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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Jun 22. 2018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스포츠는 묘한 매력이 있다. 강인한 정신력, 의지, 협업, 우연성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현장에서 땀 흘리는 선수들의 모습은 관중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력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모습은 분명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스포츠가 인기 있는 이유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극적인 결과를 연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짜릿한 희열을 주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사람과의 경주에서 승리한 350마력 자동차에게는 그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인간이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도전'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스포츠 행사 중 하나인 올림픽의 구호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이다. 선수들은 4년 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국제무대에서 발휘한다. 올림픽의 묘미는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기록이 매번 경신되고 이변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올림픽의 기초 정신은 누가 승리했는지가 아닌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것이라는 점이다. 경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기자는 것이 올림픽의 원래 취지이다. 따라서 올림픽은 본디 모든 참여자가 즐기는 지구촌 축제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도전하는 숭고함을 기리고자 했던 올림픽 정신은 정치 선전에 이용되거나, 성과주의, 상업주의에 의해, 그 본래적 취지가 왜곡된 경향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이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고,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승리가 아니라 참가 자체에 의의가 있다.


한편, 스포츠가 도전하는 인간을 가장 극적으로 연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전은 비단 운동선수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익숙한 길과 가보지 않은 길을 마주한다. 다수는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 관성 때문에 가던 길을 가지만 소수의 용기 있는 사람은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한다. 도전을 한 사람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성공의 달콤한 과실을 맛보고, 다수는 실패의 쓴 맛을 본다. 역사는 도전한 사람들 중 생존한 이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변화의 기록이다. 도전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혁명가의 그것과 비슷하다. 성공하면 역사의 새 페이지를 쓰지만, 실패하면 없어져버리고 잊히는 것.  


그렇다면 실패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실패는 시행착오라는 터널을 지나 목적지로 도달하는 초기 단계이자, 성공의 발판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실패는 큰 교훈이 되기 때문에 장려할 필요가 있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는 모든 성공한 사람들이 쓰고 있는 왕관은, 실패를 질료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다.


성공과 실패 그리고 어중간한 평범함. 이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물론 성공이지만, 차악은 실패 그리고 최악은 평범함이다. 평범함은 곧 군중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자유를 위한 도전을 멈추고, 자신이 지닌 유일성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며, 자신에게 마련된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으로서의 직분을 소홀히 하겠다는 뜻이다. 더러는 청년이면서 이미 노인의 삶을 사는 반면 (혹은 죽어있거나), 어떤 사람은 노인임에도 청년의 삶을 산다. 이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도전이라는 도끼로 흠집 내고, 자신만의 형상으로 깎아나가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도전하는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한물 간 어부가 바다를 무대로 사투를 벌이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온갖 시련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의 육신은 노쇠했을지라도, 정신은 분명 혈기왕성한 청춘인 셈이다. 메이저리그의 슈퍼스타였던 요기 베라는"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 책에서도 유사한 의미의 명대사가 등장한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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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p0EzRKL8k5g


책 속으로

쿠바의 작은 어촌 마을.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상태다. 그를 따르는 소년 마놀린은 산티아고를 존경하지만,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인 살라오로 불리며, 무능력하고 한물 간 어부 취급을 받는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처음 사십일 동안은 소년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사십 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그에게 이제 노인이 누가 뭐래도 틀림없이 ‘살라오’가 되었다고 말했다. ‘살라오’란 스페인 말로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년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다른 배로 옮겨 타게 되었는데, 그 배는 첫 주에 큼직한 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다. 소년은 날마다 노인이 빈 배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늘 노인을 마중 나가 노인이 사려 놓은 낚싯줄이며 갈고리며 작살이며 돛대에 둘둘 말아 놓은 돛 따위를 나르는 일을 도와주었다. 돛은 여기저기 밀가루 부대 조각으로 기워져 있어서 돛대를 높이 펼쳐 올리면 마치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보였다.    


고기를 잡지 못한 지 85일째 되는 날, 산티아고는 언제나처럼 홀로 바다를 나가고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다. 하지만 힘이 센 청새치에 의해 노인의 작은 조각배는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그는 바다에서 3일 동안 청새치와 사투를 벌인다. 마침내 노인은 청새치를 작살로 죽이고 완전히 포획하는데 성공한다. 오랜 기간 별다른 성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낚시만을 생각하는 산티아고는 진정한 장인이다.


하지만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지금은 야구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한 가지 일만 생각할 때야. 그 일을 위해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가. 저 다랑어 때 주변에 어쩌면 큰 놈이 하나 있을지 몰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다만 먹이를 먹다 무리에서 뒤처진 낙오자 한 놈만 낚아 올렸을 따름이지.   


이때 인상적인 것은, 산티아고가 청새치에게 묘한 연민과 존경을 느끼며 그와 교감한다는 것이다.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마치 사람처럼 대하고, 그의 당당함과 강인한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자연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대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인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큰 고기가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록 연민의 정을 느낄지라도 고기를 죽이겠다는 결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저놈을 잡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배를 채울 수 있겠는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저 고기를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아냐, 그럴 자격이 없어. 저렇게도 당당한 거동, 저런 위엄을 보면 저놈을 먹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어.”


대어를 낚았다는 사실에 부푼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 산티아고. 하지만 기쁨도 잠시, 거대한 청새치의 살점을 노리는 상어의 습격을 받는다. 노인은 망망대해를 무대로 상어 떼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한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는 다음의 대사에 잘 드러나 있다. 이때, 패배와 파멸의 차이는 정신이 굴복했냐 안 했느냐의 여부이다. 예를 들어,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는 파멸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배는 굶주리고 재정상황은 열악해졌다. 하지만 그의 올곧은 정신만은 꿋꿋하게 좌절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산티아고는 거센 상어의 공격에 맞선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던 청새치는 상어들에게 물려 이미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이다. 노인은 청새치에게 위로의 말을 걸며, 상어 떼를 물리쳤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고기는 이제 반동강이가 되었구나. 한때는 온전한 한 마리였는데, 내가 너무 멀리까지 나왔어. 내가 우리 둘을 모두 망쳐 버렸어.”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너랑 나 둘이서 많은 상어를 죽이고 다른 고기들도 죽이지 않았느냐. 고기야, 지금까지 넌 얼마나 많이 죽였니? 대가리에 뾰족한 창날 같은 주둥이를 공연히 달고 있는 건 아니잖아.”   


결국 산티아고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어마어마한 대어를 낚고 바다에서 용감하게 상어와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바다에서 홀로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던 산티아고는 소년 마놀린을 보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다.  


“사람들이 나를 찾았니?” “물론이죠. 해안 경비대랑 비행기까지 동원됐어요.” “바다는 엄청나게 넓고 배는 작으니 찾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테지.” 노인이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노인이 물었다.      


기진맥진한 산티아고는 깊은 잠에 빠지고, 사자가 나오는 꿈을 꾸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노인이 거둔 허망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념과 도전하는 용기는 가히 밀림의 왕 사자와 견줄 만하다.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은 지독한 슬럼프에 시달릴 즈음이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 이후, 변변찮은 작품을 내지 못해 문학 평론가들은 그가 작가로서 생을 다했다고 혹평했다. <노인과 바다> 속 노인을 패잔병처럼 묘사하는 초기 대목에선, 헤밍웨이가 느낀 우울함과 무력감이 담겨있다. 하지만, <노인과 바다>는 출간 직후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그는 화려하게 문단에 복귀하며 노벨상을 받았다. 슬픔에 굴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노인의 모습에서, 헤밍웨이가 작품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도전하는 인간의 존엄함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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