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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r 01. 2018

<인간실격>- 가면 권하는 사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넷플릭스 <블랙미러> 시리즈 중, <추락> 에피소드를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셜미디어의 평판에 근거해 사회생활을 하는 세상.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평점을 매길 수 있다. 평점에 따라 계층이 나뉘고, 사람들은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항상 웃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주인공은 높은 평점을 얻어 고급 아파트 분양 할인을 받기 위해, 상류층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한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주인공의 평점은 수직 낙하한다.

<블랙미러> 시리즈 <추락> 에피소드

우리는 가면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학교, 직장 및 모든 일상에서 사람들은 가면을 쓴 채, 서로를 속고 속인다. 연기를 하는 것이 불편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산뜻하고 명랑한 척 연기를 해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심지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미투 운동의 가해자들이 멀쩡히 가장 노릇을 해온 것을 보면, 가장 가까운 가족끼리도 가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추문이 밝혀지기 전, 가해자들은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의 가면을 쓰며 충실히 역할을 수행했을 테니. 이런 위선자들은 참을 수 없는 구토를 유발한다. 

 

나는 살면서 이런 위선과 가식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삶이 어쩌면 연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속,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시기적절하게 가면을 바꿔 쓰는 지독한 연기. 마치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에 나온 다음의 대사처럼 말이다. "온 세상은 무대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입니다. 그들은 등장했다가 퇴장하고, 어떤 이는 여러 가지 역할을 맡기도 하지요"


사람들이 가면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가급적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며,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을 얻기 위함이다. 또한 타인에게 미움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가면 권하는 사회가 돌아가는 원동력이다. 탄생 이후 상당기간 동안 부모의 정성 어린 사랑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은, 애초에 미움받고 거절당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느낀 것은 미움받는 것이 두려워 모두를 만족시키려 할 때, 유일하게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본인 자신이라는 점이다. 억지로 남들 비위 맞춰가며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자신을 갉아먹는 일인지!


그래서 가면을 벗고 최대한 솔직하고 나다운 모습으로, 자유롭게 사는 삶을 지향하려 하는데 정말 쉽지 않다. 특히나 한국에서 가면을 벗는 것은, 대단한 담력이 요구되는 반항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게 가면을 벗으면 안 될까?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을 표현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건데. 본인의 솔직한 모습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즐거움을 나누기에도 인생이 너무 짧은데.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면을 권하나. 구역질 나는 가식과 위선의 종식과,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파놉티콘 감옥의 붕괴를 진심으로 바란다.

  

++ <인간 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는, 가면 권하는 인간사회에 너무나 질려버린 순수한 영혼이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가식과 위선에 대한 생각이 나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점에 전율을 느끼며, 여러 구절에 밑줄을 박박 긁었던 기억이 있다. 그가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편하게, 본인다운 모습으로 편하게 쉬고 있기를 바란다.


https://youtu.be/vwhWWUAvXp0

<인간 실격>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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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발견

치욕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의 관념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관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저는 그 불안감 때문에 밤마다 뒤척이며 신음하다 심지어는 미쳐 버릴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광대 짓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러면서도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 (無)야. 바람이야.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일시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남들한테 호감을 살 줄은 알았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결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긴 저는 이 세상 인간들에게 과연 ‘사랑’하는 능력이 있는지 어떤지 대단히 의문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이제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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