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st all odds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고
이런 세상이 있단 말인가. 인권이 무시되는 디스토피아 풍경에 소름이 돋았다. 하층 계급 여성이 출산 기계가 된 끔찍한 상황.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의 잔학 통치가 떠오른다. 자유가 박탈되고 활자 접근이 차단되었다.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은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했다.
'시녀 이야기'는 극한 상황에서 발현하는 어두운 인간 본성을 그린다. 여성의 여성을 향한 정서 학대 장면에서 큰 불편함이 느껴진다. '아주머니'들은 끊임없이 복종을 요구하며 비인간적 논리로 시녀들을 세뇌한다. '아내'들은 당연한 듯 그녀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는데 이 모든 게 공감 실종의 신호들이다. 참여 처형이라는 집단적 광기는 인간 내면의 선악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든다. 사령관들의 비밀클럽 역시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진 사람들의 음침함이 잘 묘사된 광경이다.
소설은 누구나 아는 개념을 특수상황에 놓고 새로 바라보게 한다. 예를 들어 사랑을 둘러싼 전개가 그랬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가로막는 저 해괴한 정책의 동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자유연애가 근대 이후 짧은 역사의 관습이라며, 번식만을 위한 '짝 맺음' 시대로 돌아가야 한단 주장에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개념이 공식적으로 부정되던 시대였다.
옛 연인의 기억이 조금씩 흐릿해져 갈 때, 주인공은 사령관과 스크래블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단어의 교환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의 비유로 읽힌다. 닉과의 관계는 더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몇 번의 밀회는 그녀가 잊고 있던 육체적 욕망을 다시금 자각하게 했고, 억눌려 있던 내면은 닉에게로 향하기 시작한다. 두 남자와의 관계를 어딘가 낯설어하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소설은 그녀가 느꼈던 미묘한 감정의 정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감정은 과연 무엇인가? 실은 우리 모두 다 답을 안다.
모든 게 금기가 된 세상에서조차 절대 꺾이지 않을 원초적 인간 본성은 무엇인가. 소설은 사회 상황에 대해 불변인,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극한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지 묻고 있다. 더 나아가 인류가 정치와 종교 권력에 그저 순응하지 않는, 사회적 자정 능력이 내재된 존재들인지에 대해서도. 닉이 주인공 구출에 도움을 주던 장면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역사적 주해'라는, 제3자 시선의 마무리는 이들 질문의 답이 보다 긴 안목에서 찾아져야 한다 귀띔하고 있다. 모든 게 잠깐의 낮잠 속 짧은 악몽이었을 뿐이라는, 결국 세상은 밝은 쪽으로 진행하기 마련이라는 작가의 희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길게 보아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맞다고, 비록 비참하게 꺾여 버렸을지언정 어머니와 모이라의 투쟁이 결코 헛일이 아니었으며, 후세의 역사가가 제대로 평가해줄 거란 위로의 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