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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빈곤자들

바쁨 공화국 #1

'한국'이 OCED 경제 규모 11위, 국민소득 3만 불을 달성하는 사이, '한국인'의 삶은 가속화됐고 삶의 질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풍류를 즐기고 느림의 미를 알던 민족은 역사책에서나 존재할 뿐, 오늘날 이 땅에 사는 한국인은 어른 아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삶의 여유가 없다. 보통의 한국인은 자신의 삶을 바쁨의 용광로에 갈아 넣으며, 정체된 질주를 할 운명에 처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전반적으로 다룬 바쁨에 관한 내용 - 바쁨의 지배, 바쁨의 탄생, 바쁨의 강제, 바쁨의 미래, 바쁨의 파괴 - 을 한국의 상황에 적용해 볼 것이다. 전쟁 후 압축성장을 경험한 역사적 특수성 및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와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가 '한국적 바쁨'을 낳았다. 한 때 고속 성장의 연료가 된 한국적 바쁨은 현재 수명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견고한 지배력을 과시한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한국적 바쁨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의 질은 점점 끔찍한 수준으로 악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3만 불이든 4만 불이든,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한 채 평생 바쁨에 떠밀리듯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왜 우리는 가혹한 바쁨의 지배를 견뎌야 하는가? 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지 않는가? 구성원들이 함께 공통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하고 대안을 고민할 때,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바쁨에 관한 논의가 활성화되고, 한국 사회가 유쾌한 전진을 하길 바란다.


먼저, 한국인이 어떻게 바쁨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자. 2014년 통계청에서 약 2만 7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 생활시간 조사를 보면, 한국인은 하루 24시간 중 여가에 4시간 49분, 수면에 7시간 59분, 임금 노동시간에 6시간 52분을 사용하고, 나머지 시간은 교통, 가사노동, 학습, 식사 등에 할애한다. 해당 조사에서 응답자의 59.4%가 시간이 부족하다고 응답했고, 항상 시간적 여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12.4% 에 불과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한 사람들의 의무시간은 (일, 학습, 가사 노동, 이동) 9시간 이상인 반면, 여가시간은 고작 3시간 53분이었다.

한국인 24시간.jpg 출처: 조선일보

인상적인 것은, 1999년 해당 조사가 실시된 이래 2014년 여가 시간은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이는 10년 전 기록인 5시간 3분에 비해 14분이나 줄어든 수치이다. 2004년 이래 주 5일제가 시행되어 노동시간이 줄었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가시간이 오히려 줄어든 것이 특이한 점이다.


한편, 한국 고용정보원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 노동인구의 약 42% 정도가 시간 빈곤 상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시간 빈곤이란 일주일 168시간 중 개인관리와 가사, 보육 등 가계 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뺀 시간이 주당 근로 시간보다 적은 경우를 뜻한다. 여가가 없는 사람을 노예로 간주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상당수는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현대판 노예인 셈이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범위를 좁히면, 결과는 더욱 참담하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조사에 의하면, 약 71%의 직장인이 자신을 시간 빈곤자라고 답했다. 특히 기혼 직장인 중, 시간 빈곤자라고 답한 비율은 74%로, 미혼 68% 보다 높았는데, 이는 기혼자들에게 주어진 가사노동 의무 때문이다. 시간 빈곤자들이 바쁨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은, 건강, 대인관계, 자기계발, 휴식, 여가 순이었다. 만약, '하루의 여유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고작 '원 없이 자기'가 1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참으로 서글프다.


한국인이 시간 빈곤자인 것은 바쁨과 관련이 깊다. 한국은 '바쁨 공화국'이다. ‘빨리빨리’가 외국인들이 배우는 기본적인 한국어 표현일 정도로, 바쁨은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한다. 사교육 및 자기계발 열풍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보통의 한국인은 시간 빈곤에 시달린 채 바쁨의 지배를 받는다. 한국에선 바쁘게 사는 것이 일종의 의무이며, 바쁨은 곧 그 사람의 능력과 인기로 치환된다.


바쁨의 수준을 정량화할 수 있는 통계는 노동시간과 수면시간이다. 이 두 수치를 들여다보면, 한국이 얼마나 바쁜 나라인지 가늠할 수 있다. 우선, 한국은 OECD 기준 노동시간 세계 2위로, 비효율적이고 만성적인 초과근무로 악명이 높다. 불필요한 야근이나 회식이 만연하며, 노동생산성도 다소 낮은 편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최근 국회는 법정 근로시간을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실제로 얼마나 유효할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줄어든 노동시간이 바쁨을 추방하고 풍족한 여가를 제공하기는커녕, 불안과 더 많은 경제적 성과를 위한 생산활동 (투잡이나 자기계발 등)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다른 장에서 자세히 서술할 예정이다.


또한 한국은 잠에 인색한 국가인데,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 41분으로, OECD 평균인 8시간 22분보다 40분이나 적으며 이는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한국인은 잠을 적게 자는 대신 바쁘게 일하고, 공부를 하고, 술을 마시고 밤 문화를 소비하며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고 착각한다. 한국에선 잠을 많이 자는 것은 죄악인데, 잠을 적게 자는 이들을 근면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여기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카페인이 들어간 커피나 에너지 음료를 마시며,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는 것이 한국인의 일상이다.


특히 밤새 켜져 있는 거리의 네온사인과 회사 빌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한국이 24시간 사회임을 나타낸다. 편의점, 술집, 카페, 음식점, 찜질방, 택시, 카페, 미용실 등 한국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을 소비하는 돈이 있는 사람에겐 잠들지 않는 한국이 편리하고 신기하겠지만, 이것을 생산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에겐 한국이 지옥일 수 있다. 사실 이들은 - 소비자나 생산자 할 것 없이 - 24시간 돌아가는 한국 사회 운영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납세하는 시간 빈곤자 들인 셈이다.



++ 얼마 전 <바쁨에 관한 거의 모든 것> 원고로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됐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면, 7월에 책이 출간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책을 소개하는 채널 '21세기 살롱' 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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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샘플

https://www.youtube.com/watch?v=zJMbuFp0-i8

호밀밭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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