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 공화국 #3
적자생존은 19세기 영국의 사회학자 하버트 스펜서가 제시한 개념으로, 사회의 변화 및 발전 모습을 설명하는 사회진화론에 등장한다. 이것은 자연선택에 의해 가장 적합한 종만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당시 지배층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사회진화론은 영국 내부로는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를, 외부로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그럴듯한 학술적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돈이 있는 자본가와 문명화된 서구 열강이 '적자'로 정의되고 이들이 곧 정글의 포식자다. 잔인한 약육강식의 법칙은 제국주의, 인종차별, 나치즘 등의 부작용을 낳으며 세계에 전파됐다. 주목할 것은 경쟁의 승자들은 모두 바쁨의 신봉자들로서, 바람직한 삶을 위해선 삶의 가속화가 필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 때, 한국은 잦은 외세의 침략 및 일제 강점이라는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적자생존 법칙의 명백한 희생자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한국은 적자생존을 열렬히 옹호한다. 마치 서구권 열강과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은 경쟁과 바쁨을 찬양하는 전도국이 됐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 풍토가 형성됐다. 각자도생 한국 사회에서 연대의 고리는 끊어졌고, 상생은 실종됐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똘돌 뭉친 한국인은 자기만의 섬에 고립된 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골몰하게 됐다.
뒤처지면 끝장이라는 공포가 한국 사회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미칠 듯이 시간의 터널을 질주하며 삶을 소진하도록 길들여진다. 이러한 상황을 '생존을 위한 돌진'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한국인에게 바쁨은 선택이 아닌 생존하기 위한 의무이다. 물론 바쁨의 강제적 속성은 세계화, 바쁨의 지위화 그리고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한 범세계적인 현상이며, 한국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다만, 다음의 한국적 사회문화 특질은 한반도에서 바쁨의 강제력을 공고히 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 바로 물질주의 가치관과 집단주의다.
먼저, 한국에 만연한 물질주의 가치관을 살펴보자.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 Survey)는 1981년부터 최근까지 세계 각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가치관을 구분하는 두 개의 축은 각각 '세속/합리적 가치 대 전통적 가치' 그리고 '생존 가치 대 자기표현 가치'이다. 한국은 세속/합리적 가치 및 생존 가치가 두드러지고,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유교 문화권으로는 중국과 일본 등이 있다. 이 문화권에 속한 국가는 일반적으로 경제와 안보를 중시하고, 권위적인 정부는 국민들에게 민족주의에 기반한 애국심을 요구한다. 한편, 일반적으로 느긋하고 살기 좋은 나라로 취급되는 북유럽 국가들은 모두 높은 세속/합리적 가치 및 자기표현 가치를 지닌 것으로 확인됐다.
인상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세속/합리적 가치 및 자기표현 가치가 증대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은 고도의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자기표현 가치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의 유일한 예외 사례라는 점이다. 한국은 경제 성장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1980년대 물질주의 가치관에 머물러 있다. 낮은 자기표현 가치는 개인의 자유, 시민들의 정치 참여, 인권과 환경 등의 경시를 뜻하는데, 이는 한국인의 의식 수준이 - 국가 경제 규모 및 국제무대에서의 대기업의 영향력 대비 - 진일보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해당 조사에서 한국인 중 탈물질주의자의 비율은 겨우 14% 정도로, 다른 나라 대비 (미국: 48%, 일본: 43%, 스웨덴 51%, 멕시코 46%) 현격히 낮은 수준인데, 이는 한국이 어느 정도 먹고살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여전히 불안에 시달리며 물질에 대한 강박증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국인은 사회경제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물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물질주의 가치관은 바쁨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물질주의에 경도된 사회는 구성원들의 탐욕을 부채질하고 물질의 포로가 될 것을 강요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의 삶은 가속화되기 쉽다. 왜냐하면,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할 경제력을 갖추려면, 대체로 바쁜 삶을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보상과 바쁨은 통상적으로 정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세인들이 부러워하는 출세한 사람들 중, -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은 극소수의 유산계급을 제외하곤 - 부의 금자탑을 쌓기 위해 삶을 소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회는 노동을 숭배하고 여가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 이런 사회는 돈이 최고기 때문에 돈을 벌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근 한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여가를 보장하기 위해, 근로시간 단축법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노동자 계층은 - 특히나 잔업 수당이 근로 소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생산직 - 이 정책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줄어들 임금소득 때문이다. 이들은 장시간 일하고 높은 소득을 얻길 원한다. 때문에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을 법제화한다 해도, 더러는 아마도 감소한 근로 소득을 벌충하기 위해, 투잡을 하거나 외벌이에서 맞벌이로 전환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용 시간 (원래는 여가에 사용됐어야 할)을 돈을 버는 생산활동에 쓸 확률이 높다.
