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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원시인의 시간으로

바쁨의 파괴 #5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은 아버지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바로 자신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 이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이며, 팀은 자유자재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팀은 현실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모험을 하지만, 과거의 작은 변수에 의해 예기치 못한 상황이 초래됨을 목격하고 시간여행 남용을 자제한다.

어바웃타임.jpg 영화 <어바웃 타임>

한편 팀의 아버지는 팀에게 행복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다면, 하루를 똑같이 다시 살아보라는 조언을 하고 임종한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팀. 직장에서 상사에 깨지고, 편의점에서 바쁘게 끼니를 때우고, 지하철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음악을 듣는 남자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채로 퇴근을 한다. 그러다 문득 팀은 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리고 다시 하루를 살아보기로 한다. 하루를 다시 보내며 팀은 자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직장에서 여유롭게 농담을 건네고, 편의점 직원을 친절히 대하고, 지하철 옆자리 남자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리듬을 탄다.


팀이 똑같이 바쁜 일상을 살았지만, 첫 번째 하루와 두 번째 하루에서 전혀 다른 행복감 및 만족도를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팀의 삶이 바쁨의 지배를 당했는지 여부와 관련 있다. 첫 번째 하루에서, 팀은 바쁨에 치여 어떠한 삶의 향기도 맡지 못한 채 시간의 터널에 내던져진다. 이런 삶은 “나”라는 존재는 소멸하고, 바쁨이 지나간 공허함만 남을 뿐이다. 반면 두 번째 하루에서 팀은, 바쁜 일상 속 소소하지만 보석 같은 순간들을 포착하고 행복을 느낀다. 팀은 현재를 온전히 만끽하고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 이런 삶을 사는 주체는 바쁨의 지배로 인한 자가 소멸을 용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쁨의 기어를 조절하고, 삶을 주도적으로 통제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마치 팀의 첫 번째 하루처럼 많은 현대인들은 바쁨의 사역 때문에, 향기 없는 삶을 살며 자기 자신을 시간의 터널에 내던진 채 자가 소멸하고 있다. 불과 몇 세기에 걸친 훈육을 통해 형성된, 미래에 대한 현대인의 시간관은 더 많은 현재의 희생을 요구하며 삶을 점점 가속화시킨다. 바쁘게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 잘 살고 싶어서, 행복하고 싶어서, 삶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와 같은 이유가 아닌가? 그런데 바쁨의 주체가 불행하다면, 고통스러운 바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삶의 만족감이 떨어진다면 대체 바쁜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건지, 바쁨에 치여 “살아지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면 그것이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난 몇 세기 간, 인류는 시간의 초점을 과도하게 미래에 맞추며 전진했다. 미래를 위해 더 생산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며 우리는 점차 바쁨의 출력을 극대화했다. 바쁨의 기어가 맹렬히 돌아가는 사이, 우리는 기계처럼 변해가는 자신과, ‘너무나 바빠서 잃어버린 것들’을 감당해야 했다. 과연 우리에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해서 바쁨이 심화됐는가? 아니다. 겨울이 오면 봄이 왔고, 낮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떴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정했다. 다만, 변한 것은 우리의 정신이 바쁨에 강박적인 상태로 개조되었을 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시인의 시간이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원시인의 시간은 만성적인 바쁨이 존재하지 않는 여백의 시간이요, 원형의 시간이다. 원시인의 시간관은 현재에 맞춰져 있으며, 이들은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고 미래에 대한 초조함으로 현재의 순간을 희생하지 않는다. <어바웃 타임>의 팀이 두 번째 하루에서 여유를 가지고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처럼, 이들은 순간을 만끽하는 영원한 현재를 산다. 우리는 잃고 있는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원시인의 시간으로 회귀해야 한다. 미래에 치우쳐진 시간의 초점을 조금씩 현재로 돌려야 한다.


물론 현실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관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왜 시간에 쫓기는가>의 필립 짐바르도는 시간관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습득되는 것이고, 훈련에 의해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참이다. 나는 한 때 지독히도 미래지향적인 인간이었고, 바쁘게 사는 것을 미래에 대한 투자이자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바쁨으로 잃고 있는 것과 더불어 현재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고, 절실히 변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 의식적으로 나쁜 바쁨을 걷어내고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균형 잡힌 시간관을 가지게 됐다고 자부한다.


시간관의 조절에 대한 한 가지 팁이 있다면, 생애주기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보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보통 인생이 무척 길 것이라 생각하고, 미래의 생존에 대한 믿음은 불안과 바쁨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만약 삶이 유한하다면? 일주일 후 불치병에 걸린다면? 이상기후로 지구가 멸망한다면?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됐다면? 이런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순간, 시간관의 초점은 살아있는 현재에 맞춰지며 나쁜 바쁨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한 번 사는 인생이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자각한다면, 누구나 바쁨에 치여 자신을 잃는 것이 얼마나 해롭고 무의미한 것인지 깨달을 것이다. YOLO(You Only Live Once)는 이런 가치관을 잘 나타낸다.


나는 우리가 바쁨의 추격에 떠밀려 획일적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닌, 각자의 시차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재를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침의 태동을, 오후의 나른함을, 저녁노을이 선사하는 황홀함을 온전히 느끼길 바란다. 가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볼 여유를, 밤하늘의 별을 세어볼 여유를,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밥 한 끼 함께할 여유를, 오래된 친구에게 이따금 안부를 묻는 여유를, 아이의 천진함에 미소를 보낼 여유를 가지길 바란다. 부디 미래만 바라보고 바쁘게 달리느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현재를 가벼이 지나치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톨스토이의 어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인간은 오직 현재의 순간만을 살고 있을 뿐이며, 그 밖의 생애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임을 잊지 마라. 인간의 삶은 한순간에 불과하며, 머물고 있는 곳은 지구 상의 한 모퉁이일 뿐이다.

- 톨스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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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쁨에 관한 거의 모든 것' 매거진은 이것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바쁘게 사는 분들이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합니다. 추후 자세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새로 매거진을 개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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