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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몰락

바쁨 공화국 #4

한국에서 바쁨의 미래는 무엇일까? 앞서 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본 바쁨의 양극화를 전망했는데,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기존에 한반도를 뒤덮은 바쁨은 생존에 대한 공포 - 주로 경제적 불안감에서 기인한 - 를 유발하며 전 국민의 삶을 가속화시켰지만, 미래의 바쁨은 선별적인 성질을 띌 것이다. 한국에서 실현될 바쁨의 양극화는 '한강의 몰락'과 궤를 같이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일컫는 다가올 거대한 변화는 결코 '한강의 기적'을 이끈 국내 기업에 유리한 방향이 아니다. 오히려 융합과 파괴의 새 시대에 다수의 한국 기업은 존폐 위기에 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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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의 위기가 함의하는 바는 곧 잠재적 경기 침체 및 일자리 감소인데, 이는 한국에서 바쁨의 양극화를 가속화할 촉매제가 될 예정이다. 왜냐하면 일은 한국인의 삶을 바쁘게 만드는 주범이었는데, 앞으로 한국에선 일의 총량이 - 정확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 점차 줄어들 예정이기 때문이다. 국제 로봇 연맹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수 년째 로봇밀도 (노동자 1만 명 당 로봇 수) 1위를 지키고 있는데, 이는 자동화로 인해 일의 상당량이 로봇으로 전이될 때, 특히나 한국 고용 시장이 타격을 입을 것임을 시사한다. 즉, 한국에서 일자리는 점차 감소할 것이고, 이로 인해 강제로 바쁨을 박탈당할 수많은 잉여 계층이 한국에 출몰할 것이다. 반면, 나머지 평범한 한국인은 적정 수준의 사회경제적 지위 (과거에는 마땅하다고 여겨졌던)를 유지하기 위해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가속화된 삶을 살 것이다.


우리는 바쁨의 양극화를 야기할 한강의 몰락이 왜 예견된 비극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한강의 기적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 및 이러한 방식의 구조적 한계를 짚어볼 것이다. 과거에 한국이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은 직후 지독한 빈곤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다.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쟁 직후 서울을 방문한 뒤 "이 나라를 복구하는데 최소 100년이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불과 반 세기만에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반도는 풍요로운 땅이 됐다. 한 때 필리핀이나 가나보다 궁핍했던 한국은, 세계 최초로 피원조국에서 원조국으로 화려하게 탈바꿈했다. 한국은 홍콩, 싱가포르, 대만과 더불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렸고, 한국 대기업은 활발한 수출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 나갔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고도 압축 성장은 분명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한강의 기적은 국가 주도 산업화 추진, 기업의 활약, 높은 교육열 및 국민의 헌신이 뒷받침된 결과인데, 특히나 기업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당시 그의 저서 <넥스트 소사이어티>에서 기업가 정신이 가장 높은 나라로 한국을 추켜세울 정도였다. 이 당시 한국 기업이 취한 전략은 '패스트 팔로워'인데, 이미 시장을 선점한 1등 기업의 제품을 모방해 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이들을 맹렬히 추격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별다른 핵심 기술, 자원 및 브랜드가 없었던 한국 기업이 성장을 위해 취해야 했던 합당한 조치였다. 한국 기업이 빠르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짜낼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사람들의 시간이었기에, 이는 만성적 초과근무 및 열악한 노동생산성을 낳았고, 한국적 바쁨의 주요한 원인이 됐다.


바쁨을 엔진으로 삼은 한국의 패스트 팔로워 전략은 20세기까지 상당히 유효했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지원을 등에 업은 대기업은, 야금야금 세계 시장에서 영토를 넓혀나갔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화학 등의 산업에서 굴지의 대기업이 출현했고, 일부는 추격자 신세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선도자로 그 지위가 격상돼 한국 제품이 세계에서도 통하는 것을 증명했다.


이 때는 대기업의 성공이 곧 한국의 부흥이자 중소기업의 발전 및 고용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우세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가 극심히 벌어졌지만, 대기업 성장의 과실이 중소기업으로 흘러 선순환을 이룰 것이라는 '낙수효과 이론'이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불균형 성장을 정당화했다. 교육 또한 창의력 보단 암기 위주의 정답을 가르치며 '회사형 인재'를 길러냈고, 학생들에게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보단 순종과 안정을 장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성장은 이제 구조적 한계에 봉착했다. 협소한 내수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고, 세계 경기가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서 수출 여건이 악화됐다. 게다가 한 때 한국의 고성장 비결이었던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중국이 도입하고 저가 물량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주력 산업을 송두리 째 위협하고 있다. 그 결과, 한 때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굴뚝산업의 상당수는 이미 경쟁에서 밀려 도태됐거나,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게다가 공신력 있는 여러 연구기관의 평가에 의하면 (한국경제 연구원, 세계경제포럼 등), 한국의 미래 산업 - 인공지능, 드론, 신재생 에너지, 로봇, 블록체인 등 - 경쟁력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수준이다. 인상적인 것은 중국의 약진인데, 이미 중국은 미래 산업 부문에서 한국을 한참 앞지른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번영을 향해 고속 질주하던 한국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느 시대에나 요구되는 역량이 있는 법이다. 한강의 기적을 달성한 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바쁨이었다. 쉬지 않고 24시간 공장을 돌리고, 남들이 내놓은 제품을 빠르게 모방해 성과를 내기 위해서, 바쁨의 강화는 필연적이었다. 이 시기에 한국의 물질적 풍요와 바쁨의 수준은 정비례했고, 바쁨은 만족을 모른 채 한국인들의 시간을 거침없이 먹어치웠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바쁨의 증폭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고속 성장의 원동력이 된 바쁨은 오히려 미래에 걸림돌이 될 예정이다. 바쁨을 강요하던 저부가 노동집약 산업의 시대는 저물고, 고부가 기술집약 산업 및 참신한 아이디어가 각광받는 새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새 시대에 요구될 역량은 - 이를테면 혁신이나 창의성 - 결코 바쁨을 강제하는 환경에서 키워지지 않는다. 본래 창조적 파괴는, 바쁨의 지배에서 벗어난 여유로운 환경에서 생겨난 우연한 발명이나 발견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한국이 산업화 시대의 유산인 '바쁨은 옳다'는 구시대적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극심한 바쁨의 양극화는 피할 수 없는 참극이 될 것이다. 제2의 한강의 기적이냐 한강의 몰락이냐. 한국은 지금 기로에 서있다.


++ 얼마 전 <바쁨의 해부> 원고로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됐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면, 7월에 책이 출간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책을 소개하는 채널 '21세기 살롱' 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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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샘플

https://www.youtube.com/watch?v=zJMbuFp0-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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