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잃어버린 노동

인식 #2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는 꾀가 많고 교활한 인물이었다. 신들의 미움을 산 시지프는 수 차례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신들을 농락한다. 이 죄로 시지프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무의미한 노동의 반복’이다. 시지프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지만 바위가 정상에 다다르면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잠시 숨을 돌린 뒤 시지프는 다시 내려가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단순하고 고된 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하는 시지프의 무미건조한 삶에는 어떠한 희망의 물줄기를 찾아볼 수 없다.

문명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우리의 삶은 시지프의 서글픈 운명과 다를 바 없다. 오늘날 노동에서 보람을 얻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매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중교통에 몸을 꾸겨 넣고, 직장에서 고역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퇴근하면 고된 하루를 보상받기 위해 현실도피성 체험을 하거나 (게임, 인터넷 서핑, TV 드라마, 유튜브, 넷플릭스와 같은 동영상 콘텐츠 소비 등) 필요하지도 않은 무언가를 사들이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이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면서 주말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금요일 오후에 주어진 해방감도 잠시, 순식간에 주말이 지나고 사람들은 일요일 저녁에 우울한 감정을 느끼며 월요일을 대비한다. 마치 정상에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바라보며 다시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하는 시시포스처럼 말이다.


그나마 시지프의 비극적 운명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무의미한 노동의 반복에 권태를 느낄 여력이 되는 사람은 대개 사무직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위해 인력 시장에 모인 사람, 고시 실패 후 몇 년째 취업을 하지 못한 학생, 퇴직했지만 노후 자금이 충분치 않은 독거노인, 실직한 외벌이 가장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권태도 사치이다. 따분한 일을 반복하는 사람은 답답함을 느끼고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실업 상태에 있거나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진 이는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그토록 일터에 예속되고 싶어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물론 이것 역시 문명이 의도한 결과이다.


현대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려는 이는 순진하고 현실 물정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일에서 의미를 부여할 생각하지 말고 여가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라는 것이 유명한 라이프 코치들의 조언인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다른 장에서 후술 하겠지만 현대인들은 여가시간에도 노동과 완벽히 절연되기 어려우며, 사실 마땅한 취미도 없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노동이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한 때 노동은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향기로운 행위였고, 인간은 노동에 관한 상당한 통제력을 가진 주체였다.


예를 들어, 수렵채집 시절 원시인의 삶을 상상해보자. 원시인들은 의복을 마련하고, 식량을 획득하며, 주거를 관리하는 등 의식주 전반에 걸친 일을 자체적으로 담당해야 했다. 이는 다소 성가신 일임이 분명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은 온전한 자율성과 창조력을 시험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원시적이었던 노동의 형태는 점진적으로 진보했다. 협업과 분업이 늘어나고 인간은 점차 직접 몸을 쓰기보다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생산성 증대라는 미명 하에 노동을 수행하는 인간은 조금씩 노동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지만 이를 경계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문명이 주는 혜택이 너무나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다.


노동의 향기가 조금씩 휘발되기는 했어도 상당 시기 동안 노동의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이 있었다. 가령, 중세시대 신발 장인에게는 선조들과는 달리 직접 농사를 짓거나 집을 건축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물론 이론적으로 신발 장인이 직접 의식주와 관련된 노동을 할 수는 있었겠지만 이미 화폐 경제라는 문명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이는 비현실적이다), 여전히 신발을 만드는 일에서만큼은 자율성과 창조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었다. 신발 장인은 독자적으로 신발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체성을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신발을 보며 유대감을 느끼곤 했다. 또한 그가 사용한 도구는 일을 보조하는 소모품일 뿐, 노동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다. 즉 도구는 인간의 노동을 돕는 수단일 뿐, 스스로의 목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접어들자 문명은 노동의 형태를 완전히 개조해 향기를 탈취해 버렸다. 테일러 주의와 포드주의로 대변되는 노동의 분업화, 표준화, 단순화로 인해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문명은 폭발적인 속도로 발전했다. 번영의 대가로 문명은 인간들에게 시지프의 형벌을 내렸다. 그 결과, 인간은 노동에 관한 통제권을 완벽히 상실했고 자율성과 창조력이라는 고유의 본성을 박탈당했다. 노동의 본래적 가치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느끼는 만족감이어야 하는데 이는 타인에게 시간을 팔아 돈을 받는 교환가치로 변질되어 버렸다. 과거 중세시대 신발 장인이 노동의 과정에서 체험한 것 – 성취감, 만족감, 주체성 등 – 을 오늘날 나이키 공장에 소속된 개도국 노동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옆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생산성 증대를 위한 노동 형태 변화의 폐해에 대해서 칼 마르크스만큼 치밀하게 비판적으로 분석한 학자가 없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기계 장치의 확대와 분업으로 자립성을 상실했고 따라서 노동자들에게도 매력을 상실했다. 그들은 기계의 단순한 부품이 되었는데, 이 부품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손동작일 뿐이다.” 인상적인 것은 마르크스-공산주의와 대비되는 자본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애덤 스미스조차 대량 생산 체제가 낳는 문제에 대해서 우려했다는 점이다.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항상 결과가 똑같거나 거의 똑같은 몇가지의 단순한 작업을 하면서 한평생을 보내는 사람은 작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결코 일어나지 않는 어려움을 없애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내늘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노력하는 습관을 상실하게 되고, 보통 인간이라는 피조물로서 최대한도로 멍청하고 무식해지기 마련이다."


