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
알파고-이세돌 바둑 대결을 계기로 AI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진화하는 AI의 특성을 고려할 때, 더 이상 인간 vs AI에서 AI가 승리를 거두는 일이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겼던 한 번의 승리는 훗날 AI가 작성한 교과서에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긴 최후의 날이었다”라고 남지 않을까라는 섬뜩한 상상도 해본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은 SF영화의 고전으로 이후 수많은 SF물에 영감을 줬다. 특히나 인상 깊고 소름 돋는 명장면은, 슈퍼 컴퓨터 HAL이 인간들의 입 모양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유추하는 장면이다. 우주선의 선원 인간들은 HAL이 오작동을 일으키자 고장난 HAL을 폐기할 계획을 짠다.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들은 HAL의 음성 인식 범위를 벗어난 곳에서 은밀히 계획을 세우지만, 인간들의 입 모양을 통해 의미를 유추한 HAL에 의해 간파당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HAL의 반란에 의해 인간들은 곤경에 처한다.
이처럼 기술의 발달로 인해 로봇이 인간에 위협이 된다는 상상은 여태까지 많은 SF물에 등장한 소재인데, 특히나 최근 들어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듯하다. 미디어는 4차 산업혁명 콘텐츠를 쏟아내고, 사교육 업계도 이때를 놓칠세라 코딩, 실리콘밸리 체험 캠프 같은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과연 AI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수많은 전문가들조차 문제에 대한 인식 및 다가올 변화에 대해 막연한 예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편, 스티븐 호킹, 빌 게이츠, 엘론 머스크, 마윈 등 IT업계 거물들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의 발달이 야기할 미래에 무척 비관적이다. 이들은 AI가 부의 불평등을 심화하고, 3차 세계 대전을 낳을 수 있으며 심지어 인류의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들은 왜 이런 암울한 전망을 하는 걸까? 우리가 비관론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최악의 사태에 대한 선제적 인식을 통해 미래를 미리 대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들이 비극을 전망하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나도 역시 다소 우울한 관점으로 AI를 바라보는데, 기술을 만드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함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토목 건설에 사용할 목적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연구한 노벨이, 사람을 죽이는 살상 무기로 다이너마이트가 쓰인 것을 달가워했을까? 나무를 고사시키는 고엽제가 베트남 전에서 사람에게 사용될 줄 누가 알았을까? 복잡한 화학기호를 연구한 화학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대량학살의 용도로 일산화탄소를 사용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AI 킬러 로봇을 손에 넣은 테러단체가 이를 활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실제로 AI 전문가들은 국제단체에 서한을 보내 킬러 로봇을 금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게다가 나는 4차 산업혁명을 필두로 한 기술의 발달이 점차 인간의 일자리를 잠식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현대판 노예들을 상품으로 전락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상품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언제든 싸게 살 수 있고 다른 것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한 번씹고 버리는 껌 같은 신세를 말한다. 여태껏 사람들은 고용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왔지만, 앞으로 점점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기업가 정신이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창업 혹은 창직은 담대한 실행력과 실력 그리고 운을 겸비한 소수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술의 발달이 우리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거나, 그 파괴력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닌데, 한국인에게 미래의 변화가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것은 first mover로서 변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국내 기업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
많은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인생을 일하느라 보낸다. 예로부터 일은 종교와 더불어 개인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삶의 목적의식을 갖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노동의 종말은 진행 중이고,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예정이다. 앞으로 ‘왜 사냐’는 근원적인 물음에 ‘생산-소비’이외의 대답을 명쾌하게 떠올릴 수 없는 대다수의 현대판 노예들은, 아마 점점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왜 향후 기술 발달이 과거와 다른가
사람들이 기술의 발달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사라지는 일자리다. 당신이 고용주라고 생각해 보자. 로봇을 사용하면 24시간 부려먹어도 불만 없고, 초과 임금 안 줘도 되고, 노조도 안 만들 텐데 기왕이면 사람 대신 로봇을 많이 사용하고 싶지 않을까? 때문에 성숙기에 접어든 제조업은 비용절감을 위해 점차 자동화 공장을 늘리고 있고, 그나마 성장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과거 제조업이 수행했던 만큼의 고용창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기술발전을 멈출 수 없는 걸까? 개인적으로 지금 수준의 기술에 충분히 만족하지만, 약육강식의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런 생각은 순진하다. IT기업들이 기술 개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 하면 망하니까. IT는 산업의 특성상 양극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기에 선두에서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경쟁력을 크게 잃는다. 더 많은 이윤추구를 위한 먹거리 발굴을 위해 어떤 기업이 유망한 분야에 투자할 때, 다른 기업들이 이를 따라 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고 경쟁력을 잃은 기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나는 미래 기술에 관심이 많고 운 좋게 하던 업무도 관련이 깊어, IT 뉴스를 자주 본다. 그런데 최근 미국과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한국인으로서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Facebook, Amazon, Netflix, Google, Baidu, Alibaba, Tencent (앞 글자를 따서 미국은 뱀의 송곳니라는 뜻인 FANG, 중국은 박쥐 BAT으로 부른다) 같은 주요 미국, 중국 IT 기업들은 미래 기술 투자에 열을 올리며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는데 한국의 대다수 기업들은 20세기에나 통했던 fast follower전략을 고수하며 정체돼 있다.
