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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된다'가 낳은 질병

바쁨 공화국 #2

"오늘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노력과 피와 땀으로 이룩된 것입니다. 하면 된다는 국민들의 강한 의지와 저력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위대한 성취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우리 역사는 독일의 광산에서, 열사의 중동 사막에서, 밤새 불이 꺼지지 않은 공장과 연구실에서, 그리고 영하 수십 도의 최전방 전선에서 가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위대한 우리 국민들이 계셔서 가능했습니다."


국정 농단으로 탄핵당한 박근혜 대통령 취임사 중 일부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하면 된다' 정신은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가 남긴 유산으로, 오늘날 한국이 바쁨 공화국이 된 것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 근대화 및 경제 성장, 군부독재로 인한 민주주의 훼손, 인권 침해 등 -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이 책에선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가 내세운 '하면 된다' 정신이 어떻게 한국적 바쁨을 낳았는지, 한국적 바쁨의 원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에 의의를 둘 것이다.


박정희.jpg 출처: 오마이뉴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말한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결핍 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적 질병이며,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하면 된다'와 같은 긍정성의 과잉은, 성과주의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바쁨의 촉매제가 됐다.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하면 된다' 정신을 내세우며,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했다. 국가 주도의 계획 하에 대기업이 탄생하고, 경제는 성장했으며 빌딩이 마구 들어섰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한국인들은 '하면 된다'는 구호를 외치며 고된 바쁨의 행군을 시작했다. 국가는 바쁨의 사역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수출역군'이라 미화했지만, 경제성장이라는 대의를 위해 이들의 삶은 송두리째 제물로 바쳐져야 했다. 국가는 압축성장을 위해 가속 기어를 최고조로 올린 채, 국민들의 시간을 남김없이 쥐어짜냈다.


'하면 된다' 정신이 한국적 바쁨이라는 질병을 낳은 것은 20세기 중후반에 형성된 새로운 형태의 불안과 관련이 깊다. 전쟁 이후 한국인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됐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출신이나 친일의 행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산업화 시대에 걸맞은 근면성이었다. 근면을 통해 쌓은 부는 탯줄이나 외세 대비 무척 평등해 보였다. 오랜 시간 신분 사회 및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굉장한 변화였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한국인들은, 바쁘게 발을 굴리며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고자 했다.


하지만 세속적 성공은 제한된 수의 사람들에게만 마련되는 법이다. 다수가 부푼 꿈을 가졌지만, 달콤한 성공의 열매를 수확한 사람은 소수였다.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의 화살을 자신의 무능함과 게으름으로 돌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디어는 ‘성공시대’와 같은 프로그램을 톻해, 일부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선전하며 대중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고, 이것은 '하면 된다' 정신과 맞물리며 강력한 긍정성의 강화로 이어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이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 겪은 불안은 새로운 형태의 불안으로 대체되었다. 한국인에게 더 이상 일본 순사나 북한 괴뢰군은 근심거리가 아니었다. ‘하면 된다’의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한국인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똑같이 가난한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누구는 출세하고 누구는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성공의 트로피를 거머쥐지 못한 사람들이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특히나 출세한 사람이 자신이 준거집단으로 삼는 주변인일 경우, 고통은 배가된다) 이 당시 성공의 필수조건은 ‘바쁨’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근검절약하고 자신의 삶을 일에 완전히 갈아 넣은 사람들이 출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한국인은 성공하기 위해 (그리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점점 남들처럼 바쁘게 살아야 했고, 바쁨의 정도는 더욱 심화됐다. 그 결과, 단시간 내 한국에서 바쁨의 강도는 선진국의 그것과 유사한, 아니 능가하는 수준이 돼버렸다.


한편, 20세기 중후반 한국에 만연한 긍정성의 과잉 및 삶의 가속화는, 일찍이 다른 나라에서 보였던 흐름과 유사하다. 한국적 바쁨은 일제강점기와 메이지 유신 그리고 서양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그 뿌리가 있다. 예를 들어, 서양은 규율이 지배하던 중세시대를 지나,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쳐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확산됐다. 강박적인 근검절약 및 사유재산의 축적은 서양에서 자본주의가 뿌리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것이 만성적 바쁨의 기원임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동양에 바쁨이 전파된 결정적 계기는 19세기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다. 화혼양재 (和魂洋才, 일본의 전통적 정신과 서양의 기술)를 외치며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의 삶의 리듬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에서 서양에 파견한 사절단이 작성한 <미구회람실기>에는 서양의 번영은 합리적 규율 및 근면 성실한 태도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기술돼있는데, 이는 일본이 서양의 바쁨을 적극적으로 표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국민 정신 개조를 위해, '게으름은 나쁘고 바쁜 것은 좋다'는 사상을 적극적으로 주입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사상은 한국의 식민지배에도 활용됐다. 일본은 서양의 열강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바쁨을 주입했고 지배를 정당화했다. 일부 한국 지식인들은 나태한 민족성을 개조해야 한다며 그들의 논리에 동조했고, 대중들을 계몽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의 '하면 된다' 정신은 가속의 촉매제일 뿐, 한국인들에게 내재된 바쁨의 씨앗은 사실 일제강점기 때 뿌려진 것이다. 다만, 이 시기 한국적 바쁨은 과도한 수준이 아니었는데, 이는 강압적이고 착취적인 환경에서는 바쁨이 증폭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고로 어떤 이야기가 시대를 거듭해 구전되고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 그것은 하나의 신화가 된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미디어 및 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재생산된다면, 사람들은 이것을 숭배하고 진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바쁨도 마찬가지다. 바쁨 공화국 한국에서 바쁨이 최고 선이 된 것은, 불과 수 십 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것은 일본에 의해 –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구권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숭배자들에 의해 - 주입된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단군신화처럼 한반도에 뿌리 깊게 퍼져있다.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주입된 바쁨에 대한 강박관념은, 분명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면 된다’는 긍정의 체화로 인해 탄생한 자발적인 속성의 바쁨이기 때문이다. 강제력을 쓰면서 바쁨을 키우는 것에 한계가 있는 반면, 주체가 자발적으로 기꺼이 가속 버튼을 누를 때, 바쁨은 무한대로 증폭된다. 바쁨 권하는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유용성을 뽐내는 과시적 생산을 위해, 더러는 학습된 근면 신화로 인해 바쁨의 수준을 끊임없이 강화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하면 된다’ 정신을 통해 국가는 부를 얻었지만, 국민은 여유를 잃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바쁘게 산 사람은 집과 차를 얻었지만 여가 있는 삶을 잃었다. 게다가, 이제는 한국이 가난을 상당 부분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 적어도 20세기와 비교할 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 바쁨의 아귀는 탐욕스럽게 입을 벌린 채, 한국인들의 시간을 먹어치운다. 과거에는 분명 ‘하면 된다’는 합리적인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의 찬가가 과연 저성장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가? 우리는 지금 긍정의 과잉이 낳은 한국적 바쁨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얼마 전 <바쁨의 해부> 원고로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됐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면, 7월에 책이 출간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책을 소개하는 채널 '21세기 살롱' 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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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샘플

https://www.youtube.com/watch?v=zJMbuFp0-i8

호밀밭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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