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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Jun 26. 2018

죽기 직전에 후회하는 것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두려움은 소유욕과 관련있다.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인간이 느끼는 거의 모든 종류의 두려움의 원인이다. 예를 들어, 생존에 대한 두려움, 상대방으로부터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경제적 두려움, 명예가 실추될 수 있다는 두려움 따위는 모두 상실, 소멸, 잃어버림, 사라짐 등 '소유의 부정성'과 연관이 있다. 그런데 여러 유형의 두려움의 대상 중에서도, 무척이나 보편적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생물이 가진 공통적인 속성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생의 마침표이자 자연으로 돌아가는 외로운 시간인 죽음. 인상적인 것은 인간을 비롯한 소수의 고등동물만이 죽음의 보편성에 대해서 이해하고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이다. <부정 본능>의 저자 아지트 바르키는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부정하는 심리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초기 인류는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죽음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을 제어하고자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고유한 능력을 진화시켰고, 이는 거대한 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부정 본능'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고대 인도 문학인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를 보자. 다섯 명의 판다바 형제들이 사냥을 떠나는데, 목이 마른 탓에 물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때 만나게 된 야차는 그 형제들에게 몇 가지 질문에 답하기 전에는 물을 마시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형제들은 이를 무시하였다가 차례로 죽고 만다. 마침내 홀로 남은 맏형 유디슈티라가 야차에게 자기 형제들을 살려 달라고 청한다. 야차는 이번에도 질문을 던질 테니 답을 모두 맞히면 그 요청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야차가 무엇이 가장 놀라운 일이냐고 물었고 유디슈티라가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사람들이 죽는데,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란 죽을 운명임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고 일하고 놀고 앞날을 계획하는 등 마치 우리가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여깁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산업화된 국가의 시민이라면 십중팔구)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죽음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마치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재산을 모으고 바쁘게 살며 죽음을 향해 달린다. 이들은 '지금 여기' 가 아닌 과거나 미래에 살며, 이들의 삶의 주된 양식은 존재가 아닌 소유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부정은 시간과 관계의 밀도 저하로 이어진다. 즉,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지 못한 자는 자신에게 마련된 시간과 주변 관계에 대해 어떠한 소중함이나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삶의 부분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온전한 존재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이나 본인이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것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본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명징한 인식을 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탄생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로 귀결되는 인간의 숙명은 더없이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생이 고통스럽다면 죽음을 앞당겨 자살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이와 관련,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 남긴 다음의 구절은 바람직한 삶의 태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에 반항하여 삶에서 최대한의 열정과 자유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직분이라는 것이 카뮈의 생각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을 주제로 한 이야기로, 톨스토이의 단편 중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를 받는 역작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 장면은 톨스토이가 마치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이다. 그는 책을 통해 삶의 허무함, 고통스러운 죽음, 진실되지 않은 사람들 등을 보여줌으로써, 무엇이 바람직한 삶인지 독자들에게 묻는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을 체험해보는 놀라운 일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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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이야기는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고인을 조문하기 위해 모인 지인들. 하지만 그의 죽음에 진심으로 비통해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의무감으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안도한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듯이 그들도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 그들 각자는 이렇게 생각하거나 그런 느낌을 가졌다. 그런 생각 중에서도 고인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이른바 이반 일리치의 친구라는 사람들이 또 생각한 것이라고는 이제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추도식에 참여해서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 등 아주 귀찮은 의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떨떠름한 사실이었다. 


‘사흘 밤낮을 끔찍하게 괴로워하다 죽었다. 언제든지, 지금 당장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서늘한 두려움에 순간 몸서리쳤다. 하지만 곧바로 그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그건 이반 일리치의 일이지 자신의 일은 아니다, 자신에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아내조차도 그의 죽음에 진정으로 슬퍼하기보다는, 국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받을지에 골몰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지인들의 태도를 보면, 그의 삶이 그리 바람직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 국고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녀는 연금 문제에 관해 뾰뜨르 이바노비치에게 조언을 구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심지어 그도 잘 모르는 것 까지 훤히 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렇게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 국고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는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뜯어낼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것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지 열심히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다가 예의상 그저 우리네 정부가 하는 일이 다 그렇게 인색하다며 탓하고는 더 이상은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미망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제 어떻게 이 조문객으로부터 벗어날 것인지 궁리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그는 담배를 눌러 끄고 일어서서 손을 한 번 잡아주고는 다른 방으로 건너왔다. 