한편, 역사적으로 기계와의 대결에서 인간은 늘 한계를 드러냈다. 이와 관련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19세기 터널 공사에서 드릴이 사용되고, 노동자들이 해고 위기에 몰리자 가장 힘이 셌던 노동자 존 헨리는 기계와의 대결에 나섰다. 결국 존 헨리는 기계와의 터널 뚫기 대결에서 간신히 승리한다.‘역시 기계는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존 헨리는 이 대결에서 지나치게 기력을 쏟은 나머지 죽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느꼈으리라.‘인간이 기계를 이기려면 정말 죽을 만큼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라고. 기계는 육체활동을 넘어 체스, 퀴즈, 바둑까지 인간 챔피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두뇌 활동으로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낙관주의자들은 말한다. 기술의 변화는 늘 있었고, 변곡점마다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고 기존의 일자리를 대체해왔기에 앞으로도 문제없다고. 실제로 농업->제조업->서비스업으로 주력 산업이 바뀌는 과정에서, 직업 재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쉽게 일터를 옮길 수 있었고, 전체 고용의 파이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의 변화는 기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변화를 주도하는 IT 산업이 전통산업 대비 많은 인력을 고용할 필요가 없는 구조고, 직업 재교육의 속도가 기하급수적 기술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IT 기업들은 금융, 운송, 소매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파괴적 혁신을 통해, 전통의 강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동화를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직원이 필요 없다. 예를 들어, 아마존은 34만 명을 고용하며 230만 명을 고용하는 월마트가 지배하던 소매 영역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넷플릭스는한 때 8만 명이 넘는 직원들을 보유했던 비디오 시장의 강자 블락버스터를 붕괴시켰지만, 현재 고작 3-4천 명 남짓한 직원을 고용할 뿐이다. 테슬라와 우버는 각각 3만 3천 명과 1만 2천 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전통 자동차 산업의 판을 뒤집고 있다. 참고로 폭스바겐의 직원 수는 63만 명이다.
또한, 에어비엔비는 고작 2-3천 명 남짓한 직원으로 전 세계 호텔 산업을 흔들고 있는데, 호텔 재벌 힐튼 그룹은 17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각각 약 8-9만 명과 2-3만 명을 고용하며 디지털 광고를 양분하고, TV, 신문, 라디오와 같은 전통 미디어 매체는 속수무책으로 이들에게 광고수익을 뺏기고 있다. 인터넷 전문 은행 찰스슈왑은 1만 6천 명을 고용하며 전통 은행들을 위협하는데, 미국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인 웰스파고의 경우 27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직업 재교육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마저 교육 및 숙련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에겐 요원해 보인다. 예를 들어, 20세기 농부는 쉽게 볼트를 조이는 공장의 노동자가 될 수 있었고, 이들은 다시 서비스직으로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급변하는 환경 속, 자율 주행차, 키오스크, 챗봇에 의해 대체될 트럭 운전기사, 식당 점원, 콜센터 직원 등이 미래에 직업 재교육을 받고 수월하게 새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과연 이들이 코딩을 학습하고 빅데이터를 다루거나 혹은 부가가치가 높은 창의적인 일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신기술 위주로 새롭게 바뀌는 산업 지형에서 이들이 설 자리가 얼마나 많을까?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전방위에서 기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수많은 공신력 있는 기관들이 내놓는 일자리 전망 보고서에 의하면, 단순 반복 업무를 하는 일은 대체 가능성이 높은 반면, 사람들과 소통 및 공감하고 창의력을 요하는 일은 대체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문제는 현대판 노예로 길들여진 사람들은, 직종에 상관없이 단순 반복 업무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비단 블루칼라뿐만 아니라 화이트칼라도,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형화된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은 직군을 막론하고 기계에 의해 대체될 위험에 노출돼있다.
