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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Dec 03. 2017

도그마가 돼버린 “열심히 살자”

지배 없는 자기 착취

자본주의라는 열차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은 생산과 소비다. 이 파트에서는 자본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생산에 대해 알아보자. “열심히 살자”는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보편적 패러다임이다.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통해,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한 베짱이가 추운 겨울을 보내는 것을 보며 열심히 사는 개미를 롤모델로 삼는다. 특히나 OECD 평균 대비 낮은 수면시간과 많은 노동 시간, 자기 계발 콘텐츠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 열심히 살자는 명제는 한국인에게 일종의 도그마다. 많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도 남는 시간에 영어, 피아노, 체육 등 사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고(심지어 최근엔 코딩까지!) 그들의 부모 혹은 학생 자신은 이렇게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생도 좁아진 취업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1학년 때부터 스펙 쌓기에 골몰하며, 온갖 동아리, 공모전, 봉사활동 등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 분주히 산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이 "열심히 살자"는 도그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직장인의 본질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요, 일터 밖에서 온갖 외국어, 자격증 등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이 바람직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열심히 사는 남들과 달리, 퇴근을 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서 드라마나 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때때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늘 말한다. “먹고사는데 정신이 없어서~ 못했다”, “지금 바쁜 시기만 끝나면 나중에 좀 더 편해지겠지”,“딱 1달만 쉬고 여행 가고 싶다”,“열심히 살고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여유롭게 살 거야” 안타깝지만,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아마 평생 "열심히 살자"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스템 내에서 쳇바퀴 같은 삶을 산다. 특히나 투자은행 업계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 업계 사람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내가 얼마를 벌면 은퇴하고 편하게 살 거다"라는 말을 한다. 아쉽게도 해고당하는 게 아닌 자발적으로 은퇴한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다. 투자은행 업계에서 만족스러운 부의 수준은 늘"더 많이"다.  


이처럼 실로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산다. 학생들은 공부에, 직장인들은 일에 치여 열심히 살아간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 연인과 함께하는 소소한 추억, 산책과 명상을 하며 보내는 여유로운 주말의 오후 등 열심히 바쁘게 살면서 놓치게 되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왜 우리는 과거보다 절대적으로 훨씬 부유하고 기술이 발달한 세상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바쁘게 살며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걸까? "열심히 살자"는 어떻게 도그마가 됐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크게 신분제의 폐지, 자본주의의 확산 그리고 저성장에 따른 불안이 이러한 인식의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신분제의 폐지

우선, 신분제의 폐지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살 동기부여를 제공해 주었다. 신분제가 폐지되기 이전 개인의 삶은 전적으로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에 달려있었다. 왕의 아들은 왕으로, 노비의 자식은 노비로, 장돌뱅이의 자식은 장돌뱅이, 엿장수의 자식은 엿장수로 세대를 거쳐 자신의 부모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이런 식으로 삶이란 내가 개척하는 것이 아닌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운명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다지 열심히 살 만한 동기부여를 가지지 못했다. 가령, 누군가 노비의 자식이라면, 고된 노동을 끝내고 잠을 줄이면서 주인 몰래 학문을 갈고닦고 해봐야 어차피 노비의 삶인데 무엇하러 열심히 살 필요가 있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이 자신의 분수에 맞는 삶이라 여기며 살았고, 종교를 통해 내세에 더 나은 삶을 살 것을 꿈꿨다. 하지만 신분제의 폐지는 패러다임을 바꿨다. 신분제의 폐지를 통해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살고 무엇을 성취하였느냐에 따라 본인의 삶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근사한 동기부여를 가지게 되었다.


상상해보라. “노력과 성취에 따른 보상”의 메커니즘에 따라 과거 노비의 후손이었던 사람도, 그의 노력과 성취 여부에 따라 인생이 멋지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것인지! 실제로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자수성가 이야기는 매스컴을 타고 전파됐고, 그들의 특징은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서 무언가를 성취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열심히 잘 살아보자는 인식은 대중들에게 확산되었고, 개천의 용 사례는 대중들에게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불어넣게 됐다. 한국도 급속한 경제 성장과정을 거쳐, 가난한 환경을 딛고 근면 성실했던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사례들이 많아지면서, 열심히 살자는 자연스럽게 도그마가 됐다.     


