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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Nov 19. 2017

현대판 노예의 탄생

자발적 복종의 과정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잃은 사람을 노예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현대판 노예는 누군가의 강요와 협박이 아닌 자발적인 복종의 특성을 가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현대판 노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다음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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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난 지금 슬퍼 나랑 놀자

사막여우: 난 너와 놀 수 없어. 난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어

어린 왕자: 길들인다는 게 뭐야?

사막여우: 그건 너무 잘 잊히고 있는 것이야.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어린 왕자: 관계를 만든다고?

사막여우: 그래. 넌 아직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 생텍쥐베리 <어린 왕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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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와 사막 여우

사막여우는 ‘길들이다’의 의미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고 상대에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길들이다’의 또 다른 정의는 무언가를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를 길들이다, 입맛을 길들이다, 애완동물을 길들이다, 새 차를 길들이다 등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길들이다’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누군가 영향력을 행사해서 다른 무언가를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길들이는 주체는 길들임을 당하는 객체와 동등하지 않으며, 상위의 존재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현대판 노예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 길들임과 연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가 물건이나 어린아이들을 길들일 때 상위의 주체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듯이, 시스템 또한 사람들 위에서 군림한다. 여기서 시스템이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따위와 같은 거창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세상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판”이다. 시스템은 안정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지며, 학교, 회사, 사회, 국가는 모두 시스템의 하위 집단이다. 시스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많은 명제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데,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와 같이 마땅히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패러다임이 있다. 가령, 많은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아래와 같은 시스템 속 명제들을 참이라 굳게 믿으며 산다.

 

-    삶은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긴 여정이다.

-    노력 없이 얻는 것은 없다. 고생 끝에 낙이 오리라.

-    돈은 많을수록 좋다.

-    근면하게 일하고, 참고, 저축하다 보면 부자가 될 수 있다.

-    공부 열심히 해서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

-    젊을 때 놀면 나중에 늙어서 고생한다.

-     어른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삶이 획일화되기 쉽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사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무릅쓰는 일이 돼버린다. 특히나 다수에 의해 답습된 삶의 방식은, 세대에 세대를 거치며 이것이 마치 정답인 양 단단하게 굳어져, 그런 방식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낙오자 혹은 이단으로 만들기 쉽다. 특정 삶의 방식이 정답으로 인식되는 것의 문제는, 다른 것이 틀린 것이 돼버린다는 점이다. 이는 다양성을 억압하고 개인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 및 자유를 위협한다. 현대판 노예는 '누가 시켜서 혹은 남들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이유로 타인이 정답으로 지정한 삶을 살며, 패러다임에 관한 어떠한 의구심도 품지 않는다. 이들은 '시스템 저 너머에서' 스스로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 채, 자발적으로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지배받기를 원한다.


어떤 이들이 시스템에 길들여짐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끊어낼 수 없는 이유는 공포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쳇바퀴 같은 삶에 치여, 자신이 시스템에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는지 여부 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남들이 가는 길을 벗어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 남들과 다른 길을 가다 막혔을 때,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다른 길로 방향을 틀기 전, 나와 같은 길을 걷던 사람들이 훨씬 성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때 느낄 감정에 대한 공포.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다른 길을 걷다 실패했을 때,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


입시, 취업, 사업 실패 등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실패했을 때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한 채, 외면받고 거절당하는 것의 비참함을. 이렇듯 시스템은 공포 심리를 이용해, 우리에게 '이미 설계된 삶'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강력히 종용한다. 우리는 대개 여기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며 기꺼이 자유를 내려놓으며 외친다. 저를 길들여주세요! 복종을 원합니다! 그러곤 점점 시스템에 잘 길들여진 노예로 변해가며 합리화한다. 다들 이러고 산다고. 이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현대판 노예의 탄생이다.