작가는 이반 일리치의 삶을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면서 지극히 끔찍한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대체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정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명석하고 처세에 능한 이반 일리치는,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마땅히 기대되는 역할을 무난히 수행했다. 그는 항상 남들의 인정을 갈구하고, 상류층을 동경하며 자랐다. 대학에 진학해 법관이 된 그는 특유의 처세술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은근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이반 일리치의 지나온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면서 지극히 끔찍한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마흔다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관리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정부의 여러 부서와 보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리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출세란 보통 어떤 중요한 직무수행 능력을 딱히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저 오래 그 일을 해왔고 직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나 커서나 아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처럼 어려서부터 사교계의 최고위층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려 그들의 습관이며 세상을 보는 시각을 그대로 따라 배우며 그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갔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는 마음을 빼앗기로 열중한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특별히 결정적인 영향을 남기지는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버렸다. 한때는 연애 감정이나 허영심 같은 것에도 빠져보았고 졸업할 무렵의 고학년 시절에는 자유주의적 성향에 젖어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마음속에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인정되는 일정한 한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괜찮은 직장을 얻은 이반 일리치가 다음으로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것'은 결혼이다. 그가 여자를 고르는 기준은 사랑보다는 조건인데, 그는 마침 괜찮은 조건의 양가집 규수를 만나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결혼을 할 때조차 이반 일리치가 남들의 시선 - 정확히는 상류층 - 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면, 그의 인생의 기준은 항상 자신이 아닌 타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쁘라스꼬비아 표도르보다는 훌륭한 귀족 가문의 아가씨로 미모가 빼어나고 많진 않지만 재산도 좀 있었다. 이반 일리치로서는 좀 더 화려한 결혼 상대를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녀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이반 일리치에겐 봉급이라는 수입원이 있었고 그녀도 그 정도의 재산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집안도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녀가 사랑스럽고 예쁘고 아주 괜찮은 여자였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신부가 될 여자를 사랑했고 인생관에서 서로 공감하는 바가 있어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바른말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부추겨서 결혼했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결혼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서였다. 우선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어 자만심이 채워졌고, 동시에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일을 행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달콤한 신혼도 잠시, 이반 일리치의 결혼생활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아내는 임신 후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이반 일리치는 그녀의 과민반응이 자신의 '품격'을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계속되는 아내의 간섭과 잔소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이반 일리치가 선택한 것은 일이다. 바가지를 긁는 아내가 유일하게 침범하지 못하는 성역은, 남편이 돈을 벌어오는 일터다. 머리 회전이 빠른 이반 일리치는 이 점을 일찍 간파하고, 점점 더 일에 파묻힘으로써 복잡한 가정생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부부간 사랑이 넘치고 가구며 그릇이며 침구며 도는 것이 새로웠던 신혼 시절은 아내가 임신하기 전까지는 너무나 좋았다. 이반 일리치는 항상 품위 있게 사교계에서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삶의 아주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혼 초기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그런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생활을 깨뜨리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더욱 깊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가 임신하고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불쾌하고 힘들고 별로 품위도 없는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어떻게 벗어날 도리도 없는 그런 사태였다.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 아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삶의 유쾌함과 품격을 ‘제멋대로’ (그는 프랑스어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질투하는가 하면, 자기에게만 신경을 써달라고 매달리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거칠고 불유쾌한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더 집요하게 매달릴수록 이반 일리치는 점점 더 생활의 무게중심을 자신의 직무로 옮겨갔다. 그는 더욱더 일에 빠져들었고 명예욕도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아주 일찍부터,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못해 이반 일리치는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삶에 편리함을 주는 점이 일부 없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힘겨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품위 있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직에서와 마차가지로 결혼생활에서도 일정한 원칙을 세워 지켜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생활에 대해 자기 나름의 태도를 확립했다. 그는 가정생활에서 아내가 해줄 수 있는 것으로 따뜻한 식사와 집안 관리, 잠자리 등 딱 세 가지 편의사항만을 기대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보기에 겉으로나마 가정의 품격을 잘 지켜가는 것이었다. 그 외에 조금이나마 즐겁고 유쾌한 일이 있을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만일 이 세 가지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거나 불평이 생기면 그는 그 즉시 자신만의 고립된 일의 세계에 파묻혀 거기서 보람을 찾았다.  


