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1
약 45억 년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연은 언제나 지구의 당당한 지배자였다. 생물들은 대지와 바다, 하늘과 땅, 낮과 밤의 오묘한 조화 속에서 자연의 질서에 따라 터전을 구축했다. 포식자와 피식자 간 긴장과 폭력은 존재했지만 커다란 불협화음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 당시 자연은 생물들 간의 착취를 허용하지 않았다. 예컨대, 하이에나는 가젤을 먹어 치울 수는 있었지만 가젤에게 음식물을 구해오라는 작업을 시키거나 사자의 공격에 대비해 보초를 서게 할 권리는 가지지 못했다. 또한 자연은 자원의 남용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연은 원숭이에게 나무에 달린 바나나를 먹을 자유를 주었지만, 적당한 수준 이상의 바나나를 탐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했다. 자연의 순리대로 생물들은 진화와 멸종을 거듭했고 지구는 안정을 유지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문명이 인간을 앞세워 자연을 위협하기 전까지는.
오랜 시기에 걸쳐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자연 대비 문명의 지위는 볼품없었다. 미생물이나 공룡과 같이 한 때 지구의 지배자였던 종(種)들은 모두 자연의 규칙에 동의했고 문명과 결탁하지 않았다. 자연이 빈틈없이 창조한 세계에 문명이 들어설 틈은 없어 보였다. 문명은 자연의 왕좌를 빼앗고 지구 역사의 페이지를 새롭게 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자기 세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추종자를 물색하던 와중, 문명은 어떤 종을 발견했다. 지구의 상위 포식자들 대비 개인이 가진 힘은 형편없지만 무리를 이루고 단결하는 힘만큼은 탁월한 종. 다른 종들과는 달리 자의식과 상상력이 풍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종. 이 별 볼 일 없는 종의 잠재력을 알아본 문명은 “지금은 너희들의 지위가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나와 함께한다면 지구의 지배자가 되게 해 줄게”라고 설득하며 이 종을 같은 편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눈치챘겠지만 이 종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과 문명이 한 배를 타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착취와 남용을 엄격하게 금지하던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12,000년 전 인간들은 오랜 수렵채집 생활을 끝내고 농경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인간들이 땅에 뿌린 작물의 씨앗은 곧 착취의 씨앗이다. 농업혁명으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사유재산과 계급이 태동했고 착취가 생겨났다. 지배 계층은 곳간에 쌓인 식량을 가리켜 집단의 생활수준이 개선되었음을 자랑했다. “보라, 우리는 비바람을 뚫고 식량을 찾아 떠돌던 불행한 선조들과는 달리 마을에 충분한 식량을 비축하고 안락하게 생활한다. 오늘날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나 집단의 발전은 소수만을 위한 것이지 결코 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농부의 삶의 질은 평범한 수렵채집인의 그것보다 훨씬 열악해졌다. 충분한 여가를 즐기던 평범한 수렵채집인과는 달리 평범한 농부는 하루 종일 땅을 갈고 물을 길러야 했다. 이들은 추수를 마친 후에도 내년 농사를 걱정하며 지배 계층의 지시에 의해 무언가를 분주히 생산해야만 했다. 착취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농업혁명 이후 상당히 오랜 시기 동안 한 개인의 삶은 철저히 부모의 신분에 의해 결정되었다. 탯줄에 의해 부여된 신분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는 은총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불운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 착취당하는 것을 감수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피지배 계층이 평생을 착취당하며 지배계층을 위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이 극소수의 누군가가 행한 일의 기록이다. 지배계층은 갖가지 우상과 신화를 동원해 착취를 정당화했고 이에 저항하는 자는 강력히 처벌해 본보기 삼았다. 지배계층에 대항한 자는 공개적으로 잔인하게 처벌당했고 피지배계층은 쇼의 관객으로 호출되어 지배구조의 당위성을 학습해야 했다.
주지하는 것은 계급의 분화와 착취를 야기한 주체가 지배계층이 아닌 문명이었다는 점이다. 문명은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도울 하수인이 필요했고 소수의 엘리트로 하여금 그 임무를 맡게 했다. 족장, 사제, 귀족, 왕, 군주, 자본가 등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이름만 달라졌을 뿐 지배계층은 한결같이 문명의 발전을 위해 봉사했다. 이들은 항상 가진 것 대비 더 많은 것을 원했고 더 크고 웅장한 인공물을 지으며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인간 사회의 지배자들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문명이 짜 놓은 각본에 의해 조종당하는 자동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문명화로 인해 지구가 점점 인공적인 사물들로 채워지는 사이 자연의 질서는 서서히 파괴되었다. 지구를 둘러싼 자연과 문명의 대립은 한쪽이 승자가 되면 나머지 한쪽이 패자가 되는 제로섬 게임이다. 농업혁명 이후 문명이 승승장구한 반면, 자연은 언제나 패배자의 입장이었다. 철없는 부잣집 외동딸이 별 고민 없이 부모에게 용돈을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문명의 편에 선 인간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연에게 자원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적당함’을 알았던 다른 종들과는 달리 만족을 모르던 인간은 항상 더 많은 몫을 원했고 자연은 정말이지 인간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지구를 둘러싼 패권은 자연에서 서서히 문명으로 넘어갔다. 문명의 힘을 등에 업은 인간은 같은 종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며 지구의 지배자로 거듭났다.
