는 내 말에 진동벨을 들고 온 앳된 손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와, 아녜요. 먹고 갈 거예요! 와 진짜 감사합니다.


손님의 만족스러운 반응에 나는 엄마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손님이 다시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조금만 더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속으로 짐짓 놀랐다. 나보다 더한 사람인 걸? 하는 생각에 감탄이 나오면서도 서비스 너무 많이 줬다고 사장님이 알면 뭐라 하겠는걸? 하는 현실적인 고민에 잠시 멈칫하고 있었는데 앳된 손님이 멋쩍은 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이것도 많이 주신 건데 제가 죄송해요.


주세요 주세요! 나는 황급히 음료를 다시 받아 들었다. 이렇게 착하게 말하는 손님이면 뭐라도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지. 음료를 드린 후에, '다음번엔 이만큼 드리는 게 어려울 수 있다.'고만 고지해주면 손님도 오늘만이구나 하고 인지하시겠지. 나는 묵직하게 올려진 크림 탑 앞에서 비장하게 휘핑기를 흔들었다. 각도와 돌리는 크기를 잘 계산하지 않으면 이 공든 탑은 와르르 무너질 터. 크림에 진심인 손님의 기대감을 망가뜨리고 싶진 않았다. 침을 꼴깍 삼키며 휘핑기의 방아쇠를 당기자 푸슈슉- 소리와 함께 크림의 정수리가 포옹하고 탄생하려 했다. 그때,


혹시 뚜껑에다 해주시면... 어떨까요?


내가 어머, 좋은 생각이네요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앳된 손님이 헤헤하며 웃었다. 나는 뚜껑 위에 안전하게 휘핑을 짜면서 물었다. 저도 크림을 좋아하는데, 손님도 크림을 진짜 좋아하시나 봐요?


아... 오늘은 달달한 걸 막 퍼 먹고 싶은 날이라... 스트레스받아가지고...


그러고 보니 손님이 주문한 음료도 초코칩을 넣고 갈아 만든 음료였다. 단거 위에 단거라. 아주 좋은 선택이다. 와, 많이 힘드셨나 봐요 하는 나의 말에 앳된 손님이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맞아요.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완성된 휘핑 탑과 수저를 함께 건네자 손님은 앳된 표정으로 까르르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자리 잡은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두꺼운 책, 그리고 자기 몸보다도 크고 무거운 가방이 놓여 있었다. 앳된 손님은 핸드폰으로 음료 사진을 잠시 찍는가 싶더니 곧이어 휘핑을 수저에 가득 떠서 한입 베어 물었다. 양 주먹을 꽉 쥐며 눈을 질끈 감은 손님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잠시나마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크림의 파도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그의 휴식이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설거지를 잠시 미루기로 했다.



크림바다.jpg 크림 바다 위에서 스트레스는 잠시 내려놓고 마음껏 뛰어놀길



모두가 살면서 수많은 스트레스와 마주하는데 때로는 그게 허용범위를 훌쩍 넘을 때가 있다. 받아야 할 양보다도 더 많이 받아버린 그 끔찍한 걸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풀며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아무쪼록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추추추추추추가한 크림만큼 당분간은 스트레스 따위 없는 환상적인 날들이 펼쳐지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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