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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Dec 31. 2017

죽여주는 수명 연장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죽음은 왕이든 거지든 평등하게 맞이하는 삶의 마침표다. 살아생전 만리장성을 쌓고 어마어마한 권세를 누렸던 진시황도 불로초를 수소문했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수 세기 전까지만 해도 각종 질병이나 전쟁으로 인해 50살 이상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돌잔치가 아기 출생 후 1년 동안 생존했음을 축하하는 풍습에서 유래된 것은, 과거에는 태어나자마자 질병으로 얼마 못 살고 죽는 신생아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급격히 증가한 평균 수명

하지만 의학의 발달 덕분에 오늘날 인간의 수명은 대략 80세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80년 정도 살 것이라 가정하고, 인생을 설계하고 노후를 준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삶이란 10-20대 때 본인의 인생을 위해 투자하고, 30-40대 때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 수확하고, 50-60대 이후 은퇴해서 그동안 축적한 자산 및 연금으로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다 병 없이 죽는 것이다. 이렇게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엔딩을 위해 사람들은 열심히 산다. 때때로 쉬고 싶지만, 언젠가는 편하게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오래 산다면 어떨까? 학계에서는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넘어 150세를 전망하고, 구글은 500세까지 인간 수명을 늘리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심지어 21세기 에디슨으로 불리는 저명한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에서, 2045년에는 인류가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무병장수는 인간의 염원이지만, 나는 평균 수명의 비약적 증가가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의학의 발달에 따른 혜택은 소수의 부자들에게만 집중될 수 있는데, 생명공학의 발달은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라는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 게다가 저출산 속 심화되는 고령화와 늘어나는 기대수명으로 인해, 노후 생활을 보장할 공적 연금이 주는 효용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또한 삶의 의미를 일에서 찾던 사람들은, 50-60세에 은퇴 후 ('노동의 종말'파트에서 밝혔듯 기술의 발달로 그나마 50-60세까지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행운아일 것이다) 남은 인생을 무기력하게 살며 극심한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 시시포스 같은 삶을 사는 현대판 노예에게, 오래 사는 것은 형벌의 형량이 길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수명 연장은 역설적이게도 죽여주는 비극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평등하지 않다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뒤따라오는 노예에게 “메멘토 모리”를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오늘의 환희가 내일의 죽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지나친 자만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로마의 풍류시인 푸블릴리우스 시루스는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귀족이나 거지나 모두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실로 그렇다. 계급사회의 출현 이후, 불평등은 사회, 경제, 정치적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했는데, 한 가지 평등의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죽음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고, 허망하게 줄어드는 삶의 모래시계를 그 누구도 뒤집을 수 없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평등의 원칙 속 유한한 삶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인들은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한편, 기존의 의학은 뺄셈의 성격이었다. 질병 및 장애가 있거나 상해를 입은 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의학의 주된 목적이었다. 치료를 받은 환자의 수명은 평균치로 수렴했고, 죽음에 대한 평등의 원칙하에 커다란 건강 격차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이제 덧셈의 의학으로 변화하고 있다. 즉, 환자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의 부차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의학은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가령, 성형수술은 원래 기형을 교정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현재는 더 나은 외모를 갖추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업적 수술로 변모했다.   


덧셈의 의학의 맹점은, 국가가 의료비를 지원해주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기에 거금을 지불할 부자들만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현재 덧셈의 의학은 주로 미용 분야에 한정돼 있기에, 이와 관련된 격차에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할리우드 여배우가 막대한 돈을 쏟아 멋진 외모를 뽐내며 미 (美)의 차이를 과시해도, 대중은 커다란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덧셈의 의학이 확장되어, 보다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건강의 양극화가 발생한다면 어떨까? 만약 부자는 500세까지 살고 가난한 사람은 80세에 생을 마감한다면? 부자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자녀를 건강 수준 및 능력을 최상치로 끌어올린 슈퍼 베이비로 개조한다면? 급속도로 발전하는 생명공학은 죽음에 대한 평등의 원칙을 위협할 수 있는데, 부의 많고 적음에 따라 건강 및 수명의 수준이 결정되는 건강의 계급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나노봇, 인공장기, 유전자 편집 등의 기술을 통해 획기적으로 수명이 연장될 수 있다고(심지어 불로장생까지) 주장한다. 게다가 구글이나 애플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헬스케어 투자를 늘리며 생명공학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령, 구글은 인간 수명을 500년까지 늘리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칼리토를 세워, 미국 국립 보건원의 관련 분야 예산과 맞먹는 수준의 돈을 써가며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 수명이 늘어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지금은 꿈같아 보이는 이런 생각들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이런 기술들이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다고 상상해보자. 연구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았을 기업들은 투자한 돈을 회수하고 가능한 많은 이익을 내고 싶어 할 것이다. 이들은 노화방지와 수명연장에 관한 고객들의 열망과 높은 지불의사를 알고 있다. 생각해보라. 100억의 자산을 보유한 노인이 노화를 늦추기 위해 (혹은 불멸하기 위해) 10억을 쓰는 것을 아까워할까? 따라서 관련 재화 및 서비스에 대한 가격은 무척 높은 수준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불멸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관련 재화 및 서비스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충분한 수요가 존재할 것임을 뜻한다. 앞으로 부자는 막대한 돈을 써가며 건강에 투자해 획기적으로 오래 살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경제력이 없는 빈곤 계층은 이러한 의학발달의 혜택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수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할 덧셈의 의학이 초래할 건강의 양극화는, 기존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불평등은 기어코 죽음이라는 경건한 평등의 영역으로 침범하여, 건강마저 계급화된 인간사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이다.


