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중섭 Nov 26. 2017

바보를 만드는 디지털

소설 <멋진 신세계>의 실현

나는 자본주의와 디지털화가 현대판 노예가 시스템에 길들여지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굳게 믿는다. 특히 21 세기 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한 디지털 매체는 우민화 (愚民化)를 부추기고, 사고력을 상실한 사람은 시스템에 휘둘린 채, 자유를 잃은 현대판 노예로 전락하기 쉽다. 이번 파트에서는 디지털화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여전히 지식의 갈증을 느낀다”라고 말했는데, 그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리가 디지털화로 인한 정보의 범람 속, 과부하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맞다.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지혜를 얻기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사고할 힘을 잃고, 지식의 갈증조차 느끼지 않고 있. 디지털 속 온갖 가볍고 자극적인 정보에 취해,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한 판단 혹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통탄할 현실이다.

 

게다가 전 세계 사용자가 자유롭게 연결된 가장 민주적인 성격이어야 할 디지털은, 역설적이게도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써, 사람들의 사고력과 창의성을 좀먹고 있다. 다음의 두 가지 예를 보자.

 

디지털 치매

요즘에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이란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피처폰이 많이 보급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SNS, 카톡 대신 통화나 문자메시지가 주요 소통수단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나 친구, 애인의 전화번호는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저절로 외워지게 마련이었는데, 나도 당시엔 가까운 지인들의 전화번호는 생생하게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내 번호를 제외하고는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없다. 심지어 가족들의 번호도 예전에야 외웠었지만, 종종 번호를 바꾼 이후로는 외워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 외우지 않는다. 번호를 외우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스마트폰을 통해 연결이 될 수 있고 핸드폰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전화번호부가 백업되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번호를 외우는 두뇌 활동을 핸드폰에 아웃소싱 해버린 셈인데, 이러한 아웃소싱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내게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건대, 나뿐만 아니라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과거 피처폰을 쓰던 때와 비교 시, 현재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많이 없으리라. 

 

 우리는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게 된 것일까? 전화번호뿐만 아니라 계산기가 없으면 단순한 암산을 하는데 애를 먹는다든지, 자주 가는 길도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헤맨다든지 하는 것도 모두 현대인이 겪고 있는 신종 증상으로, 이는 디지털 치매의 일부이다. 디지털 치매란 사람들이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서 기억력이나 계산 같은 두뇌 능력이 감퇴하는 현상을 말한다. 사람의 뇌가 처음 어떤 정보를 습득할 때 뇌세포들이 단기 기억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이는 반복 및 숙달을 통해 장기기억의 형태로 굳어진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면 기억하는 것을 훈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정보는 휘발성이 높은 단기 기억의 형태로 머물러 곧 없어지게 된다. 이처럼 디지털화에 대한 과도한 노출은, 기억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총체적 지적 사고 능력을 감퇴시킨다. 사람들은 두뇌활동의 일부를 디지털에 아웃소싱 해버림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쉽게 습득할 수 있게 됐지만, 한편으론 해당 정보를 소화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이 무뎌지게 됐다. 디지털의 세계는 드넓은 망각의 강이다. 우리는 무뎌진 감각을 방치한 채, 디지털이 쏟아내는 막대한 정보에 휩쓸려 부유 (浮遊) 한다. SNS에 올라온 슬픈 이야기를 보며 잠시나마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지만, 스크롤을 내린 지 몇 초 만에 웃긴 콘텐츠를 보며 낄낄거리는 꼴이 그런 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akTBDlhmgo&t=15s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저자 니콜라스 카도 디지털의 발달이 인간의 뇌 구조에 영향을 미쳐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고 했는데, 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인간의 뇌가 성인이 된 후에도 변화하는데 현대인의 뇌가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며 퇴보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터넷이 제공하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많은 사람들은 집중과 몰입 그리고 관심의 분화와 생각의 분산이라는 손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깊이 있는 긴 글을 읽거나 사유하는데 어려움을 호소하고, 우리의 뇌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로 인해 과부하에 걸려, 지적 능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저하된다. 

