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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r 12. 2019

제국의 발전에 헌신하는 과학

#1 -2 진화하는 제국주의

근현대 유럽의 열강들이 제국의 영토를 전 지구로 확장시켜 ‘지구 땅따먹기’를 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 그어진 반듯한 국경선은 여전히 유럽 제국주의의 상흔으로 남아있다. 유럽 제국은 과거의 제국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넘치는 야욕을 가지고 전 지구에 제국의 깃발을 꽂는 데 성공했다. 유럽 제국이 그토록 성공적일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 겸손함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무지의 인정으로 인해 과학의 발전이 촉진됐고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정복의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자신의 제국이 곧 세상의 전부라 여겼던 오만한 과거 지도자들과는 달리 유럽 제국의 지도자들은 지평선 너머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탐험가들을 보냈다.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대륙이 발견되고 해외와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상상력을 제약하던 사고의 틀이 깨지고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이 자극되었다. 유럽 제국은 과학자들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획득한 실용적 지식과 혁신적인 신기술을 활용해 비어있는 지도를 메우고 제국의 영토를 전 지구로 확산했다. 이 시기 걸출한 과학자들의 상당수가 -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다윈 등 - 유럽에서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근본적 원인은 용감하게 바다를 항해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들 덕분이었다. 15세기 포르투갈 왕실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들은 서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항해했다. 튼튼한 함선, 대포, 지도 등과 같은 최신 과학기술을 갖춘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점차 항해 구역을 넓히며 영토를 확장했고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 1517년,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중국 광동 지역의 해안에 정박했다. 당시 명나라가 지배하던 중국은 외세를 하찮은 오랑캐로 여기며 조공을 바치는 식민지 정도로 취급을 했다. 포르투갈과 중국 사이 최초의 갈등이 생겼을 때, 중국 군대는 포르투갈을 가뿐히 제압했고 포르투갈은 중국에게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16세기가 되어서야 포르투갈은 중국의 변방인 마카오를 식민지로 지배했을 뿐이다.   


포르투갈과는 달리, 스페인이 거둔 성과는 무시무시하게 성공적인 수준이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주도한 제국주의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선,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이 주로 동쪽으로 뻗어나가는 것에 집중했던 반면, 스페인의 탐험가들은 서쪽과 남쪽 방향을 행선지로 택했다. 또한 포르투갈이 새롭게 발견한 지역을 거점 삼아 국제 무역 기지로 활용하는 것에 주력한 반면, 스페인은 더욱 많은 금과 은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악랄하게 지역 문명을 파괴하고 현지인을 학살했다. 게다가 포르투갈의 침략을 무력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아시아 제국들과는 달리, 잉카제국과 아즈텍 제국은 스페인의 침범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이룩한 눈부신 성취는 유럽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고 야망에 불을 지폈다. 더 이상 제국의 확장을 제약하는 한계점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바다로 나가면 무궁무진한 개척지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유럽 국가들의 왕실은 앞 다투어 탐사대를 지원했고 제국의 깃발을 단 배들은 활기차게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이제 제국주의는 국지적인 수준을 넘어 전 지구로 확장되었다. 이는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한 문명은 유럽 제국의 식민지가 되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뜻한다.   


인상적인 점은, 유럽이 15세기부터 18세기 사이 대항해 시대에 바다를 지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시 세계 경제의 중심은 여전히 아시아였다는 것이다. 18세기 후반 아시아 경제는 세계 경제의 80%를 차지했고 중국과 인도 경제 규모가 세계 GDP의 과반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이 시기 유럽 제국은 아시아 제국 대비 군사적으로도 뚜렷한 우위를 가지지 못했다. 별 볼 일 없던 유럽이 본격적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에 벌어진 일이다. 20세기가 되면 유럽과 미국은 확실히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하고 아시아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은 식민지로 전락한 채 치욕을 당한다. 푸른 눈의 서구인들은 어떻게 지구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과학과 자본주의에 있다. 자본주의에 관해서는 다른 장에서 자세히 검토하도록 하고 이 장에서는 과학에 주목하기로 한다.   


과학자와 제국주의자의 사고방식은 유사하다. 이들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영역에 새롭고 근사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 정열적으로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고자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분야 혹은 정복하지 못한 영토를 탐험하며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시험해보기를 원한다. 때문에 과학과 제국은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일 수밖에 없다. 근현대 유럽 제국의 승리는 곧 그 당시 유럽인들이 지녔던 기질인 무지에 대한 정복욕과 탐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의 열렬한 지원이 낳은 결과였다.


18세기 이후 식민지 개척을 위해 떠난 유럽 제국의 함선에는 완전 무장한 군대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대동했다. 새로운 식민지를 침략해 무력으로 원주민의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하는 것이 군대의 몫이라면, 앎의 영역을 넓힘으로써 제국의 발전에 봉사하는 것은 과학자들의 몫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 왕립협회의 지원을 받은 제임스 쿡이 이끄는 탐사대는 호주에 들린 뒤 막대한 양의 학술적 자료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의 성과는 과학자들에게 상당한 학술적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대영 제국주의자들의 호주 식민지배 야욕을 부추겼다.

 

그 결과, 당시 호주에 살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야만성'을 제거당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끼며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최후까지 생존한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의 시체는 해부되어 대영제국의 의학발전에 이용되었다. 물론 당시 영국 과학자들이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에게 대단한 악의가 있어서 이토록 잔인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영제국이 원주민 학살을 과학의 발전, 문명의 진보, 제국의 영광과 같은 ‘대의적 명분을 위한 희생’으로 포장함으로써, 과학자들이 약간이나마 죄책감을 덜어내고 제국의 발전을 위해 마땅한 의무를 수행한 것일 뿐이다.


북저널리즘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7월에 책이 출간됩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내용을 일부 삭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bookjournali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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