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 #4
우리는 몸속 DNA에 깊숙하게 각인된 수렵 채질 시절의 야만성을 포기하는 대신 문명과 손을 잡았고 그 결과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종 (種)이 되었다. 인간이 무자비하게 자연을 조작하고 파괴하는 과정에서 다른 종들은 빠르게 사멸했다. 오직 인간의 하인이 되기를 선택한 종들만이 살아남아 성공적으로 개체 수를 증식했다. 이들은 반항이 아닌 순종을 선택했고 인간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집단의 생존을 보장받았다. 지금도 매년 수백 종이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닭, 소, 돼지 같은 가축들의 개체 수는 유례없는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길들이다’라는 뜻인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자연을 떠돌던 닭, 소, 돼지 같은 동물들이 가축화되어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집에서 살게 됨으로써 얻는 편익은 상당했다. 이들은 더 이상 포식자에게 잡아 먹힐 걱정 없이 안락한 곳에서 주기적으로 먹이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인간들이 가난에 허덕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 지금도 어딘가에서 바다 위를 떠돌고 있을 시리아 난민들,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도록 일하고 고작 1달러로 생활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 가축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은 대단한 셈이다. 생존과 번식이 종의 최우선 법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축들은 일부 불운한 인간들보다 유리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다.
길들임은 권력의 작동과 관련 있다. 길들임의 법칙은 강자가 약자를 길들이고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명의 인간은 한 마리의 늑대보다 힘이 세지 않지만, 만 명의 인간이 가진 힘은 백 마리의 늑대를 압도한다. 인간은 늑대를 길들이지만 늑대는 인간을 길들일 수 없다. 다른 종 대비 협력을 잘하는 특징이 있는 인간은 집단의 규모를 키우고 동물들을 자신의 조력자로 길들여왔다. 동물들은 인간들로부터 먹이를 얻기 위해 고유한 본성을 포기해야 했다. 이들은 인간 주인에게 친밀하게 굴고, 잠재된 공격성을 억누르고, 인내심을 기르는 법을 배워야 했다.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한 늑대와는 달리 개는 이빨을 숨기고 친근하게 굴며 인간의 친구가 되었고 그 결과 종으로서 번성했다. 참고로 오늘날 개의 개체수는 약 9억 마리인 반면, 늑대는 멸종위기에 처해있거나 동물원 우리에 갇혀있는 신세다.
그러나 동물들이 인간에게 복종하고 길들여진 것은 어쩌면 악마와의 계약이었을지 모른다. 가축화된 동물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인간 주인을 위한 비극적 희생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결과, 이들은 집단으로서는 번성했지만 각 개체의 삶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닭의 경우를 살펴보자. 닭은 오늘날 지구 상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번식한 종 중 하나가 되었다. (개체 수 기준 인간 76억, 닭 200억, 소 10억, 돼지 10억) 그러나 닭의 일생은 끔찍한 비극이다. 닭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 알고 나면 태어나기도 전에 달걀 상태로 죽는 것은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달걀에서 부화한 이들이 병아리로 자라면 강제로 부리가 잘린다. 이는 비좁은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병아리가 성장하면 인간의 식량이 되거나 달걀을 생산하라는 과업이 주어진다. 식용으로 쓰이는 닭은 도축당하는 과정에서 갈고리에 거꾸로 매달려 기절당하고 (기절하지 않은 채 죽임 당하는 경우도 있다) 털을 뽑히고 온 몸이 분해된다. 달걀을 생산하는 닭은 우리에 갇혀 잠도 자지 못하고 평생 노동을 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24시간 인공광으로 수면을 방해한다) 출산을 하자마자 애착을 느낄 틈도 없이 자식들은 팔려나간다. 만약 산란 능력이 떨어지면 이들 역시 도축된다.
