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걸어왔다. 엉겁결에 한 출발이었지만 갈수록 의욕이 샘솟았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피로에 지쳐 걷기 싫어지기도 했다. 걷는 일에서 의미를 못 찾을 때 가장 힘들었다. 극복은 언제나 시작을 떠올리며 가능했는데, 어느 시점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내가 이 레이스를 시작했던 이유를 오랜만에 떠올려 본다. 김연수 작가가 최근 인터뷰에서 "'왜 글을 쓰려고 했지'를 생각하려 한다. 아닌 건 아닌 게 맞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요즘 내 심정을 잘 표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절박하게 앞으로 나가고자 했던 시점은 그리 옛날이 아니다. 무언가를 털어내고 싶어 견디기 힘들 때였다. 정신을 가다듬어 스스로를 관찰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의 마음이 흐려져 감을 느낀다. 돌아보면 낯설 때가 있어 놀라곤 한다. 이것은 좋은 현상인가, 아닌가. 괴로움은 사실로, 지식으로만 머릿속에 남았고, 감정의 기억은 솔직히 말해 희미하다. 어째서 이런가. 어색해진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동일 인물이 맞는지. 그때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어보아도 옅고 뿌연 연기 정도가 느껴질 뿐이다.
시작의 마음. 내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지만,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때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또 일어났다. 조금씩 새어 나오던 안일함을 내 안에서 막아내지 못한 점 반성한다. 정글에서 조난당한 사람이 밖으로 나갈 시도를 하다, 결국은 큰 원을 그리고 말았다는, 그래서 절망했다는 이야기. 딱 내 상황 같다. 옳다와 그르다의 문제라기보다, 기쁨과 슬픔의 문제. 솔직히 이 탈출구 없는 자기 순환 앞에 슬픔 섞인 무력감을 느낀다.
글쓰기 덕에 이런 성찰이 가능했다. 정신의 일관성을 의식하며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습관이 과거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게 하고, 내가 변했다는 걸, 아니 정확히는 원래대로 돌아갔다는 걸 깨닫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어떤 면에서는 꽤 달라진 것 같기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