이 당시 활동한 영민한 예술가들은 노동 형태의 근본적 변화를 파악하곤 공장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사람들을 조명했다. 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은 <모던타임스>에서 기술발달로 소외된 인간상을 재치 있게 풍자했다. 사실 찰리 채플린이 묘사한 공장 노동자의 행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책상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네모난 상자를 바라보며 이따금씩 둥그런 고철 덩어리를 애무하듯 만지는 (컴퓨터로 일하는 모습을 묘사) 현대인들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등장하는 공장 노동자들과 그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주도적으로 사고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단지 시스템의 효율적인 작동을 위해 수동적으로 기능할 뿐이다.


노동에 있어서 인간은 철저히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한때 노동의 보조적 수단에 불과했던 도구는 진화를 거듭해 강력한 자동화 시스템이 되었고 성공적으로 인간을 부품화하는데 성공했다. 이와 관련, 니콜라스 카는 <유리 감옥>에서 자동화의 폐해를 잘 묘사했다. "자동화는 도구와 사용자 사이의 유대감을 약화시킨다. 컴퓨터 통제 시스템들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들은 작동 방식을 비밀 부호 속에 감춰놓는다. 그들은 어떤 작동자라도 아주 최소한 이상으로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숙달되게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다. 자동화는 결국 마취효과를 낸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사용하는 그 도구들을 우리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지 못한다. (중략) 모든 것이 더욱더 자동화될수록 우리는 기술을 우리의 통제와 영향력 범위 밖에 있는, 바꾸기 힘든 이질적인 힘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개발 경로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무익한 것 같다. 우리는 '켜기' 버틐을 누른 후 프로그램화된 단게를 따르면 그만이다."


고도의 자동화, 단순하고 기계적인 작업, 엄격한 규율, 성과의 계량화가 지배하는 노동 환경 속에서 인간의 본성은 거세되고 그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으로써만 존재한다. 즉, 이제 노동의 완성에 인간의 자율성 및 주체성은 전혀 개입되지 않을뿐더러 다만 자동화 시스템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역량은 독자적인 창의성이 아닌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일을 얼마나 오래, 군말 없이 순종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가 노예와 그 기질이 유사하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회사로 인해 느끼는 우울증과 번아웃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이 많은 것은 생산성 증대만을 위해 개조된 노동의 형태가 오늘날 얼마나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는지 보여준다. 잠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일터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곳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사축’ (회사와 가축의 합성어로 회사의 가축이 된 상황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신조어)이라는 말이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노예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낱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해버린 우리에게 실낱 같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퇴사 열풍’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자의식이 강한 인간들은 향기 없는 노동을 강제하는 전근대적 회사 시스템에 의문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분명 문명이 당혹해할 만한 변화이다. 안정적인 수입이라는 당근을 통해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길들이고 자발적으로 문명에 복종하게 했던 과거의 훈육법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힘겹게 바위 덩어리를 밀어 올리던 현대판 시시포스들은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된 삶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용감한 이들은 부당한 대우를 참지 않고 신에게 대적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곤 하늘을 향해 외친다. “나는 인간이라고! 제기랄, 내 삶은 가치가 있어! 나는 지금 정말 열 받았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영화 <네트워크>에 나온 명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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