자본주의의 확산

두 번째로, 산업혁명에 따른 자본주의의 확산은 “열심히 살자”가 도그마로 자리 잡게 된 기폭제가 되었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생산수단이 없던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 자본가들로부터 임금을 받으며 경제생활을 해야 했고, 많은 사람들은 매일 15시간 이상 일하는 등 비인간적인 노동착취를 당하고 심지어 아이 들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각성효과가 있는 카페인이 들어간 홍차나 커피를 제공하면서 이들이 장시간 노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홍차와 커피는 상류층의 전유물에서 산업혁명 이후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급격히 퍼졌으며, 오늘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모닝커피를 마시며 노동을 시작한다.(회사에 믹스커피나 에스프레소 머신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면, 산업혁명부터 이어져 온 노동자들을 깨어있게끔 하기 위한 고용주의 교묘한 술책이지만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좋은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으면 복지가 좋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이윤을 쥐어짰지만, 이렇게 무자비한 착취는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며 자본가들에 대항했다. 자본가들이 현 체제를 지속 가능한 구조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열심히 일하게끔 동기를 부여해야 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을 통한 수입과 저축은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라고 설파하며, 교묘하게 노동자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지고 노동자들의 반발도 줄어들었다.  

이건 착취가 아니고 기회야!

이러한 배경에서 “열심히 살자”는 도그마가 확산됐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이자 100달러 지폐에 초상권이 쓰이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열심히 살자”를 설파한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흙수저 청교도 집안에서 자라 미국의 독립에 중대한 공헌을 한 자수성가의 아이콘으로서, 그의 어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근면과 절제를 강조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에 영감을 받은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티즘에 바탕을 둔 지역에서 유독 자본주의가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트에게 직업은 신이 부여한 소명이며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금욕하여 축적한 부는 정당한 결과물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근면과 절제를 통해 부를 쌓는 것을 신의 뜻으로 옹호함에 따라, 사람들에게 열심히 살면서 이윤을 추구할 동기를 부여했고 이는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졌다고 베버는 생각했다.  


Sloath make all things difficult but industry allthingseasy.  (나태는 모든 일을 어렵게 만들고 근면함은 모든 일을 쉽게 만든다.
Laziness travels so slowly that poverty soon overtakes it (게으름은 천천히 움직이므로 가난이 곧 따라잡는다)
-벤저민 프랭클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

자본주의가 일찍 발달한 서구권 국가들은 값싼 원료 및 노동력을 공급받고 판매할 시장이 필요했고, 이는 19-20세기 제국주의로 이어졌다.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배를 받는 국민들을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들로 격하하며, “우리는 열심히 살아서 부를 축적하고 강대국이 됐지만, 너희들이 못 살고 우리의 지배를 받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주입하게 된다. 게으르고 열등한 민족의 문명화라는 명분을 통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여 식민치하에 놓인 사람들의 반발을 잠재우려는 서구 열강의 의도였다. 이 과정에서 서구 열강들의 지배를 받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열심히 살자”는 도그마는 뿌리 깊게 퍼지게 됐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인들을 게으른 민족으로 폄하하고 통치를 정당화했으며, 심지어 일부 조선 지식인들은 이러한 생각에 동조했다. 이광수가 <민족 개조론>을 통해 나태하고 무기력한 조선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다소 자학적인 주장을 한 것도 “식민국이 지배를 받는 것은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서구 열강들의 논리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후 한국이 독립과 한국전쟁을 거쳐 자본주의를 채택한 후로, 한국인들에게 열심히 살지 않는 나태함은 죄악이 되었다. 식민 지배를 받고 전쟁을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가난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었다. 군사정권은 경제성장을 이뤄내 장기 독재에 성공했고, 열심히 살자는 도그마가 한국인에게 뿌리 깊이 내리는데 일조했다. 예전 프로테스탄트들이 그랬듯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부를 쌓는 것은 한국인에게 미덕이 되었다.     