 

고백하지만, 나도 이러한 시스템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지독히도 시스템에 잘 길들여진 현대판 노예였다. 당시 내가 가진 삶의 철학은 '노력에 따른 성취와 보상'이었다. 삶은 등산과 같은 긴 여정이고, 이 봉우리를 넘으면, 다음 봉우리를 넘으면 황금빛 호밀밭이 펼쳐질 것이라고 상상하며 나는 쉴 새 없이 발을 굴렸다. 특히나 부를 통한 경제적 자유는 궁극적으로 내가 얻고자 했던 보상이었는데, 돈을 많이 벌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엄청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성공한 사람들이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기에 꿈을 좇아라'라는이야기를 할 때면 삐딱하게 생각하곤 했다. '그건 당신이 이미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나는 성공한 사람들이 누리는 부가 목적이 아닌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주 좁은 시야를 가지고 시스템이 설계한 틀에 갇혀, '시스템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돈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한 건, 20살 때 아르바이트를 통해 직접 돈을 벌면서부터였다. 당시 학생이라 주머니도 가벼웠거니와 내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는 스스로 돈을 벌어보는 것이었는데, 당시 시급이 4000원 조금 안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마다 한나절씩 일해서 한 달에 번 돈은 25만 원 정도였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이 오피스나 술집이 많은 역삼동 근처였는데, 가끔씩 취객들이 와서 모욕을 주고 행패를 부리는 것을 종종 경험하면서 돈 벌기가 정말 쉬운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몇 번의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뒤, 운이 좋게도 나는 과외를 구할 수 있었고 당시 내 과외 시급은 2만 5천 원-3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 소리를 들으면서 편하게 앉아서 가르치는 것만으로, 내내 땀 흘리며 일하면서 받는 금액의 몇 6-7배를 벌 수 있다니!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한 덕분에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성취했고, 이러한 성취는 내게 훨씬 높은 급여를 보상했다. '노력에 따른 성취와 보상'이라는 내 삶의 철학이 실현된 짜릿한 순간이었다. 과외를 시작하면서 주머니가 넉넉해진 나는 씀씀이가 커졌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과외를 늘리기 시작했다. 주말에도 과외를 나가면서 삶의 여유가 없어지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빈번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조금 덜 자고 덜 놀면 과외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으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조금씩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으레 말하는 ‘적성을 고려해서 진로를 정해라’라는 말은 대학생이었던 내게 그다지 와 닿는 말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 대학 입학이라는 능선을 지난 이후, 나는 목표가 없어졌고 방향성을 상실한 채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다만, 과외를 통해 돈의 맛을 본 이후로는 내겐 높은 급여가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우선시 되는 조건이었다. 진로 고민을 하던 와중에, 우연히 투자은행의 존재를 알게 됐고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이거다! 당시 업계에서 근무하는 20-30대 젊은 선배들의 월급은 수 십 년을 일한 나이 지긋하신 부모님이 받는 월급보다 높았고, 똑똑한 동료들과 경쟁적인 업무 환경은 적성과도 맞는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이 지루하고 길고 긴 여정을 거쳐 저 멀리 황금빛 호밀 밭이 보이는 듯했다.


그 뒤 인턴과 계약직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취업하게 됐지만 직장인이 돼서 남의 돈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아이에게 문제를 풀라고 지시하고 풀이를 알려주는 선생님이 아닌, 지시를 받는 일개 말단 직원이었고 그 속에서 내 정체성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 없이 얻는 것은 없다, 근면 성실하자 따위의 주문들을 외우며, 다달이 통장에 꽂히는 월급을 보며,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새겨들으며,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성공한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남들도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을 보며 나는 그렇게 자발적으로 복종했고 회사에 길들여졌다. '노력에 따른 성취와 보상'이라는 나의 철학이 이번에도 증명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 및 산더미 같이 쌓이는 일 속에서 나는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주중에 자유로웠던 얼마 되지 않는 순간 중 하나는, 야근 후 녹초가 되어 집에 가는 택시를 탈 때였다. 야근에 지친 몸을 꾸깃꾸깃 택시에 우겨놓고 집에 가는 15분 남짓한 시간 동안만 나는 “나”로서존재할 수 있었고, 이 시간을 방해받는 것이 싫어 자꾸만 말을 거는 택시기사님이 귀찮았고 때로는 화가 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가 나고 견딜 수 없던 것은 이렇게 택시에서나 신경전을 벌이며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졸렬한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부식돼버린 순수함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경멸하는 부류의 인간이 돼버린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나는 얼마큼 적으냐.

 

내가 한 때, 회사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현대판 노예가 됐던 것은 나한테만 일어난 비극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회사는 현대인이 자발적 노예로 전락하기 쉬운 최적의 장소 중 하나이다. (오해하지 말자. 모든 회사원을 비하하는 것이 아닌, 자유를 잃은 사람을 노예로 정의한다고 앞서 말했다) 가축을 빗댄 사축 (회사에 가축처럼 길들여진 회사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회사가 노예를 양성하기 쉬운 곳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회사는 열정과 성취라는 달콤한 말로 회사원들을 고무시키고, 많은 회사원들은 다달이 지급되는 월급에 중독돼 쉽사리 줄을 끊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현대판 노예가 된다.


