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적 자아의 파괴

인식 #3

문명은 사람들에게 연기하는 배우가 될 것을 지시한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 세계라는 무대와 관습이라는 대본 그리고 타인이라는 동료 배우 및 관객이 마련된다. 그는 주어진 역할에 따라 충실히 연기를 한다. 더러는 다양한 역할을 능숙하게 연기하고,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진짜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호해지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에 나온 대사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절묘하게 묘사한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입니다. 그들은 등장하고 퇴장합니다. 어떤 이는 일생 동안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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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본래적 자아와 비본래적 자아가 있다. 본래적 자아는 곧 자기 (自己) 안에 내재된 고유한 본성이다. 모든 인간은 얼핏 비슷해 보일지라도 타인과는 구별되는 저마다의 표식을 지니고 있는데 본래적 자아가 이에 해당한다. 본래적 자아 덕분에 인간은 독립성과 개성을 지닐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을 여타의 종과 구분하는 특징이다. 본래적 자아의 세계에는 ‘나’라는 오직 하나의 개체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곳에는 고독과 고요만이 흐른다. 또한 이 곳에서는 “내가 누군지는 내가 결정한다”라는 법칙이 통용된다.


반면, 비본래적 자아는 자기 (自己) 보다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자아이다. 비본래적 자아의 세계에는 수많은 군중이 존재하며 이들은 ‘나’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왜곡하기도 한다. 이곳은 “내가 누군지는 타인이 결정한다”라는 법칙이 지배한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괜찮은 사회적 평판과 소속감을 얻기 위해 군중 속에 편입되는 것을 택하고 그 대가로 고유의 본성을 보존하는 것을 포기한다. 즉, 비본래적 자아는 자기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허상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연기할 때 쓰는 가면들은 모두 비본래적 자아인 셈이다.


인간은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자신에게 잠재된 본래적 자아를 발견하고 이를 충실히 완성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평생의 과업이다. 이를 위해선 고독한 본래적 자아의 세계로 들어가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군중들로부터 달아나 기꺼이 외톨이가 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명은 이를 방해한다. 문명은 ‘사회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의 본래적 자아를 굴절시키고, 변형하고, 날조한다. 이러한 과정이 습관적으로 반복되다 보면 우리는 서서히 본래적 자아를 상실한 껍데기가 되어버린다. 마치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명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나는 ‘본래적 자아의 파괴’라고 부르고 싶다.


오늘날 문명이 본래적 자아의 파괴를 유발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 1) 규율; 2) 인간의 상품화; 3) 온라인 자아 -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규율은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주로 지배계층이 피지배 계층의 착취를 명문화 (明文化)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과거의 규율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하는 것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등과 같이 엄격하고 공식적인 강령을 선포함으로써 자유인과 노예를 구분했다. 삶의 주권이 없었던 노예들은 군말 없이 규율을 따라야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본래적 자아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당시 노예가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곧 반역을 의미했는데, 죄를 지은 노예는 반드시 공개적으로 처벌당했다. 나머지 노예들은 의무적으로 공개 처벌의 관객으로 호출되어 “너희들도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렇게 될 줄 알아”라는 교훈을 학습해야 했다. 즉, 과거의 규율은 상당한 폭력성과 보복성에 기반한 거대 권력이었다.


근현대 접어들어 규율은 더욱 교묘한 형태로 진화했다. 이제 규율의 본질은 피지배 계층 착취가 아닌 인간의 기계화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본래적 자아가 파괴되는 주체는 피지배계층뿐 아니라 모든 계층에게로 확대되었다. 규율은 인간이 군집을 이루는 모든 장소 – 교회, 회사, 학교, 군대, 가정 등– 에 존재하며, 세련된 방식으로 그 폭력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와 관련,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판옵티콘 감옥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가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원형극장의 계단 의자 위도 아니고, 무대 위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톱니바퀴와 같은 존재로서, 우리들 스스로 이끌어 가는 권력의 효과들에 의해 포위된 채 판옵티콘 감시장치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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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차렷 자세’를 한 채 규율로 단단하게 직조된 문명의 그물망 속에 매여 서로를 감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감독관이자 노예이며 배심원이자 피고이다.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본래적 자아는 사멸하고 비본래적 자아만 덩그러니 남는다. 문명은 ‘규율’이라고 쓰여있는 검은색 물감을 뿌려 우리가 지닌 고유의 색을 없애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문명의 발전을 위해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잿빛 기계로 둔갑한다.


