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 오는 날, 통유리로 되어있는 카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의 온기를 손에 감싸고 창가에 앉으면 감성에 젖기 딱 좋은 환경이 마련된다. 토 도도 독 하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몽글몽글 동그라진다. 물기 어린 거리의 풍경도, 작은 웅덩이를 폴짝 건너는 누군가의 몸짓도, 예상치 못한 빗방울에 웃는지, 비명을 지르는지 모르겠는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한 편의 영화 같다.
그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그들에게 젖어들어가 어느새 배우가 되어있다. 오늘 내가 연기할 영화의 장르는 판타지 서스펜스 멜로드라마다. 주인공이 된 내 앞에 환상적인 스토리가 펼쳐진다.
어느 날, 비에 섞인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엔 나 혼자 남았고 나마저 내리는 이 비를 맞으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끝난다. 치열한 생존기를 거친 나는 우연히 들어온 카페에 앉아, 우수에 젖어 옛 과거를 추억한다. 모두가 웃고 울며 살아가던 그 아름다운 시대, 자본주의와 회색 논리 속에서 헤매면서도 끝내는 서로를 사랑하던 사람들. 최고의 과학과 의학으로 역사상 고도로 발전한 문화였지만, 결국 인류는 자연 앞에선 무력했다. 어느 날, 노아의 방주 때처럼 쏟아지던 이 비에 잠식당한 사람들. 인간의 몸의 70%가 물인 것을 증명하듯 비에 닿자 우리네 존재는 아스라 졌고 그곳엔 축축한 진흙만이 남아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지만 인간은 눈물, 콧물 섞인 한 줌 질퍽질퍽한 진흙을 남겼다. 내 다섯 손가락을 주물럭거려보았다. 아직 뼈가 있고 말랑말랑힌다. 아직 나는 살아 있다. 아니지, 나만 살아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나는 어떻게 될까?
그때, 유리창 너머로 커다란 형체가 아른거린다. 나는 창가에 얼굴을 바짝 붙였지만 창문에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치며 시야를 가린다. 폴짝거리며 맞은편 상가 입구로 들어간 형체가 어렴풋이 보인다. 곰인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떠서 빗 속을 뚫고 겨우 형체를 구분한다.
사람이다! 그것도 사지 멀쩡한 성인 남자!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지대한 사명을 가지고 고민에 빠진다. 인류종말의 날, 세상에 남은 사람은 나와 저 사람뿐. 나는 이곳을 뛰쳐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게 내 존재를 알려야 하는가. 아니면 안전하다못해 아늑하다고까지 여겨지는 이곳에서 홀로 생을 마감할 것인가. 선택은 나의 몫이다. 둘이 될 만남이냐, 혼자가 될 이별이냐.
여기까지 왔을 무렵, 건너편 그가 기다리고 있던 진짜 현실의 여자 친구가 오면서 비 오는 날 카페에서 시작된 내 공상은 멈췄다. 영화 속 주인공이었던 나는 순식간에 그들의 사랑을 유리창 스크린을 통해 관극 하던 관객으로 전락해버렸다.
맞다. 현실에서 나는 판타지 서스펜스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행인 1이었다. 그도 아니면 제4의 벽 너머의 관객일 수도 있다는 것을 비 오는 날의 내 이별을 통해 깨달았다. 우리 두 사람으로 시작한 아름다운 영화였고, 둘이 함께라면 그 어떤 장애물도 세기말 위험도 헤쳐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주인공 중 한 명이 막이 내리기도 전에 다른 영화 준비를 시작해버렸다. 토 도독 토하고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나는 잠시나마 내 이별에서 도피하게 해 주었던 유리창 너머의 이름 모를 연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현실로 돌아온 내 앞에는 식어빠진 커피잔 한 잔이 더 놓여있었고, 방금 전까지 내 연인이었던 그가 떠난 자리도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 현실 속 멜로 영화는 비오는 날 카페에서 강제종료 되었지만 공상 속 '나'는 과연, 그를 만나러 갔을까.
나는 고개를 숙였다. 커피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