문명과 자연 사이 힘의 균형이 급속도로 변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다. 지구는 차가운 금속의 철도로 포박당했고 기차는 검은 매연을 뿜고 달리며 자본주의의 교리를 전파했다. 문명은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인간에게 더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요구했고 그 결과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에 행하는 착취의 강도도 강해졌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도시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로부터 임금을 받으며 경제생활을 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매일 15시간 이상 착취당하며 하층 도시민으로 가난하게 생활했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에 동원됐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각성효과가 있는 카페인이 들어간 홍차나 커피를 제공하며 이들이 장시간 노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쥐어짜며 이윤을 극대화했지만 이런 방식의 무자비한 착취는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며 자본가들에 대항했다. 자본가들이 현 체제를 지속 가능한 구조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열심히 일하게끔 동기를 부여해야 했다. 자본가들은 근면 성실하게 일해 돈을 버는 것은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라고 주장하며 교묘하게 노동자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지고 노동자들의 반발도 줄어들었다. 이 당시 자본가들은 그 자신도 문명에 의해 착취당할 운명임을 꿈에도 몰랐다.
문명은 ‘노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이라는 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사람들로 하여금 문명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을 주문했다. 이를 위해 문명은 게으름을 죄로 규정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교리를 만들었다. 이 끔찍한 교리는 제국주의를 통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배를 받는 시민들을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들로 격하하며, “우리는 열심히 살아서 부를 축적하고 강대국이 됐지만, 너희들이 못 살고 우리의 지배를 받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주입했다. 이는 게으르고 열등한 민족의 문명화라는 명분을 통해 지배를 정당화하여 식민지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려는 서구 열강의 의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의 교리로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문명의 의도였다.
자본주의가 확산되자 계층과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세속적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비천한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강화되었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베블런이 말한 유한계급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온갖 생산의 의무를 하류층에게 전가한 채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던 과거 상류층과는 달리, 근현대의 상류층은 강박적으로 일에 매달리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이토록 열성적으로 생산활동에 기여한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례이다. 모두가 다 같이 성장에 매진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이렇게 빠르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문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노예가 되는 절차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표준으로 자리매김 하자 시간 빈곤을 자랑으로 여기는 풍토까지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상류층은 평범한 사람들 대비 바쁘게 살면서 마치 이를 훈장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인, 중세 시대 남작, 조선 시대 양반의 삶이 바쁨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이는 무척 특기할 만한 것이다. 나는 놀라운 변화에 관해 <사실, 바쁘게 산다고 해결되진 않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바쁨은 한 때 고된 노동으로 여가를 즐길 여유가 없는 하류층의 숙명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상류층의 지위를 나타내는 징표가 됐다. 절대소득이 늘어나며 명품은 더 이상 예전만큼의 희소가치가 없어졌음에도 바쁨은 여전히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은밀하게 뽐낼 수 있는 수단이다. 바쁘다는 것은 그를 필요로 하는 수요처가 많다는 뜻이며, 바쁜 사람은 희소가치를 가지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것은 매우 눈여겨볼 만한 변화인데, 생산이 과시의 수단으로 사용된 시기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과시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주된 수단은 소비였다 ‘누가 더 과감히 낭비할 수 있는지’가 신분의 척도였다. 하지만 과시의 행태는 생산으로까지 전이되어, 바쁨은 ‘과시적 생산’의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역량으로 자리매김했다. 바쁨이 이렇게 각광받는 것은 분명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양식의 사회적 선호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문명은 자연을 짓밟고 지구에 대한 패권을 완전히 쥐게 되었다. 그 결과, 문명의 하수인 노릇을 한 인간 종 역시 번성하게 되었다. 기원전 5세기 1억 명이던 인구는 19세기에 10억 명까지 불어났는데 현재는 76억 명에 남짓한 인간이 지구에 살고 있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을 자랑하는 문명과는 달리 인간 개개인의 삶의 만족도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문명이 인간을 착취하는 강도와 방식은 진화했고, 오늘날 우리는 계층을 막론하고 시간의 부족함을 느끼며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궁핍한 상황이다. 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이제 과거의 유물이다. 우리는 문명의 지시에 따라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셈이다.
오늘날 지구는 그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거대 경제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인상적인 점은 과거 제국의 지도자들이 종교처럼 실용적이지 않은 대의명분에 정치적 명운을 걸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 점점 많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경제 성장과 같은 실용적인 목적에 정치 생명을 건다는 것이다. 한 때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대담한 시도가 있었지만 공산주의는 실패로 판명 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신화에 동참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자본주의라는 기차를 굴러가게 하는 힘은 생산과 소비인데, 이는 현재 거의 무한정으로 공급되고 있는 양상이다. 쉼 없이 질주하는 이 기차는 막대한 수준의 오염물을 지구에 토해내고 자연은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자연 파괴의 심각함 및 지구의 지속가능성에 우려감을 표하며 기차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지만 이들의 진실한 외침은 시끄러운 기차의 경적 소리에 묻혀 버린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문명이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는 새로운 생산물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선조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또 다른 것을 얻기 위해 애쓴다. 문명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도록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문명이 현대인을 교묘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비결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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