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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Dec 17. 2017

부의 양극화

벌어지는 머리칸과 꼬리칸

인류의 역사에 굵직한 기록을 남긴 빛나는 문명의 뒤에는 언제나 노예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잉여 생산물이 쌓이고 사회를 구성하는 무리의 크기가 커지면서, 계급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때 노예는 가장 하층의 신분으로서, 가혹한 노동이나 전쟁, 주인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용도로 착취됐고, 때로는 상품처럼 거래되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예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노예제의 폐지가 범인류적 공감대를 얻은 것은 19세기로, 불과 2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노예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 노예의 경우 일정 수준의 주거  경제적 자유를 보장받았기에, 자신의 생활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외거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거주하고 주인에게 제 때 상납만 한다면, 독립적인 삶을 꾸릴 권리를 가졌다. 이들은 신분의 제약으로 인한 자유만 없었을 뿐이지평범한 서민의 삶을 살았다따라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주인과 기성사회에 저항하는 것보단, 노예의 신분에 안주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리라

 

현대판 노예도 마찬가지다자신의 정체성을 죽이고 자유롭게 사는 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해도, 큰 불만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자발적 복종을 하며 남들이 시키는 대로, 남들처럼 평범하게 군중 속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 대다수에게 괜찮은 선택이었던 황금기가 있었다. 특히 중산층으로서 누리는 적정한 수준의 부(富)는 이들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당근이었다. 한 때 이들은 구조적 호황기를 누리며 충분한 수준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일부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류층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사람들은 마치 과거에 일부 노예들이 그랬던 것처럼, 위험을 감수하며 시스템에 저항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직면할 다소 어둡고 우울한, 불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단언컨대, 평범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초양극화 시대에 살게 될 것이고, 선택받은 1%와 평범한 99%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 벌어질 것이다. 현대판 노예가 시스템에 복종한 대가로 얻는 가치는 터무니없이 초라한 수준으로 하락할 것인데,  현대판 노예의 삶에 안주하는 것이 비효율적인 의사결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밝혔듯이 평범한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점차 저렴해지는 현상은, 이를 생산하는 노동의 주체인 인간의 개별적 가치가 급격히 추락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곧 초양극화 시대의 도래를 암시하고, 시스템에 의해 붕어빵 찍어내듯 대량 생산된 평범한 현대판 노예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질 것은 자명하다우리가 경험할 초양극화는 크게 부, 일자리 그리고 건강에 관한 부분인데, 이번 파트에서는 부의 양극화에 대해 알아보자.

 

벌어지는 머리칸과 꼬리칸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와 같이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채택한 경제체계에서 불평등은 피할 수 없다나는 불평등에서 비롯된 열등감 및 상위 계층을 지향하는 욕구는 성장의 연료가 되기 때문에, 적정한 수준의 불평등이 사회가 발전하는 원동력이라 굳게 믿었다때문에 불평등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었고 누군가 상류층이 되길 원한다면개인이 열심히 노력해 성취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상류층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일부 아주 운이 나쁘거나 혹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생각이 오만하고 편협했음을 인정한다. 나는 근본적인 사회 구조적 문제를 경시한 채, 불평등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만 전가한 것이다. 소외계층이 처한 열악한 상황에 대한 공감, 인간적 연민, 따뜻한 위로를 건네지 못한 채, 이들을 차가운 무관심으로 외면한 것에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누구나 각자 느끼는 삶의 무게가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중압감에 짓눌린 채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들에게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은 순전히 네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야"라는 태도는 폭력이다.    


난독증이 있는 독자가 본인을 빨갱이로 매도할까 봐 노파심에 말하건대, 나는 여전히 적정 수준의 불평등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지한다. 하지만 부의 불평등은 분명 과도한 수준으로 심화되고 있으며, 많은 부분은 기회의 불평등을 제공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흐름 속, 개인이 역량을 발휘할 여지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는 점. 즉 상위계급으로 태어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봤자 삶이 별반 달라지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소득의 성장률이 경제성장률을 여태껏 줄곧 상회해 왔다고 주장한다. 수 백 페이지가 넘는 책의 일부를 간단히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부의 세습화 및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고,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돈을 벌어봤자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부의 증가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인데 나는 이에 동감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사람들이 자주 쓰는 수저 계급론, 조물주 위에 건물주 등의 신조어를 떠올리면 이런 현상이 와 닿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한계를 인식한다. 

 

1980-2016년 1인당 실질 소득 증가율. 상위 계층의 증가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특히나 젊은이들은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계층 고착화를 바라보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이 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거에 대다수의 성인들이 거쳤던 지극히 평범한 사회화의 과정을 하나둘씩 포기하기 시작했는데, 취업,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하는 다포 세대라는 말이 이러한 상황을 대변한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포기했다는 것인데,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어둡고 긴 저성장의 터널 속에서 주저앉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양상이다.