한편, 일한다는 핑계로 가정생활을 어느 정도 면책받은 이반 일리치는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이미 괜찮은 수준의 돈을 벌고 있는 그이지만, 아내의 불평불만과 사치스러운 소비로 인해 그의 재정상황은 빠듯하다. 그는 언제나 상류층을 준거집단으로 삼아, 자신의 삶과 그들의 생활양식을 비교하곤 불만을 느낀다.


사람들은 연봉 3500 루블을 받는 그의 지위를 보고 그만하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아주 보이 많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 터무니없는 부당한 처우와 끝없이 이어지는 아내의 불평불만, 그리고 분수에 넘친 생활을 하면서 늘기 시작한 부채 따위를 아는 사람은 그 자신 뿐이었다. 그의 처지가 결코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 뿐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 그는 아내와 처남의 만류를 뿌리치고 뼤쩨르부르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직 연봉 5000의 자리를 얻어내는 것, 그것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부서가 어디든, 업무의 성격과 종류가 무엇이든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연봉 5000 루블만 보장된다면 관청이든, 은행이든, 철도 관련 부서든, 마리아 여제 귀족 여학교든, 세관이든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를 몰라주는 현 직장에서 즉시 떠날 수 있고 5000 루블의 봉급만 받을 수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 신분이 높은 신사숙녀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만찬을 벌이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자기 집 응접실이 그 사람들의 응접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으며, 그리고 자신도 그들과 다름없이 똑같이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며 흡족해했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생은 완벽해 보였다.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가정, 판사로서의 커리어 그리고 적당히 원만한 대인관계.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그때,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다. 옆구리의 통증은 점점 악화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지만, 그의 고통을 알아주는 이는 없다.


옆구리의 통증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며 갈수록 심해지더니 이제는 잠시도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입안에서 점점 더 이상한 맛이 났고 역겹고 이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 것 같아 식욕도 떨어지고 기력도 현저히 악화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뭔가 무서운 일이, 이반 일리치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런 심각한 일이 그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 뿐이었고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세상사가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점이 무엇보다 이반 일리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집안 식구들, 특히 당시 사교계에서 한창 절정을 구가하고 있던 아내와 딸은 그의 고통을 알아주기는커녕 왜 그렇게 음울하고 까다롭게 구는지 화내며 그를 탓하는 것이었다.  


슬픔의 5단계는 '부정 -> 분노 -> 우울 -> 협상-> 수용''이다. 이반 일리치는 발병 초기에 자신의 죽음을 부정한다. 하지만 고통이 심화될수록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 두려움에 빠진다. 특히 건강한 다른 사람들이 전혀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왜 자신에게만 이런 비극이 생기는지에 대해 깊은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다.


‘내가 없다는 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가? 내가 없어지면 그럼 난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정말 죽음인가? 아니야, 죽고 싶지 않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초를 찾다가 촛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베개 위에 쓰러지듯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불을 켜서 뭐해? 다 마찬가진걸.’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두 눈을 크게 떠 어둠 속을 응시했다. ‘죽음, 그래 죽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즐겁게 놀기나 하는구나. (문 저쪽에서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반주 소리가 흩어져 들려왔다) 다 마찬가지다. 저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너희들은 좀 나중일지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즐거울까. 짐승 같은 놈들!’ 그는 악에 받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통증이 밀려와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니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같은 특별한 존재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는 '품위 있게 연출해온' 자신의 완벽해 보이는 삶이 고작 병 때문에 끝나야 한다는 사실이 야속하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고통과 근심에 대한 방어기제로 그는 일에 더욱 몰두하기로 한다. 그는 일에 파묻히면 죽음의 그림자가 잠시나마 희미해지지 않을까 라는 헛된 기대를 한다.