그나마 현재 이 정책의 수혜자라 할 수 있는 노동자 상위 계층 - 대기업, 공무원 등 - 은 노동시간 단축을 반길 수 있다. 하지만, 미래에 자동화 및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자신들도 같은 상황 - 적게 일하고 적게 버는 것 - 을 겪게 되면, 이들도 마찬가지로 거부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물질주의 사회의 구성원은 일반적으로,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준의 집과 차, 그리고 미디어와 광고에서 쏟아내는 온갖 상품을 소비할 구매력을 갖추길 원하게끔 학습되기 때문이다. 바쁨에서 해방돼 여가가 주어져도, 물질주의 가치관을 가진 한국사회에서는 이것이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불안과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대단히 서글픈 일이다.
한편, 한 때는 한국적 바쁨의 강제성이 지금처럼 강력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물질주의 가치관이 팽배했지만, 더 많은 소유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소진할 각오가 돼 있는 야심 있는 사람들만이 바쁨을 받아들였다. (사실 고도성장기를 경험한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이런 출세지향적 태도를 보였다) 당시 청빈함을 지향하던 사람들은 (비록 극소수긴 하지만) 굳이 바쁨의 아귀에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치지 않아도 무방했다. 이들은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았기에, 분수에 넘치는 돈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바쁨의 영향력에서 일정 부분 벗어난 채 자신의 삶을 적절히 꾸려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이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며, 모든 것은 변했다. 국가가 휘청거리고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거리로 나 앉은 사람들. 불안은 증대됐고, 적자생존의 법칙이 입증됐으며, 경쟁의 강도는 심화됐다. 지독한 성과주의 및 열악한 사회안전망으로 인해, 한국에서 바쁨은 출세가 아닌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변모했다.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체감한 한국인은 두려워졌고, 바쁨의 리듬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인의 삶은 투쟁이 돼버렸다. 학생들 사이 스펙 경쟁은 치열해졌고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직장인들은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사고과에 목숨을 걸며 자기계발에 매진했다. 중장년층은 노후에 대한 경제적 불안감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쳤다. 한국인은 생존을 위해 시간을 남김없이 쥐어 짜내며 달려야 했다. 이렇게 모두가 죽음의 경주를 하는 마당에, 탈물질주의 가치관과 성숙한 시민의식이 배양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최근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삶의 질을 중시하는 '워라밸' 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다. 닐슨코리아가 2017년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 10명 중 7명은 돈보다는 워라밸을 선호한다고 답했는데, 이는 한국 사회가 물질주의 가치관에서 탈피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여전히 '하면 된다'는 산업화 시대 망령에 사로잡힌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바쁨을 강요하며 세대 갈등을 낳고 있다. 한국 사회가 탈물질주의 가치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마도 세대교체가 여러 번 진행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두 번쨰로, 한국적 바쁨을 강제하는 또 다른 악령은 집단주의다. <개인주의자 선언>의 저자 문유석은 말한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불행을 바쁨으로 치환해도, 문장의 시사점은 유효하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바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집단주의는 어떻게 바쁨을 강제하는가? 전 세계가 급속히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이 이러한 흐름에서 이탈하는 것이 쉬운 법은 아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에선 탈(脫) 바쁨을 어느 정도 '다름'으로 취급하고 용인하는 반면,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곳은 이것을 명백한 '틀림'이자, 집단에 대한 반기라고 여긴다. 전자는 개인의 의식적 노력으로 일정 부분 바쁨으로 겪는 문제를 해소할 수 있지만, 후자는 사회 구조상 개인이 바쁨에서 벗어나기는 대단히 힘들다. 한국은 불운하게도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
개인의 개성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는 일종의 표준화된 과업이 존재하고, 이것은 바쁨을 정당화 한다. 문제는 과거에는 무난히 수행할 수 있었던 이 과업의 난이도가 점차 상승하며, 삶의 가속화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학업,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등이 그 예인데, 모두가 일정한 시기에 마땅히 성취해야 할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을 제 때 이루지 못한 사람은 열패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따라서 획일적 목표를 주입하는 한국 사회는, 한국인에게 '남들보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불어 넣고, 생존을 위해 돌진하게끔 유도한다. 한국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과업 달성을 위해 바쁨에 포박당한 채 산다. 저마다 인생의 속도 및 방향이 있는 것인데, 한국 사회에서 이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바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만의 삶의 리듬을 갖지 못한 채 시간에 쫓기는 상황은 일반적인 한국인이 겪는 숙명이다.
++ 얼마 전 <바쁨의 해부> 원고로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됐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면, 7월에 책이 출간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책을 소개하는 채널 '21세기 살롱' 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
21세기 살롱 페이지 ->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영상 샘플
https://www.youtube.com/watch?v=zJMbuFp0-i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