 

내 생각에 현재 한국의 20-30대 젊은이들은, 20세기 이후 자신의 부모세대보다 못 사는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분노를 호소하며 과도기에서 발버둥 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분노도 점차 수그러들 것으로 생각한다. 부의 불평등이 완화되며 상황이 개선되기 때문이 아니라열심히 살아봤자 실패하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삶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하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상실 (혹은 죽음)의 5단계라는 개념이 있는데, 사람이 깊은 슬픔을 느끼는 단계는 크게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이라고 한다즉 지금과 같은 과도기에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현실을 부정하고 분노하지만, 부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미래에는 이러한 계급 고착화를 받아들이고 암담한 현실을 수용할 것이라는 점이다아래에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부의 양극화가 극단적인 홍콩은 이미 수용의 단계에 접어든 상태인데, 홍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계급의 고착화를 상당 부분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다

 

일본의 사회 모습은  한국의 미래를 참고하는데 좋은 지침이 되는데일본의 사토리 세대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사토리 세대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로돈과 명예와 같은 출세욕이 없는 젊은이들을 지칭한다사토리라는 말은 일본어로 득도를 뜻하는데기나긴 장기불황 속 노력해봤자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을 지켜본 일본의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수도승처럼 부귀영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현상을 뜻한다이들은 소비를 지양하고 아르바이트로 용돈벌이나 하면서 소소한 삶을 추구한다

 

나는 한국도 점차 사토리 세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이렇게 욕구가 거세된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 (출산, 소비, 납세 등)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나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결혼 및 출산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로 이어져 국가경제 성장 동력의 손실로 이어진다. 한국은 지난 50년 간 "할 수 있다"는 의욕적인 구호를 외치며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지만,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드는 2017년을 기점으로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서서히 한국을 잠식할 예정이다. 즉 우리는 한국이라는 서서히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셈인데, 일본은 그나마 전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잘 버티고 있지만, 한국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홍콩을 통해 바라본 부의 양극화의 미래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유행은, 그만큼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과 혐오가 가득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부의 양극화는 주요한 갈등의 씨앗인데, 한국은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부의 양극화 문제가 더 악화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충분히 그렇다는 것인데, 홍콩에 살면서 부의 양극화가 이렇게나 극단적일 수 있음에 놀라면서, 선택받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연민을 느낀다. 홍콩에 측은함을 느끼면서, 이것이 다가올 한국의 미래일 수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현재 기형적인 부의 쏠림 현상을 보이는 홍콩의 모습을 통해, 부의 양극화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홍콩 서민 아파트

홍콩은 크게 홍콩 섬 (HK Island)- 구룡 (Kowloon)- 신계 (Newterritories) 3가지 지역으로 구분돼있는데 (신계 쪽으로 갈수록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다), 홍콩 섬/ 그 외 지역 (구룡, 신계) 간의 부의 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다. 심지어 홍콩 사람들은 홍콩 섬을 Bright side (양지), 그 외 지역을 Dark side (음지)로 부른다.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 및 커다란 쇼핑몰은 주로 홍콩 섬에 많이 분포해있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부유한 사람들 및 외국인들은 홍콩 섬에 사는 경우가 많고 신계 쪽으로 갈수록 평범한 홍콩 서민들이 산다. 

 

나는 서울-지방강남-강북  살아봤지만홍콩에서 느끼는 홍콩 섬과 다른 지역 간의 격차는 한국의 그것을 압도한다리펄스 베이나 스탠리 베이 같은 해안가에는 최고급 대저택들이 있지만신계 쪽에는 5 남짓한 방에 2-3명이 함께 사는 경우도 많다홍콩은 지역에 따라 집 값뿐 아니라전반적인 생활 물가도 상당히 차이 나고, 주말에 홍콩  속 번화가를 둘러보면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은 대부분 외국인이거나 여행객이


게다가 주말의 화려한 도심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집에서 일하는 필리핀 가정부들이 떼를 지어 거리에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리핀 가정부의 경우 평일에는 보통 주인집의 고시원 같은 좁은 방에서 숙식을 해결하지만, 주말 하루는 휴가로 밖을 나온다. 이들은 보통 홍콩의 중심지인 센트럴이나 코즈웨이베이에 자리잡아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잡담을 하는 등 나름의 시간을 보낸다. 관점에 따라 그들이 일주일 중 자유롭게 보내는 하루로 볼 수 있겠지만, 거리에 방치된 채 노숙자처럼 시간을 보내는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개운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물가에 비하면 급여가 높은 편이기 때문에 홍콩에는 상당히 많은 필리핀 가정부들이 있다. 