일자리의 미래는 무엇일까? 우선, 단순 육체노동을 하는 직군의 대체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선진국들의 제조업체들은 생산 기지를 아시아로 옮기느라 분주했고,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고속 성장했다. 상대적으로 본국 대비 임금이 싼 아시아에서 사람을 고용해 비용절감을 꾀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아시아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서 자동화 공장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디다스는 로봇을 이용한 스피드 팩토리를 표방하며 독일 및 미국에 자동화 공장을 늘리고 있는데 이는 임금이 싼 아시아로 공장을 옮기던 과거수 십 년간의 행보와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거창하게 대규모 공장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자동화로 인해 육체노동을 하는 인간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우리 실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집 근처 맥도널드에서 찍은 건데 간단히 터치 몇 번하고 결제만 하면 자동으로 주문이 들어간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시스템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런 기계를 들여놓음으로써 맥도널드는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지만 매장 직원 입장에서는 직업을 잃을 위험에 처한 것이다.
문제는 여태껏 대체 위험이 적다고 여겨졌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자동화로 인해 육체노동하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주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바둑 챔피언들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목격했듯, AI는 두뇌를 쓰는 분야에서도 인간을 능가하고 있고 지식 노동자들마저 언제든지 대체될 위기에 처해있다. 코딩을 비롯한 컴퓨터 관련 사교육이 도움이 될까? 정형화된 업무의 경우, 점점 인간이 기계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주입식 교육으로 배우는 것은 계산기를 쓸 시대에 주판 교육을 하는 거랑 같은 셈이다.
로봇이 쓴 기사들은 이미 널리 읽히고 있고, 소프트웨어 도입을 통해 관련 업무 사무직을 줄이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전문적인 자격요건을 요하는 금융, 법률, 의료 등의 업계에서도 AI의 사용이 확산되는 추세다. 심지어 창의력을 요하는 예술 분야에까지 AI가 활약을 하고 있다고 하니, AI의 사각지대가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기술의 발달로 인해 한 순간에 모든 노동자가 실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러한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데, 기술의 발달이 인간 노동자를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직업을 얻기 위해 투자한 비용 대비 수익이 낮아질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예를 들어, IBM의 AI Watson이 의료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의사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급여를 받는 의사로서 운신할 수 있는 영역이 과거보다 점점 좁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이는데 이는 곧 노동자의 교섭력이 줄어듦을 의미한다. 가령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AI의 사용이 확산되고 생산성이 극대화되면, 똑같은 업무량 대비 더 적은 의사 수가 필요하거나 이들에게 급여를 올려주지 않아도 될 명분이 생긴다. 물론 의사는 타 업종 대비 여전히 고임금 직업군일 것이지만, 인플레이션과 동결될 임금을 고려한다면, 의사가 되기 위해 투여된 비용(장기간의 수련, 비싼 학비, 강도 높은 노동, 막대한 학습량으로 인한 스트레스, 경제활동을 미루며 생긴 기회비용 등) 대비 수익이 턱없이 줄어들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즉시 대량해고로 이어지지는 않아도, 사람들을 점점 코너로 몰고 가는 것은 분명하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로봇의 우수성을 자랑하며 “너 말고 기계 쓰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일자리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 줄 알아야지”라고 갑질 해도 노동자 입장에서는 딱히 반발할 수 없기에, 임금을 적게 받아도 반발 못하고 협상에 불리한 고지에 서는 셈인 것이다. 또한 자신의 노동으로 제공한 서비스와 비슷한 수준을 로봇이 훨씬 싼 가격에 제공한다면, 결국 소비자에게 철저히 외면받거나 가격 인하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다가올 변화의 물결에 고용의 파이는 서서히 침식될 것이고, 대부분의 현대판 노예는 이러한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기술의 발달에 따른 노동 경제 모델의 붕괴는, 저성장으로 신음하는 세계 경제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다. 로봇이 인간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고 소비를 하며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로봇은 하지 못한다. 로봇은 노동을 마친 뒤 사람들끼리 술 한잔 하러 가지도, 사치품이나 집을 사지도 않는다. GDP를 구성하는 요소 중 큰 축을 차지하는 소비가 죽게 되면, 경제성장의 동력을 더욱 잃는 셈이고 초과공급의 지속은 불황을 낳는다. 튼튼한 소비는 저성장 시대에 버팀목이 되는 방안인데, 로봇의 사용이 보편화된다면 그나마 저성장 시대를 버티고 있던 소비라는 안전핀을 뽑아버리는 셈이다.