공적 연금으로부터 얻는 효용 감소

공적 연금은 사람들이 은퇴를 한 후에도, 적정 수준의 생계유지를 할 수 있게끔 국가가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하지만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연금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즉 연금을 내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받을 사람들은 많아지고 있는데, 인간의 기대수명까지 점점 늘어난다고 하니 이들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글이 꿈꾸는 것처럼 인간이 500세까지 장수하는 것이 실현되면 재앙이지 않을까. 15-64세의 생산가능 인구가 나머지 14세 이하 어린이 및 65-500세 노인들을 부양하기 위해 죽어라 일하고 막대한 세금을 내야만 하는 시대. 연금의 사각지대에서 빈곤으로 신음하는 노인들의 수가 폭증하는 시대. 부자들은 더 오래 살고 싶어 의료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지만, 가난한 노인들은 차라리 안락사를 원하는 시대.   


한국 국민연금의 경우,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2060년에는 기금이 고갈된다고 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국민연금의 수익률이 생각보다 높지 않아 2051년이면 고갈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현재 한국 국민연금은 부분 적립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월 소득의 약 9%의 보험료를 국민들로부터 걷어 기금에 적립한 후, 이를 추후에 연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연금 적립액이 차곡차곡 쌓이면 문제가 없겠다만 이런 추세로 간다면 2043년에 정점을 찍은 후, 감소하다 고갈되는 결과가 자명하기 때문에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연금 개혁에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연금은 다수의 이해관계와 직결되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표를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어떤 연금 학자는 연금을 코끼리에 비유했는데 덩치가 크고,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움직이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만큼 연금 개혁은 어렵다. 


2060년 국민연금이 고갈되면 연금 지급이 중단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올까? 이미 다른 선진국들은 쌓아둔 연금이 고갈됐거나 혹은 한국보다 예상 소진 시기가 이르다. 국가가 보장하는 공적 연금이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만약 연금을 지급 중단한다고 하면 엄청난 반대 시위와 함께 그 정권의 정치생명은 끝일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또한 국민 연금은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의 투자 자산을 가지고 있는데, 연금 지급을 위해 단시일 내에 가지고 있는 수 백조의 자산을 현금화한다면 시장에는 큰 충격이 올 것이다. 


때문에 정부는 2060년 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금 고갈을 늦추고 새로운 방안을 도입할 것이다. 아마 국민연금의 운영 방식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는데, 적립한 연금이 점차 소진되면서 점진적으로 독일을 비롯한 다수의 나라들이 채택하는 부과식으로(연금을 쌓아두지 않고 상황에 맞게 매년 경제활동 인구에게 돈을 걷어서 노인층에게 연금 지급)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장기화된 저출산과 고령화 흐름 속, 정부가 인구조절을 위해 안락사를 은근히 장려하는 상황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수 십년 뒤에는 "삶의 종착역 죽음. 당신이 행사할 수 있는 아름다운 권리입니다.", "열심히 산 당신, 무덤에서 편안히 쉬십시오"와 같은 캠페인이 공영방송에서 버젓이 나오는 상상을 해본다.  


어느 쪽이 됐든지 보험료를 더 내거나 연금을 덜 받거나 혹은 나중에 받는 식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 및 후세 사람들의 조세 부담은 점점 더 커질 전망이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 중 하나는 출산율을 늘리는 것이지만, 현 사회 구조하에서 출산율 장려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치인들은 폭탄 돌리기 하는 심정으로 이 껄끄러운 문제를 다음 정권으로 떠넘기고 싶겠지만, 시기의 문제지 기금이 고갈되기 전 국민연금개혁의 순간은 언젠가 반드시 온다. 

국민연금 고갈 및 인구변동 추이

민간 연금도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국민연금은 물가의 상승분을 반영해서 연금을 지급하지만, 민간연금은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그마저도 국민연금 대비 수익도 낮고 튼튼한 안전망이 될 수 없다. 결국 노후 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야 할 공적연금이 현재 젊은 세대 및 후세에게 주는 효용은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잉여 인간의 대량 양산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거 버그는 2017년 모교 하버드 축사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그는 기본 소득제를 주장하며 “세대와 목적의식”이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는데, 약 30분가량의 축사를 일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거 부모님 세대가 졸업할 당시에는 목적의식은 직업이나 교회 공동체 등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과 자동화는 많은 직업을 없애고 있고 공동체와 소속감은 줄어들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단절과 우울을 느껴 그들의 삶으로부터 회피하려 한다. 앞으로 우리 세대가 계속 전진할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단순한 일자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새로운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평등을 재정의함으로써 모두가 목적의식을 추구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
- 마크 주커버그 하버드 졸업 축사 中- 