 

또한 니콜라스는 바이젠바움 MIT 박사의 말을 인용하며 디지털화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인류가 처한 위험은, 인간이 자신들을 기계와 차별화하는 특성들(사고와 신체와의 연결, 기억과 사고를 형성하는 경험, 감정과 공감을 위한 능력 등)을 희생시키면서 점점 인간성을 잃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비극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자기 인식 그리고 우리의 정신활동과 지적인 추구, 특히 “지혜를 요구하는 업무를 컴퓨터에 위임하는 것을 거부할 용기”라고 밝혔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15세기 구텐베르크는 인쇄혁명을 통해 책의 대중화에 기여했고, 지식은 소수의 상류층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급속하게 전파됐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됐고, 명상, 토론, 읽기 및 쓰기를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두뇌를 훈련했으며 이러한 지식의 대중화는 위대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낳았다. 하지만 털의 급속한 보급 이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볍고 자극적인 소재들의 정보들을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졌고 깊이 있는 독서 및 사색과 명상을 하는 것은, 다시금 소수의 사람들만 향유하는 영역이 되어 버렸다. 두뇌도 근육과 같아서 자꾸 써줘야 발달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디지털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더 이상 지적인 경험과 두뇌활동을 갈구하지 않게 되었고, 스스로 사고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필터 버블

여행을 즐겨하는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을 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10년 전 했던 제주도 자전거 하이킹이다. 당시에 3박 4일에 걸쳐 200km가 넘는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했는데, 무척 힘들고 무모했던 도전이었지만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여행의 순간순간을 자신의 직관이나, 현지인의 조언에 의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무심코 들어간 맛집이나 현지인의 추천을 받고 간 해수욕장, 표지판을 착각해 잘못 들어선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름다운 풍경. 조금은 서툴렀고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당시 분명히 제주도를 생생히 느끼고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도 여전히 자유여행을 선호하지만, 지금 내가 여행을 하는 모습은 분명히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에어비엔비에서 남들이 매겨 놓은 평점을 보고 숙소를 예약하고, 네이버에 들어가 맛집 검색을 하며, 트립어드바이저를 통해 명소를 보고, 구글맵을 켜고 여행을 한다. 자유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갈 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처럼 여행할 때 디지털을 활용하는 사람이 상당수인데, 남들이 다 가는 명소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남들이 좋다는 숙소, 맛집을 가면서 생각한다. “기껏 외국여행 갔더니 왜 이렇게 한국인들이 많은 거야?” 디지털은 다채롭고 개성 있어야 할 자유여행도, 획일화된 공장의 양산품처럼 만들어 버렸다.

 

여행은 단편적인 예일뿐, 실생활에서 디지털 매체는 우리의 의사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무슨 영화를 볼지, 어떤 맛집을 갈지 등의 사소한 의사결정에서부터 학업, 일, 경제, 정치 등 다소 중요한 주제에 대해 참고할 만한 정보를 디지털 매체를 통해 찾는다. 우리는 디지털을 통해 광범위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한다고 착각하는데, 사실 주요 디지털 매체가 제공하는 맞춤형 알고리즘을 통해 굉장히 제한적이고 편향된 정보만을 편식하는 경우가 많다. 페이스북, 구글 네이버, 카카오 같은 주요 디지털 매체들은 나름의 알고리즘을 활용해 사용자들을 개개인으로 식별화 한다. 사용자가 어디 있는지, 어떤 관심사를 가지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자사 서비스를 이용하는지 등등 사용자를 식별할 수 있는 코드를 세분화하고, 고도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추천한다. 

 

왜 디지털 매체가 사용자들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할까? 그것은 디지털 매체를 운영하는 기업이 선의를 가져서가 아니다. 단지 사용자에게 보다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명분 하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함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클릭하는 매 순간마다 디지털 매체들은 이를 데이터로 쌓아놓고, 사용자들의 그림자 노동 (SNS 포스팅하기, 검색하기 등)으로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한 타깃형 광고는, 광고주들로부터 높은 가격을 받고 팔린다.

 

예를 들어, 구글에 “브런치”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내게는 브런치 서비스 (카카오에서 제공하는 글쓰기 플랫폼) 관련 정보가 검색 결과 상단에 뜨지만, 어떤 이에게는 브런치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식사) 맛집과 관련된 광고가 검색 결과 상단에 노출된다. 이처럼 구글에서는 같은 검색어를 입력하더라도 검색 결과가 달라진다. 이렇게 사용자 별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알고리즘은, 특히 페이스북에서 강력하다. 가령, 다소 진보적인 정치 색을 가진 어떤 사람의 페이스북에는 관련된 콘텐츠의 노출만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친구들의 콘텐츠나 그들이 좋아요를 누른 페이지 등) 이뤄지며 보수적인 성향의 콘텐츠는 그 사람의 페이스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 이후 나의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명은, 그동안 자신의 페이스북 친구들은 온통 힐러리 지지뿐이었는데 대체 누가 트럼프를 지지한 거냐고 분통을 토하는 글을 남겼었다. 미안하지만 무식한 이야기다. 그의 뉴스피드에는 힐러리 관련 정보만 끊임없이 업데이트됐을 거고, 그가 쓴 글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노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페이스북은 사용자의 관심사를 파악해 연관성이 떨어지는 정보는 의도적으로 노출되지 않게끔 설계됐다. 마크 주커버그가 했던 다음의 말은, 페이스북이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지를 보여주는데, 이는 사용자들의 정보의 편식으로 이어진다. 