거리에 방치된 홍콩 필리핀 가정부들

실제로 홍콩의 지니계수는 (높을수록 경제적 불평등여타 선진국들의 그것을 압도적으로 초월한다. 2016년 홍콩의 지니 계수는 역대 최고치인 0.54를 기록했는데 (1996년 홍콩의 지니계수 0.48, 2016년 한국의 지니계수 0.30), 통상적으로 지니 계수가 0.5를 초과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수준으로 분류한다. 돈이 돈을 낳는다고 부자들은 홍콩 부동산 랠리를 통해 얻은 돈을 지속적으로 투자해 부를 쌓아가지만,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매달 자신 월급의 상당 부분을 살인적인 월세로 날리며 쥐꼬리만 한 방에서 생활을 한다. 피케티가 주장한 “자본 소득 성장률> 경제 성장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홍콩이다. 홍콩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서 돈을 벌어봐야 부동산을 통해 번 자본소득을 따라가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소득 대비 주택 가격비율 (PIR, Price to Income Ratio)이라는 지표가 있다특정 지역에 평범한 수준의 집을 사는데평범한 가구의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년을 저축해야 하는지 나타내는 지표다당연히 지표가 높으면 그만큼 임금 대비 집 값이 비싸다는 뜻이고 낮으면 집 값이 싸다는 뜻이다. Oxford와 Numbeo 자료에 따르면서울은 15 정도 수준인데 이는 평균 가구가  푼도 쓰지 않고 15년 저축을 해야 겨우 25-30 수준의 집을   살  있다는 것을 뜻한다따라서 서울에서 내  한  있으려면 15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악착같이 모아야 하기 때문에, 내  마련은 한국인 일생의 중대 과업  하나이자 많은 서민들의 꿈이다.

 

그런데 홍콩의 PIR지표를 보면 무려 35년에 육박한다. 생각해보라. 35년이라니! 과장이 아니라 홍콩의 집값은 같은 면적이라면 한국 대비 0이 하나 더 붙는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 3-5 하는 수준의 집이라면 홍콩에서는 30-50억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소득이 낮은 홍콩 서민들의 경우 신림동 고시원 같은 방에서 여러 명이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금수저가 아닌 이상 평범한 홍콩 직장인이 홍콩에서 집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젊은 세대는 경제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비현실적으로 높은 집값 때문에 부모로부터 독립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젊은 부부가 결혼을 하더라도 신혼집을 구할 수 없어, 각자의 부모 집에서 따로 떨어져 생활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살인적인 홍콩의 집 값

이렇듯 살인적인 물가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낮은 수준으로 정체돼있는데, 홍콩의 평균 연봉은 약 2700만 원으로 한국의 3400만에 비해서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홍콩에서 일반적으로 높은 급여를 제시하는 금융업 프론트 오피스, 로펌 등은 외국인과 중국인들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어서, 홍콩 사람이 홍콩 과기대나 홍콩대와 같은 명문대를 졸업한다 하더라도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 부모가 부자거나 본인에게 특출난 재능이 없다면, 개인이 계층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교육에 매진해서 높은 급여를 받는 직업을 가지는 것인데, 홍콩에서는 이마저 여의치 않아 보인다. 미래 에 대한 기대 및 어떠한 계층 이동의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홍콩이야말로, 진정 “헬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열차가 "성장과 부"라는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질주하는 사이 머리칸과 꼬리칸 사이 간극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어떤 이념을 가진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이 간격이 벌어지는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및 계층의 고착화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누진세가 도입되지 않는 이상, 자본소득 성장률은 경제 성장률 및 근로소득 성장률을 상회할 것이다. 아마도 최악의 미래는 홍콩처럼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을 겪으면서도, 비참한 삶을 사는 보통의 사람들이 분노조차 느끼지 않고 계급사회를 수용하는 단계가 아닐까 싶다. 


내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현재 20-30대가 안정을 이유로 현대판 노예로 안주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시스템에 안주하면서 얻는 가장 큰 편익은 중산층으로서 누리는 안락한 삶이었다. 안정적인 직장, 내 집 마련, 튼튼한 노후 연금 그리고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과거 노예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스템에 복종하며 얻을 수 있는 효용이 상당했기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노예의 신분을 탈출하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적었던 것이 과거의 세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정말로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현대판 노예로 살며 얻는 효용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평범의 종말인 시대에 이들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있다. 시스템에 충성해봤자 본인이 얻는 것이 적어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관성에 의해 관습을 깨지 못하고 평범의 장막에 숨어 현대판 노예의 삶을 택한다. 특히나 이들은 이른바 스펙 (좋은 대학 가기, 석박사 하기, 전문직 되기 등)을 갖추는 것을 통해,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상류 계층으로서 충분한 효용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러한 생각에 무척 회의적이다. 


일반적으로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데, 인간이 제공하는 노동이라는 서비스에 관한 초과공급 상태는 앞으로 인공지능의 발전을 필두로 가속화될 것이다. 이런 추세 속, 독창성 없는 현대판 노예들의 몸값이 낮아지는 것은 필연이고, 이는 이들이 자유를 포기한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현대판 노예의 삶은 무척이나 비참해질 예정인데, 특히 다음 파트에서 서술할 노동의 종말은 이들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앗아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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