저성장에 따른 불안

마지막으로, 저성장에 따른 불안 역시 사람들을 열심히 살게 만드는데 한몫을 하였다. 특히나 한국은 IMF 이후 한 직장이 평생 고용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 상황에서 좋은 대학에 가고 소위 스펙을 쌓는 것이 자신의 밥줄을 보장해준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온갖 자기계발 관련 콘텐츠들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과거에 “열심히 살자”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지만, 저성장 시대에는 생존을 위한 필수가 되어버렸다. “남들보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들다”라는 생각이 팽배해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열심히 발을 굴렸다. 


하지만 문제는 다 같이 과거보다 열심히 살기 시작하면서, 무언가를 성취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레드퀸 효과”라는 개념이 나온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제자리에 머무는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은 말한다. “네가 제 자리에 머물려면 열심히 뛰어야 해. 앞으로 가고 싶다면 그보다 두 배로 더 열심히 뛰어야 할 거야” 붉은 여왕이 있는 나라에서는 주변의 환경이 변하므로, 앨리스가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고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IMF 이후 치열한 경쟁과 노오력이 요구되는 한국사회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열심히 살자"라는 도그마를 통해 시스템이 현대판 노예를 길들이는 방식은 "네가 열심히 살면~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보상을 약속하는 것인데, 시스템이 제시한 당근을 보며 현대판 노예들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스템의 보상은 흔히 많은 돈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자학하리만큼 스스로 채찍질하며 열심히 사는데, 그런 과정에서 현재의 행복을 뒤로 미루는 불행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10대 친구들과 배낭여행을 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아이의 운동회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등의 행복을 뒤로 미루고 열심히 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의 행복이 미래에 언제든지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면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열심히 살아야 미래에 행복하다는 인식은 실제로 보편적이다. 게다가 때때로 사람들이 방전돼서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 때, 시스템은 우리를 이렇게 길들인다. "네가 지금 멈추면 100을 얻지만, 참고 열심히 살다 보면 추후에 200을 줄게"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택하며 다시금 신발끈을 매고 부단히 열심히 달리는데, 가장 안타까운 비극은 이렇게 열심히만 살다가 인생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생이 마감하는 것이다.   


이제는 왜 우리가 과거보다 바쁘게 열심히 사는지, 왜 휴식을 즐기면서도 때때로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되었으리라. 어떻게 “열심히 살자”라는 도그마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시스템이 우리를 어떻게 길들였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는 현대판 노예의 쇠사슬을 끊어낼 수 없다. “열심히 살자”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DNA가 아닌, 불과 몇 세기에 걸친 끔직한 훈육을 통해 만들어진 관념이다. 때문에 그대가 열심히 사는 것에 과도한 강박관념을 느낄 필요도 없고 때때로 게으르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서 지나친 자기혐오를 느낄 필요도 없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휴식이 필수다. 하지만 “열심히 살자”라는 도그마 속 게으름은 악으로 규정되고, 인간은 마치 거대한 시스템 속 부품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오늘날 세태다. 정말로 게으른 것은 취업이나 스펙을 쌓기 위한 노력을 설렁설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무언가에 시간을 쏟고 노력하며 자기가 열심히 산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정체된 질주다. 본인을 스스로 착취하고 열심히 살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제자리걸음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들은 현대판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네가 열심히 살면 ~할 수 있어"라고 길들이던 시스템의 방식은 과거에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한 개인이 열심히 살면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고, 이들은 중산층이 됐다. 하지만, 분명 요즘 세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적정한 성취와 보상을 얻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 모든 탓을 개인으로 돌리며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라는 과거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배를 합리화했던 논리를 펴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후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며, 다음 파트에서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축인 소비에 대해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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