A squirrel dying in front of your house maybe more relevant to your interests right now than people dyingin Africa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당신의 집 앞에서 죽어가는 다람쥐가, 아마 지금 당신의 관심사에 더욱 부합하는 이슈일 수 있습니다) –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생각 조종자들>의 저자 엘리 프레이저는 “필터 버블”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디지털 정보 편식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필터 버블이란 디지털 매체가 사용자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해, 사용자는 필터링된 정보만을 습득해서 자신과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서 소외되는 현상을 말한다. 저자는 한 때 열린 사고와 다양한 정보로 민주주의에 기여했던 인터넷이 필터 버블을 야기하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사용자들에게 철저히 개인화된 정보만을 제공함으로써,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혹은 내가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주제 등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일 기회가 적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필터 버블이 무한한 가능성을 없애버림으로써 사용자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는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무척 동의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가 저 너머에 있다고 인지하는 것과, 다른 세계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디지털 사용자를 가두는 필터버블

디지털 매체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매체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다양한 정보를 어떻게 접할지 사람이 직접 취사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세계의 알고리즘은 사용자로부터 긁어모은 데이터에 따라 오로지 맞춤형 정보만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필터 버블 속으로 몰아넣는다. 필터 버블에 갇힌 사람들은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이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처럼 버블 밖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어지면, 이는 기존의 틀을 깨는 창의성이나 문제를 비틀어볼 줄 아는 사고력의 저하로 이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wwrduFMjOQQ  

결론은, 내 생각에 디지털화는 우리를 점점 바보로 만들고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위대한 질문을 할 때, 원숭이가 아닌 인간으로서 실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질문하고, 토론할 때 인류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 속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앞으로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의 발전은 이런 흐름을 가속화할 전망이다. 우리는 모든 것으로 연결되는 한편 고립될 것이고, 만연한 무지 (無知) 속 지혜를 얻기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질 것이다. 

 

TV가 대중에게 전파될 초기에, 지식인들은 TV를 바보상자로 부르며 경계했다. 그들이 우려한 것처럼 TV의 대중화로 사람들은 신문이나 책을 멀리하고, 하루를 마치고 사색하는 대신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 스크린을 바라보게 됐다. 그런데 21세기 디지털은 TV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력을 갉아먹고 있다. 주체적으로 사고할 힘을 잃은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한 채, 먹고살기에도 바쁘다며 시스템에 길들여진 현대판 노예로 전락한다. 핸드폰을 수시로 체크하며 배터리가 떨어지면 전전 긍긍해하면서도, 정작 무뎌지는 자신의 사고력에 대해서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1984>와 더불어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히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판 노예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멋진 신세계> 속 세계는 단일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사람도 포드식 대량생산처럼 인공 수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정부의 최대 목적은 체제 안정이며 시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화되고 어릴 때부터 철저한 세뇌교육을 받아 최하위 계급도 자신의 암담한 생활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철저히 체제의 유지를 위해 설계된 것이며 정부가 체제의 안정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쾌락이다. 자극적인 쾌락의 과잉공급을 통해 체제는 유지되고 시민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며 사고력과 자유를 상실한 채 살아간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1984> 속 사람들은 빅브라더라는 절대 독재자를 통해 모든 것이 통제되고 억압된 사회를 살며 공포를 느낀다. 한편,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자극적인 쾌락에 둘러 쌓여 부조리함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순종한다. 나는 현대판 노예의 모습은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한 것과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100년 전에 이를 예견한 헉슬리의 통찰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현대판 노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자발적 복종이다. 동물원 원숭이가 조련사 손에 든 바나나에 의해 길들여지듯, 주체적으로 사고할 힘이 없는 사람은 시스템에 너무나 쉽게 길들여진 채, 현대판 노예로 전락한다. 이들은 자발적 복종을 통해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며, 형벌 같은 삶을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