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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y 09. 2018

<이방인> - 반항하는 인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창세기에 의하면, 한 때 아담과 하와는 신에게 순종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축복의 땅 에덴동산에 살았다. 신은 이들에게 풍요와 영광을 제공하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엄격하게 금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먹으면 선과 악을 구분할 능력이 주어지는 선악과였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금기를 깬 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이것이 인간이 신에게 반항한 최초의 '인간다운' 행동인데, 종교계에서는 이것을 인간의 원죄로 설명한다. 


'반항'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느낌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다. 학교에서 반항아는 문제아와 동일시되고, 반항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반항하는 인간은 규율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려 하지만, 이것은 집단의 통합과 안정에 해악이 되기 때문이다. 대량생산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며 두드러진 현상은, 반항하는 사람이 사실상 거대한 톱니바퀴 속 불량품 취급을 받으며, 세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기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반항하는 인간은 한편으론 지극히 '인간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상품을 넘어 인간마저 표준화된 근현대 사회에, 반항하는 인간만이 고유의 독창적인 인간성을 보존한다. 이들은 반항을 통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 하지만 본인의 자아를 손상시키는 - 온갖 작위적 장치를 거부한다. 이들은 위선과 거짓을 경멸하고, 인간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에 맹렬히 저항한다. 또한, 반항하는 인간은 권태로 뒤덮인 삶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들은 부정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긍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마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 이를테면 아침의 커피, 오전의 업무, 한 시간의 점심, 다시 오후의 업무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 속에서, 자신이 속한 곳이 갑자기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문득 '대체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라는 존재에 이물감이 느껴지고, 세계로부터 단절되는 기분. 이때, 인간은 거대한 부조리와 맞닥뜨리고, 자신에게 마련된 숙명에 '꿈틀' 하며 반항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반항하는 인간은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는다. 이들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자율성을 시험하며, 필사적으로 존재하려 한다. 이들은 도덕의 한계 내에서 반항하며, 그 속에서 자유와 열정을 느낀다. 이때 차원 높은 수준의 반항은, 개인적 고독을 승화하여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접하는 부조리는 상당 부분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며, 이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 반항하는 인간들은 연대를 통해 부조리에 저항하고, 유쾌한 변화를 이끌어 낸다.


<이방인>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책에 등장하는 "뜨거운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주인공 뫼르소는, 문학작품 역사상 가장 기이한 인물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외로이 반항하는 인간을 자처함으로써, 부조리에 맞서 '실존'을 실천한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자 알베르 카뮈가 주장한 다음의 명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sBFZSkAknG4

<이방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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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이야기는 주인공 뫼르소가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수롭지 않게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뫼르소.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의무감에 치르고, 고인의 지인들은 그의 무정한 모습에 경악한다. 그는 모친상을 접한 자식에게 사회적으로 마땅히 요구되는 감정 - 이를테면 슬픔, 후회, 안타까움 등 - 을 억지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애인과 평소처럼 데이트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낸다.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초연한 태도는 다음의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 일만 없다면 산책하기에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뫼르소의 지나친 솔직함은 그의 연인 마리와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의 확인 및 결혼의 약속을 요구하는 연인의 물음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보통 사탕발림 같은 말이나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거침없이 그의 솔직한 생각을 말한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 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게다가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쪽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다. 


한편, 뫼르소는 이웃집에 살고 있는 레몽과 어울리다 그와 함께 알제리 별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아랍인들과 시비가 붙고, 뫼르소 일행은 칼을 맞고 상해를 입는다. 이후, 다시 혼자서 해변을 어슬렁거리던 뫼르소. 그는 우연히 예전에 시비가 붙었던 아랍인과 마주치는데, 뜨겁게 뇌리 쬐는 햇빛에 현기증을 느낀다. 당시 뫼르소의 심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핏대가 한꺼번에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걸음, 다만 한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 사람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을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비칭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번쩍거리는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결국, 뫼르소는 뜨거운 태양을 참지 못하고 권총으로 아랍인을 쏜다. 한 발, 잠시의 휴지 그리고 연이은 네발의 총성. 그는 충동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인범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불을 비 내리듯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피스톨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야기의 후반부는, 뫼르소가 체포되면서 재판을 받는 내용이다. 뫼르소는 옥살이를 하면서도 특유의 담담한 태도로 일관하고, 형량을 줄이기 위해 그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 재판받을 때, 범행 동기를 묻는 물음에 그는 "뜨거운 태양" 때문이었다는 엽기적인 답변을 한다. 판사와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보였던 비인간적인 태도를 비난하지만, - 재판의 본질인 아랍인 살인과는 무관하게 - 뫼르소는 이에 동요하지 않는다. 


한편,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던 뫼르소가 자신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러 온 신부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뫼르소는 기도를 하는 것이 자신의 정직과 신념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신부를 질책한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신부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버렸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지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으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 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 ...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너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고집스럽고 반사회적인 태도로 인해, 뫼르소는 판사와 배심원들의 동정을 얻지 못하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는다. 표면적으로 뫼르소는 참으로 괴벽스러운 사람이다. 뫼르소는 달콤한 거짓과 가식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지나치게 정직한 인간이자, 위선적인 인간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다. 그는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실존을 실천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은 뫼르소가 비장하게 내뱉는 다음의 독백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그의 철학을 <시지프 신화>에서 자세히 밝혔다. 그는 반항하는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사형수 신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삶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부조리에 떳떳이 반항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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