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사랑에 국경이나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들 하지만, 한국에선 나이가 여전히 중요한 듯하다. 이성을 처음 만날 때, "뭐하세요?" 혹은 "어디 사세요?" 만큼이나 빈번하게 물어보는 질문이 "몇 살이세요?"이다. 사랑의 조건에 연인의 나이가 포함된 사람은, 상대방이 여기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이성에게 '잠재적 연애 상대' 등급을 부여할지 말지를 빠르게 판단한다. 그나마 요새는 시대가 변해서 연상녀-연하남 커플이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오빠'가 '자기'만큼 커플 간 자주 사용되는 호칭인 것을 보면, 한국에선 아직 연상남-연하녀 커플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정말 사랑에 나이가 중요할까? 나이 많은 사람이 사랑에 있어서 반드시 더 성숙하고 이해심이 많을까? 물론 연상의 연인에게서 '능숙함'을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나이와 그 사람의 인격 및 사랑의 성숙도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의 안경을 쓴 채 집요하게 상대 이성의 나이를 캐묻는 사람들을 보면, 영화 대사가 떠오른다.
뭐시 중헌디
한편, 사강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연인들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유로운 연애관을 가진, 여자관계가 복잡한 40대 로제. 그를 사랑하지만, 로제의 잦은 부재로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느끼는 30대 폴. 그리고 그런 폴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혈기왕성한 20대 청년 시몽. 남녀 삼각관계를 다루는 이 책이 그저 그런 통속 소설 중 하나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는, 결코 낭만적인 동화같지만은 않은 어른들의 사랑이야기를 탁월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점은, 제목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가 아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정할 것을 사강이 고집했다는 것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시몽이 폴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던 작업 멘트인데, 왜 그녀는 물음표가 아닌 줄임표를 썼을까? 해석은 자유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시몽은 귀여운 연하남이 부리는 당돌한 교태가 아니라, 진중한 남자로서 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브람스 공연을 계기로 둘의 사이가 가까워진 것을 보면 시몽의 수줍은 구애는 성공한 듯 보인다.
사강은 사랑의 권태 및 세 남녀의 심리에 대해서 무척 섬세하게 묘사했는데, 당시 이 책을 출간했을 때 그녀의 나이가 24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 놀랍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로 유명한 그녀는, 실제로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며 많은 남자를 만났다.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두죠.”
https://www.youtube.com/watch?v=rKX6ak8P6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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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발견
오늘 밤도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그녀에게는, 사람이 잔 흔적이 없는 침대 속에서 보내야 하는 외로운 밤들의 긴 연속처럼 여겨졌다.
“난 자유로운 남자야.”라는 자신의 마지막 말이 그를 좀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라는 뜻이었다. 그는 엑셀을 밟았다. 가능한 한 빨리 폴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만이 그를 안심시킬 수 있었고, 그녀는 그렇게 해줄 것이었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고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했던가?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시몽은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중간쯤에서 몸을 휘청하더니 그녀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 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빼더니 짐을 놓아둔 채 나가 버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가 난간 너머로 몸을 굽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