본인이 회사의 소유주가 아닌 이상, 고위급 임원이라 해도 회사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으며, 회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시간을 포기한 대가로 급여를 제공한다. 회사는 고용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 일하러 오는 장소일 뿐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꼰대는 회사라는 시스템에 잘 길들여진 정예 노예다. 그들은 기업과 임금 노동자 간의 고용 계약을 마치 노예 계약으로 착각한다. 꼰대는 본질과 관련 없는 부수적인 일을 본인의 권력을 남용해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쓸데없이 잦은 회식, 주말 등산, 사적인 심부름, 의전 등이 그런 예인데,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본인이 아닌 회사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들은 본인의 정체성보다는 자신의 명함에 적혀있는 XX회사 XX팀장 따위와 같은 직함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며, 마치 회사를 통한 정체성이 평생 자신을 대변하리라 착각한다. 이들은 회사에 자신과 같은 정예 노예가 많아지기를 기대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요한다.   


예전에 M&A 부서에서 인턴을 할 때, 매일 밤 같이 야근을 하던 상무님이 있었다. M&A 부서 특성상, 고된 업무로 인해 새벽 2-3시에 가는 것은 기본이요 주말까지 나와야 했는데,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무님은 매일 밤에 사무실에 남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일을 하곤 했다. 그분의 연봉은 짐작하건대 수 억 원은 족히 됐을 테지만, 자녀들이 모두 해외 기숙사 학교에 다니고 있어 비싼 학비를 대느라 재정상황이 그렇게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분은 마땅한 취미도 없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정말 일이 생활의 전부인 워커홀릭이었다.


어느 날, 그분이 어른으로서 당시 인턴이었던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에게 조언을 해준답시고 불러 앉히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애들아 인생은 정말 짧다.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 일만 하고 살기에도 삶이 짧다” 물론 겉으로는 “네 열심히 일해야죠”라고 말했지만, 당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상무님이 퇴직 후 XX회사 XX상무라는 명함이 없을 시, 어떤 것으로 이분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을까.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분이 구조조정으로 해고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회사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예고된 새드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일과 회사를 위해 살아온 이 분이 실직했을 때 겪었을 엄청난 상실감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윤태호 작가의 <미생>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난 왜 일에 의미부여를 했을까. 일은 일일 뿐인데”

 

내가 현대판 노예로 충실히 살면서 기존에 가져왔던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던 것은 금융업계에 만연한 구조조정을 목격하면서부터였다. 똑똑하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진리라고 믿어왔던 '노력에 따른 성취와 보상'이 진실일까? 내가 굳게 참이라 믿었던 이 패러다임은 어쩌면 시스템이 나를 길들이기 위해 당근으로 사용한 것은 아닐까? 삶이 등산이라면, 과연 수많은 봉우리를 넘다 보면 언젠가 황금빛 호밀 밭에 다다를 수 있을까? 앞만 보고 가느라 내가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황금빛 호밀 밭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는 자유로운 사람인가?


그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회사에서 자유롭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외국계 회사인 덕분에 꼰대도 없고 수평적인 조직문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출퇴근 시간을 지키며 일이 있으나 없으나 회사에 종속된 채로 시간을 팔아야 했다. 때로는 눈코 뜰 때 없이 바쁜 와중에 일에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여유가 생겨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볼 때 문득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들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를 정의하는 것은 내가 아닌 XX회사의 회사원이 내 정체성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순진하게도 회사원이 아닌 나로서 존재하길 바랐지만, 많은 사람들은 명함에 새겨진 회사와 직급으로 나의 정체성을 규정해버렸다.


시스템에 더 길들여지기 전에 변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답게 사는 자유의 소중함과 주인의 삶에 대해 재고하게 됐다. 그 와중, 기존에 내가 철석같이 믿었던 패러다임이 어쩌면 틀릴 수도 있다는 의구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세상이 분명 급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이 주입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여전히 굳게 믿고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 이들이 미래에 느낄 엄청난 자괴감과 상실감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우리는 시스템에 지나치게 길들여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눈을 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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