이를테면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논법을 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바로 이런 명백한 사실이 카이사르에게만 해당되지 자신에게는 도무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카이사르는 인간이니까, 일반적인 인간이니까 당연히 그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 자신은 카이사르도 아니고 일반적인 보통 사람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남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거짓되고 병적이며 잘못된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내고 다만 올바르고 건강한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앞의 생각은 단지 생각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 있는 현실로 다시 눈앞에 나타나 버티고 섰다. 그는 어떻게든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생각들을 차례차례 불러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의지를 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차단해주던 이전에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그를 지켜주고 감싸주던 모든 생각들이 이젠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요즘 들어 이반 일리치는 대부분의 시간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막아주던 예전의 감정 상태로 회복하려는 노력에 할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일이나 하자, 그래, 난 일 때문에 살아왔잖아.’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그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된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다. 힘없는 병자가 된 이반 일리치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은 이제 그의 죽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하다. 거짓된 위로와 희망으로 이반 일리치의 고통을 외면하는 주위 사람들. 이반 일리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유대감을 느끼지 못한 채, 극심한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석 달 째로 접어들면서 이반 일리치의 병세는 아주 조금씩 서서히 악화되었기 때문에 딱히 어떻다고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언제 그가 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세상을 떠날 것인지, 그리고 언제 환자를 지켜보는 이 불편하고 갑갑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뿐이었다. 아내와 딸과 아들, 친지들과 하인들, 의사들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반 일리치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는 거짓이었다. 그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병이 들었을 뿐이고 안정을 취하고 치료만 잘한다면 곧 아주 좋아질 것이라고 모두들 뻔한 거짓말을 해냈다. 아무리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갈수록 심해지는 고통과 죽음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거짓말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고 이반 일리치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끔찍한 그의 상태를 감추려고만 했다. 게다가 이반 일리치마저 그런 거짓말에 동참하게 하려고 했다. 거짓말, 죽기 직전까지도 멈추지 않을 이런 거짓말, 이 무섭고 장엄한 죽음의 의식을 인사차 들렀다든지, 커튼이 어떻다든지, 오찬 자리의 철갑상어 요리가 어떻다는 따위의 일상의 사소한 것들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하는 이런 거짓말, 바로 이런 거짓말이 이반 일리치는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하고 싫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마다 ‘이제 그만 거짓말은 집어치워, 내가 죽어간다는 건 당신들이나 나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제발 이제 최소한 거짓말을 하지 말란 말이야’라는 절규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상하게도 그걸 내뱉지는 않았다. 그가 보기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의식을 그저 있을 수 있는 기분 나쁜 일, 특히 조금 품위가 없는 일 정도로 격하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평생 지키려고 애써온 ‘품위’라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을 직감하곤, 자신이 지나온 인생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그래도 한 때는 순수하고 진실한 면모가 있었던 어린 시절. 하지만 자라면서 그는 출세에 눈이 멀어 진실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는다. 특히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품위 있는' 삶이 잘못된 삶의 양식일 수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면서, 그는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가치관, 신념, 삶의 태도 등이 - 자신은 그동안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왔던 - 잘못됐다는 점에 깊이 좌절한다.


그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영혼의 목소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생각의 흐름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중략) ‘무엇이 필요하냐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고통조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시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사는 거라고? 어떻게 사는 거 말이냐?’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전에 살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지, 기쁘고 즐겁게.’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데?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나?’ 영혼의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그는 기억 속에서 이전에 즐거웠던 삶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에 좋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아주 어렸을 때의 추억을 뺴고는 모든 것이 다 그랬다. 어린 시절에는 다시 돌아간다 해도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그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의 추억인 것 같았다. 기억이 어린 시절을 지나 현재의 그, 이반 일리치가 존재하는 순간에 이르자 그 당시 기쁨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녹아내리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심지어 구역질 나게 역겨운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의 정신적 고통은 전날 밤, 광대뼈가 불거진, 게라심의 졸음이 가득한 선량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만약에 정말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이,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의심이 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에는 전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높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우고 싶었던 마음속의 어렴풋한 유혹들, 생각이 나자마자 신속하게 털어버렸던 그런 은밀한 유혹들, 어쩌면 바로 그런 것들이 진짜고 나머지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일과 삶의 방식, 가족, 사교계와 직장의 모든 이해관계도 다 거짓인지 모른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가 변호하려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허약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무엇 하나 변호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이반 일리치.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온 것을 반성하고 새롭게 무엇을 시작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는 평생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 기준을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정작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나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남아있는 시간이 없다. 그는 고통스럽게 병마에 저항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이 사흘 동안 이반 일리치에겐 시간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잡아 밀어 넣은 바로 그 검은 자루 속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을 뿐이다. 구원의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사형수가 사형 집행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강한 힘이 그의 가슴과 옆구리를 세차게 밀치는 것 같더니 숨을 쉬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는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구멍 끝에서 뭔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앞으로 가고 있는데 뒤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진짜 방향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이 순간 이반 일리치의 느낌이 그런 것이었다.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었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 어쩌면 아직, 아직 ‘그걸’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지?”  


“임종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죽음의 보편성과 진실된 삶이다. 인생은 짧다. 우리는 매일 어제보다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며, 노인은 언젠가 죽는다는 이 일반적인 진리를, 많은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남의 인생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이 들 지,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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