이것이 닭이 인간에게 길들여지기를 택한 대가이다. 집단으로서의 성공과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이다. 종으로서 닭이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했다고 해서 개체로서 닭의 삶이 진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니, 오히려 공장형 농장, 생체 실험 등으로 인해 닭의 삶은 절망적인 수준으로 퇴보됐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닭은 기원전 6000년-8000년 즈음에 인간에 의해 가축화되었다. 만약 오늘날 닭이 타임머신을 타고 저 당시로 돌아가 조상들을 만난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절대, 절대로 인간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지 마세요! 그들을 경계하고 가급적 멀리 도망치세요! 차라리 배를 곯거나 자칼에 물어 뜯겨 죽는 편이 낫습니다.”
“결국 가축은 인간에게 길들여진 대가로 종으로서 번성했고 안정과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이는 막중한 스트레스, 무의미한 노동의 강제, 그리고 본성의 파괴를 야기했다.” 이 문장에 쓰인 길들임의 객체와 주체를 조금 변형해 보아도 의미가 유효하다. “결국 인간은 문명에게 길들여진 대가로 종으로서 번성했고 안정과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이는 막중한 스트레스, 무의미한 노동의 강제, 그리고 본성의 파괴를 야기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문명이 농업혁명을 통해 인간을 길들인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중략) 어떻게 이 잡초는 그저 그런 식물에서 출발해 어디서나 자라는 존재가 되었을까?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약 1만 년 전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밀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밀은 다른 식물과 공간, 물, 영양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온종일 잡초를 뽑는 노동을 했다. 밀은 병이 들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해충과 마름병을 조심해야 했다. 밀은 자신을 즐겨 먹는 토끼와 메뚜기 떼에 대한 방어책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이를 막아야 했다. 밀은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인간들은 샘과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댔다. 밀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밀이 자라는 땅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의 변을 모아야 했다.”
그렇다. 우리는 동물들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우리 자신도 문명에 의해 길들여진 가축으로 전락해 버렸다. 문명이 제시한 달콤한 계약서에 사인한 이후 우리는 동물농장의 일원이 되었다. 우리는 동물농장의 관리자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도 동물 농장에 갇힌 수많은 가축들 중 하나인 셈이다. 도시 위 빼곡하게 들어선 빌딩들의 안과 밖을 오가며 무미건조하게 생산과 소비만을 반복하는 사람 (대부분의 현대인이 이렇다)과 우리에 갇혀 착취당하는 가축의 모습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인간은 문명에게 길들여진 이후 집단으로서 번영을 구가했지만 개인으로서 삶의 만족도는 개선되지 않았다. “1장 – 인식”에서 밝힌 현대인이 처한 상황이 – 불안의 시대, 향기 없는 노동, 본래적 자아의 파괴 – 이 점을 뒷받침한다. 가축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듯이, 인간 역시 문명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으로 취급될 뿐이다.
몹시 우려되는 점은 우리가 가축의 권리를 신경 쓰지 않듯이 – 윤리와 상생을 외치는 일부 지식인 및 동물 애호가들의 가녀린 목소리는 “이윤 추구!”를 힘차게 외치는 자본의 확성기 앞에서 묻힌다 – 문명도 인간의 권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자동화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지구가 더 이상 많은 인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다시 말해 사회에 불필요한 잉여인간들이 많아진다면 문명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문명의 입장에서는 닭이나 인간이나 동물농장에 있는 수많은 종들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문명이 잉여인간들을 ‘처분’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조류독감에 걸린 닭을 생매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문명이 어떻게 인간의 가축화를 야기했는지에 대한 점이다. 문명은 수렵채집 시절 자유롭게 초원을 떠돌던 원시인들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문명이 사용한 당근과 채찍은 무엇이었으며 이것은 어떤 형태로 진화했는가? 주지하는 점은, 우리가 조건반사적으로 학습한 믿음 체계는 대개 문명이 우리를 길들이기 위해 설치한 덫이라는 것이다. 이점을 이해해야 우리는 가축의 신세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문제의 원인을 알아야 해법이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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