마크의 축사가 끝나자 하버드 졸업생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나왔다. 목적의식을 갖자는 취지에 공감하고, 마크의 주장도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장 무서운 건 저런 이야기를 하는 IT기업들의 리더들이다. 마크는 이용자들의 정보를 광고주들에게 비싸게 팔아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구글, 아마존과 더불어 그 어떤 기업보다 AI투자에 열을 올리며 인간의 상품화에 앞장서고 있는 페이스북의 리더다. 아마 그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 및 늘어나는 기대수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가지지 않은 상태(은퇴 혹은 실업)에 장기간 머물면서, 삶의 목적의식을 가지지 못한 수많은 잉여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전통적으로 노동은 인간에게 삶의 동기 부여 및 목적의식을 함양하는 역할을 했다. 직업은 곧 그들의 정체성이며, 사회화 과정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도 이름과 더불어 직업을 말한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에서 이름을 전부 외우기 힘든 경우, 보통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직업을 통해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만약 직업이 없다면 무엇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을까. 모두가 치킨집 사장님으로서 정체성을 갖기에는 이미 한국의 치킨집 사장님은 너무 많다.


노인들이 최대한 오래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이미 일본은 울트라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며 노인들이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쿄의 택시 기사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백발노인들이다. 문제는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대개 진입장벽이 낮은 단순한 일이라는 점인데, 이마저도 자율주행차와 같은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노인들이 일할 수 있는 단순 업무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결국, 점차 길어지는 인간의 삶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지면서 우리는 삶의 목적의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다소 무거운 고민을 해야만 한다. 즉,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알베르 카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성찰 및 삶의 철학이 명확히 확립돼 있어야 하는데, 대다수의 현대판 노예들은 먹고사니즘에 빠져 이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 채 잉여인간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의 예를 보자. 가령, 고용주가 당신에게 주당 초과 근무를 60시간 하는 조건으로 현재 연봉의 두세 배를 제시했다고 상상해보자. 현행 근로기준법은 1일 8시간 주당 40시간으로 정해져 있는데, 여기서 60시간을 더 일한다는 것은 주당 100시간을 노예처럼 일해야 함을 뜻한다. 만약 이런 선택의 상황에 놓여있다면, 당신은 기꺼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주당 60시간의 초과근무를 받아들일 것인가? 만약 거절한다면, 당신은 그 시간에 돈보다 의미 있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돈을 포기해가면서까지 당신이 지켜야 할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만약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다면, 부디 진지한 고민 해보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생각보다 오래 살고 일찍 은퇴하면서 무얼 할지 몰라 생기는 참을 수 없는 공허함과 혼란을 느끼게 될 테니까. 나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과거엔 “젊을 때 바짝 고생하는 셈 치고 돈이나 벌자”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돈을 택했겠지만(실제로 과거에 주당 100시간 일했지만 아무리 초과 근무해도 부자가 될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야근으로 낭비한 아까운 내 젊음) 지금은 단호히 거절할 수 있다. 과거보다 현재 통장 잔고가 조금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시간에 절실히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스템이 부여한 수많은 바코드 중 하나가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실존하기를 원한다. 비겁하게 자신을 속이고 시스템에 길들여지는 것을 합리화하지 않기를 바란다. 때때로 파괴되고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한다. 한편 나는 보통의 존재로서, 모호해지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 속 점차 인간성을 잃고 시스템의 작은 부품으로 전락하는 보통의 사람들에 연민을 느낀다. 이들의 가슴에 자유의 불을 지피는 프로메테우스의 출현을 고대한다 (설령 그 주인공이 내가 아니어도 좋다!). 글쓰기를 통해 내 우주를 표현하고, 이것이 영감의 씨앗으로 퍼져 위대한 변화를 만들기를 바란다. 보다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고, 또 이러한 개별성이 존중받는 관용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지구별 후손들이 정답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알베르 카뮈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자 마크가 이야기한 삶의 목적이고, 글쓰기는 단지 그것을 실현할 수단이다. 어떤 이에게는 컴퓨터, 게임, 만화, 봉사, 교육, 신앙 등이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으며 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처럼 뚜렷한 삶의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제약하는 것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고문이다. 설령 내가 100세, 500세까지 산다고 해도 꾸준히 하고 싶은 일이 있기에 나는 삶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시스템에 충성하고 복종하면 자신의 인생을 무덤에서 요람까지 안정적으로 책임져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늘어나는 기대수명은 건강의 초양극화를 초래하고, 노인들을 부양하기 위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비용 속 연금의 효용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전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면서, 삶의 목적을 직업 이외에 찾지 못한 사람들은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잉여 인간으로 살아야 할 위험에 처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현대판 노예들은 시스템이 만든 먹고사니즘의 쳇바퀴에 빠져 생산-소비 이외에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할지 모르는 듯하다. 비약적으로 인간 수명이 늘어나는 것은 현대판 노예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에 대비해 우리는 자신만의 확고한 삶의 가치를 정립해야만 한다. 여러분도 알베르 카뮈의 회초리 같은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마크 주커버그의 하버드 연설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0yp42P9zj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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