로봇 세금 및 기본 소득에 대한 생각
기술의 파괴력을 우려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신개념의 분배 정책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가 주장한 로봇에 세금을 물리자는 주장이 하나의 예이다. 그는 노동자가 소득세를 납부하듯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로봇들의 사용자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걷힌 세수는 사회복지 및 직업교육에 활용할 수 있고, 이렇게 비용을 부과해야 기업들의 자동화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나는 로봇 세금의 취지에 동의하지만, 다분히 유토피아적인 생각이기에 현실에서 적용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일단, 어떤 로봇에 세금을 매길지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다. 모든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고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세탁기의 발달은 과거 여성들의 가사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줬고, 여성해방에 기여했다. 하지만 어떤 기술은 명백히 인간의 노동 영역을 위협할 수 있는데 이를 “위협적인 로봇”으로 규정하고 세탁기와 같은 일반적인 기계와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얼마나, 어떻게 세금을 부과하는지도 이슈인데 머리 좋은 기업들은 꼼수를 부려 최대한 세금을 적게 낼 방안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예컨대, 로봇 개체수로 세금을 부과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기계 성능을 최대한 높여 개체 수를 줄이는 따위의 방법을 통해 세금을 덜 내는 방안을 얼마든지 고안해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로봇 세금이 비현실적인 이유는, 조세가 행해지려면 국가 차원이 아닌 범 세계적 차원에서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는 기본 윤리조차 무시하며 실리에 따라 테러 및 전쟁을 하는 마당에, 전 세계적으로 로봇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안건에 대해 합의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무척 회의적이다.
한편, AI에 대한 경각심과 더불어 주목받고 있는 것이 기본소득제이다. 로봇이 상당수의 일자리를 대체할 경우를 대비해,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일괄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함으로써,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최소한의 삶의 수준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과거에는 시장경제를 해치고 근로의욕을 저하한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던 이러한 보편적 복지가 왜 최근에 다시 도마 위에 오르는 것 일지 잘 생각해보자.
이미 통찰력 있는 전문가들이나 기업인,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들은 기술의 발전이 불러올 비극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다. 조금 꼬아서 본다면 사실 기본 소득을 주장하는 기득권 세력의 이면에는 “너희들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먹고살게 해줄 테니 로봇이 네 일자리를 가져가도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우리가 제공하는 제품 및 서비스를 구매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너희가 일정 수준의 소비력을 갖췄으면 좋겠어”라는 의도가 깔려있다.
나는 선별적 복지를 지지하지만, 결국 미래에는 기본소득 형태의 보편적 복지가 확대될 것이라 예상한다. 대량 실업 및 저성장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가장 확실히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카드는 먹고살게 해주겠다는 것이 될 터인데, 안타깝게도 일자리가 점점 없어지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이 점점 버거워지며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기술의 발달에 따라 구조적으로 일자리가 없어지는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정부 주도로 일자리 만들고 직업 재교육한다고 해 봐야, 결국은 민간에서 일자리 없어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다만, 전체 고용의 파이가 쪼그라드는 속도를 늦추는 정도일 뿐. 트럼프가 Great America를 외치고 내수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장벽을 쳐야 할 대상은 멕시코가 아닌 실리콘밸리다. 하지만 기술이 일자리를 잠식했다는 사실보다는, 이민자들 탓을 하는 것이 비난의 화살의 과녁도 명확하고, 표를 모으기 용이하다는 사실을 트럼프는 간파하고 이용했을 수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1995년 <노동의 종말>에서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노동이 위기에 처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임금 및 일자리는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고, 향후 심화되는 기술의 발달로 노동의 종말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언했다. 노동의 종말은 더 이상 기술 예찬론자의 망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다.
이러한 흐름 속, 앞으로 새로운 기술의 패러다임을 발 빠르게 받아들이거나 자신만의 독창성을 가진 사람들은 상당한 이득을 볼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불행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거나 상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미래는 자본과 플랫폼을 소유한 0.1%와, 변화를 역동적으로 활용할 1% 그리고 나머지 99%의 계급사회가 될 것이다. 21세기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마치 18세기 증기기관을 발명한 영국의 중산층과 아프리카 소수 민족 간 격차만큼이나 벌어질 것이다. 현대판 노예는 후자에 속할 확률이 높다.
안타까운 점은, 많은 사람들의 삶에 노동이 큰 부분을 차지하기에 이것을 기계가 뺏어갔을 경우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끼고 절망에 빠질지 염려되지만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미래 지도자의 최대 고민은 어떻게 하면 시민들에게 목적의식 및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초양극화 속 사회 분열을 막느냐일 것이다. 하고 싶은 것 꾹꾹 참아가며 현대판 노예로 살기에는 기본소득은 대가가 너무 적은 것이 아닐까? 노동의 종말 속 현대판 노예들은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런 변화의 흐름 속,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시스템에 종속된 현대판 노예의 길을 택하는 것만큼 위험한 선택은 없다. <애널리스트와 100억짜리 식사>에서 자세히 밝혔듯, 평범의 가치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할 수 밖에 없다. 국가가 구제해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국가라는 시스템은 안정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지기에, 변하더라도 그 속도는 무척 느리다. 결국 각성하고 변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며, 작은 변화가 모여 서서히 시스템에 균열을 만들고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추후에 개인의 입장에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