문명이 본래적 자아를 파괴하는 두 번째 방식은 인간의 상품화다. 지구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지배하는 거대한 시장이 되었고 인간의 가치는 곧 교환가치로 치환된다. 즉, 인간도 하나의 상품으로 분류되고 수치화 및 등급화에 의해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다. 연애 시장, 결혼시장과 같은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사랑 역시 이러한 시장의 논리에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팔리는 상품으로 포장하는 과정, 그리고 이 상품을 타인에게 능숙하게 판매하는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본래적 자아를 상실한다. 마치 시장에서 오렌지를 파는 상인이 오렌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듯이, 우리도 스스로를 파는 과정에서 자기와 분리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잘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한 조건은 군중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인기는 돈이자 권력이다. 따라서 성공한 베스트셀러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본래적 자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에 맞춰 자신의 비본래적 자아를 개조하는데 열을 쏟는다. 결국 중요한 대상은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이고, 그러다 보면 삶의 기준점 역시 내부에 자리잡기보다는 외부를 향하게 된다. 인간 시장에서 인기가 많은 상품들은 대개 몇 가지 공통성 – 유머, 친절함, 스타일 등 - 을 공유한다. 이것을 획득하기 위해 사람들이 획일화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본래적 자아는 점점 소멸된다.


에리히 프롬은 <자기를 위한 인간>에서 이와 같은 인간의 상품화 현상을 지적했는데 무척 공감하는 바이다. “자신이 기막히게 멋진 ‘포장물’이라는 걸 알려야 성공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 자신이 ‘쾌활하고 건전하며 적극적이고 신뢰할 만하며 야심적인’ 사람인 것도 알려야 한다. 또한 가정환경이 어떻고, 어떤 사교 클럽에 속해 있으며, 성공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알려야 한다. 성공은 우리 인격을 어떻게 파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상품으로 생각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신을 판매자이자 팔아야 할 상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과 행복에는 관심이 없고, 팔릴 수 있느냐에 관심을 쏟는다.”


마지막으로, 온라인 자아의 등장은 문명이 본래적 자아의 파괴를 가속화시키는데 한몫한다.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검색엔진이 본래적 자아가 개입되는 고해성사의 장이라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는 비본래적 자아가 마음 놓고 활동하는 가면극 무대이다. 본래적 자아와 비교 시, SNS상의 온라인 자아는 심각한 수준으로 왜곡된 상태다. 이것은 단지 셀카를 근사하게 보정해주는 사진 필터 기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온라인 게시물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공표하는데, 이때 연출된 온라인 자아에는 어떠한 부정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나는 누군가의 SNS 프로필에 ‘이혼 경력 있음’, ‘발기부전’, ‘도박중독’, ‘소아성애자’ 따위의 문구가 적혀있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와 관련, 리처드 왓슨도 <인공지능 시대가 두려운 사람들에게>에서 온라인 자아의 거짓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현재 온라인에서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대개 현실을 편집한 것인 사실을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우리는 자신이 엮는 디지털 정체성과 이야기에 두려움, 의심, 취약성 같은 요소는 되도록 넣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 모습보다 더 행복하고 더 예쁘고 더 훌륭해 보이도록 스스로를 편집한다. 아날로그 세계의 모호함이 아닌 화소를 다듬은 완벽함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자아를 설명하는 법칙은 다음과 같다. “내가 누군지는 내가 결정한다. 다만 타인은 나의 왜곡된 긍정성만을 봐야 한다.” SNS상의 온라인 자아는 한결같이 유명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시험에 붙고, 해외여행을 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품격 있는 문화생활을 하고, 근사한 몸매에 자기 관리에 열심이다. 그 누구도 실연당하고, 취업에 실패하고, 애인의 바람을 목격하고, 해고당하고, 돈이 없어서 약속을 잡지 못하고, 살이 쪄서 바지가 맞지 않는 사실을 SNS에 올리지 않는다. 인간은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지닌 불완전한 존재이다. 하지만 온라인 자아는 긍정성만을 편향적으로 부각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성이 결여된 온라인 자아 구축에 상당한 시간을 쏟고 종종 실제의 모습과 이것을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좋아요’ 개수에 골몰하면서 정작 본인 마음이 내는 소리에는 무관심해진 것이다.


여태까지 한 말을 종합해 보자면, 문명은 규율, 인간의 상품화, 온라인 자아 방식을 통해 우리의 본래적 자아를 파괴한다. 본래적 자아가 파괴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그 결과 삶의 기준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맞춰지고, 군중의 일원이 되어 자발적으로 문명에게 복종을 한다. 만약 일상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며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집에서 쉬고 싶은 날이 잦아진다면 이는 위험 증상이다. 일상에서 본래적 자아가 파괴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몸이 보내는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생명체가 고유한 본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생득적 현상인데, 문명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은 지극히 당연한 본능을 억압당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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