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기록] 3. 변화

by 겨울해

용기, 자신감, 독려, 위로 등의 정신적 자원을 지지해줄 수 없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꽤나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통찰력있어 보이고 강해보이는 그 포장지는 내 불안한 감정들을 감추기에 참 용이했다.


하지만 포장지는 벗기라고 있는 법. 자의든 타의든 그 포장지가 벗겨지고 난 뒤 드러난 내 맨 살은 역시나, 볼품없었다. 변해가는 주변 환경에서 나만 덩그러니 놓인 채 '어, 아닌데.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하면서 과거의 포장지에 집착하다가 몇 번 데이고 정신 못 차리길 반복하다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거라는 옛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이긴 하지만 나는 오늘보다 내일 더 변하려고 부던히도 노력해본다. 이제는 유연해진 알맹이로 스스로가 능숙하게 포장지를 다루었으면 좋겠을 뿐더러 나도 다치지 않고 남들에게도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뭐하냐."


핸드폰 너머로 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감추어둔 본론을 꺼내기 전 아버지의 호흡은 늘 들뜨거나 가라앉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지금은 가라앉은 편이었다.


"너 카페 한다는 거 생각해보니까... 가족이라고 있는데 응원은 못해 줄 망정 너무 현실적인 얘기만 한 것 같아서."


현실적인 이야기라... 나에게 있어 현실적인 이야기는 실질적으로 메뉴 구성을 어떻게 하고 가격 책정은 어느정도로 할 것이며, 세금을 어떤식으로 처리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거였는데 그간 아버지께서 주신 현실적인 이야기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소위 실패했다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끝없는 우울감과 고통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신 뒤 '물론, 그러지 않은 경우도 있지. 하지만 성공한 케이스는 드물기 때문에 네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돼서 이런 말을 하는거야. 현실을 알려주는 거야.' 라는 말로 그 날카로운 칼날을 정성껏 감싸셨다. 그 모든 말이 나를 위한 사랑이라는 번드르르한 포장지로 꾸며졌기 때문에 버릴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그저 일방적인 선물을 주시는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잠자코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미안하다. 이왕 너 하기로 한 거 힘을 실어 줬어야 하는건데."


핸드폰 너머로 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사과에 나는 잠시 할말을 잃고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늘 투쟁하는 사람이었다. 외동으로 태어나 홀어머니를 모시며 세상과 가난과 그리고 사람과 싸우며 살아오셨다. 긴 세월동안 지독하게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사람이었기에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가족과도 당연히 불통이었다. 매끄럽지 않은 소통 아래에서 몇십년을 함께한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를 위한 진실된 마음을 꽁꽁 감추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우리 가족이 핏줄이라는 포장지를 벗기고 나면 개개인의 다른 인격체일 뿐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각자의 인생이었기에 어느 선 이상은 내가 침범할 수도 없고 그리하여 내 인생도 두 분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했다.








아버지의 사과를 들으며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바로 가늠이 안갔다. 분노? 억울함? 감동? 의아함? 놀라움? 당연함? 모르겠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려다가 싱겁게 끝났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아버지는 한숨을 쉬더니 아까보다도 더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빠가 했던 말은..."


안 그러시려고 노력하셨지만 아버지의 길어지는 말 속에는 또 다시 부정적인 현실 이야기가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다. 듣고 있는 내 기분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이내 아버지는 통화하고 있는 상대방이 몇 분동안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패턴의 대화 방식으로 또 흘러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짙은 씁쓸함이 묻어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용기내어 시도한 아버지의 변화의 손길이 그대로 실패하게 둘 수는 없었다. 명치 언저리에 맴돌고 있던 무언가를 긁어 모아 한층 밝은 톤으로 대답했다.


"네. 무슨 말인지 알아요, 아빠. 제가 아빠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예요. 단지 그 말들을 소화시키는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예요. 아빠가 해주시는 말도 다 맞아요. 감사해요."


"... 그래,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나의 반응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는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풀렸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말을 더 건네기 전에 지금 조금 바쁘다 말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아직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의 어떤 교감이 나에겐 벅찼다. 포장지가 벗겨진 내 알맹이는 생각보다 섬세하고 예민하고 또 느린 사람이었기에 나는 나를 지켜낼 필요가 있었다.


'이제 나는 생각이 굳어서 안 바뀐다. 그러니 너가 바뀌어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언성을 높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아버지였다. 아무리 당신이 틀렸다 하더라도 본인을 바꾸려 쓸데없는 노력을 하지 말라 하셨다. 나는 이 말을 도저히 삼킬 수 없어서 아버지를 향한 내 마음과 함께 저 멀리 던져 버렸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나는 웃었다. 현실감이 없어서 나온 헛웃음인건지, 이전보다는 느껴지는 아버지의 진심이 귀여워서 인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웃었다. 나에게 전화를 걸기 전 얼마나 마른 침을 삼키셨을까.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해보려니 꽤 어려웠을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해보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켰다. 공기가 약간 짰다.


그래, 더 나은 쪽의 변화를 주저할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나는 아버지의 변화를 천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도 서서히 달라지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관계는 더 회복이 될 것이다.


사실 회복의 제일 좋은 방법은 카페가 아버지 기준에서 성공하는 거지만 나는 현재 감당할 수 없는 책임감과 부담은 외면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변화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내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카페를 인수할 줄이야 꿈에나 상상했겠는가. 알맹이도 내 포장지도 하루하루 변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시간이 많이 흘러야 그 모양새가 어느정도 갖추어질 것이다.


카페를 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변화는 올 것이다. 아버지 말대로 힘든 것들도 많을 거라 예상이 된다.


음... 어쩌면 아버지 딸이니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2022년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우리 부녀의 변화를 위한 한 발자국을 힘껏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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