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비트코인, 괴물의 탄생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가상의 섬인 유토피아의 어원은 그리스어 topos (장소)와 ou(부정)의 조합이다. 이는 ‘실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뜻이다. 사유 재산과 돈이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시민들은 하루에 6시간만 일하고 여가 시간에는 문화생활을 즐긴다. 유토피아는 엄격한 위계제에 기반한 국가라기보다는 인간미 넘치는 지역 공동체들의 집합에 가깝다.
토마스 모어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16세기 영국 사회를 참담한 심경으로 지켜보며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을 상상했다. 당시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모직업이 성행하자 지주들은 농경지로 쓰이던 땅을 수익성이 높은 목장으로 전환했다. 양을 키우는데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 없게 되자 소작농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갈 곳을 잃은 이들은 도시로 쫓겨났고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공장 노동자로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단어의 어원이 말해주듯이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유토피아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구현되지 않을 것이다. 만인의 평등을 꿈꿨던 공산주의의 처참한 실패, 그리고 개인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줄 것만 같았던 인터넷이 감시 자본주의의 수단으로 변질된 역사를 보자. 이론적으로 공산주의와 인터넷은 흠잡을 곳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한 이상주의자들이 꿈꿨던 미래는 실현되지 않았고 오히려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았다. 특정 이론이나 기술이 바람직해 보일지라도 이를 활용하는 주체인 인간은 어리석고 이기적인 법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는 그다지 합리적이며 정의롭게 운영되지 않는다. 즉, 유토피아가 인간 사회에서 실현되는 법은 결코 없다.
한편, 이상주의자들은 블록체인 기술로 사이버 유토피아의 도래를 꿈꾸는 것 같다. 이들은 인터넷 태동기에 인기를 끌었던 탈중앙화라는 해묵은 개념을 다시 꺼내 블록체인 기술의 긍정성에만 주목한다. 블록체인 기술이 중앙 권력을 해체하고 사회를 투명하게 만들며 다수의 사람들에게 더 수준 높은 자유와 권리를 부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탈중앙화가 본격적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탈중앙화는 유토피아다. 다시 말해 실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나는 탈중앙화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실현 가능성이 대단히 낮은 이상주의자들의 희망사항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금융역사학자 니얼 퍼거슨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광장과 타워>에서 인터넷이 탈중앙화 된 네트워크들만으로 순조롭게 운영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그의 견해를 밝혔다. “네트워크로 굴러가는 세상을 원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상호 연결성의 유토피아를 얻게 되는 게 아니라 ‘송곳니 (FANG, 미국의 디지털 제국들)’와 ‘박쥐 (BAT, 중국의 디지털 제국들)’로 갈라진 세상, 그래서 앞에서 우리가 논의한 바 있는 온갖 병리적 현상에 전염된 세상, 사악한 의도를 가진 하부 네트워크들이 월드와이드웹이 제공하는 여러 기회를 이용하여 밈들과 거짓 정보를 바이러스처럼 퍼뜨리는 세상을 얻게 될 것이다.”
탈중앙화라는 블록체인의 철학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됐고 앞으로도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 같다. 블록체인 산업 종사자들이 이미 인터넷 산업 선배들이 가라앉은 늪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상업화의 유혹 및 정치권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사실 기업을 운영하는 상인은 필연적으로 이 늪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인터넷의 역사에서 벌어진 일이 그대로 블록체인 산업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한번 이 늪에 빠지기 시작하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이상주의자는 주판을 굴리는 상인으로 변하고, 눈부신 경제적 성취를 거둔 일부의 상인은 정치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제국의 황제로 거듭난다.
먼저 상업화가 어떻게 탈중앙화를 훼손하는지 알아보자. 혁신적인 기술이 처음 나왔을 때 이를 이용하는 기업은 기술의 긍정성을 예찬하며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업의 최대 목적은 이윤추구이다. 기업가 본인의 야망, 기업에 투자한 주주들, 기업에 고용된 직원들을 위해서 기업은 이윤을 내야만 한다. 원대한 비전이나 고고한 이상이야 어찌 됐건 기업은 돈을 버는 것이 최대의 의무이다. 처절한 상업화의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기업가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돈이 안 되는) 가치는 철저히 뒷전으로 밀린다.
문제는 탈중앙화 서비스를 내세운 블록체인 기업이 모두 상업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탈중앙화 거래소는 중앙화 거래소 대비 1% 미만의 거래량을 차지하며 지극히 미미한 매출을 낸다. 게다가 이더리움, 이오스, 트론에 기반한 상위 디앱의 유저 수는 고작 수 천명 수준으로 애플과 구글 제국이 진두지휘하는 앱 생태계 대비 형편없는 수준이다. 페이스북의 대항마로 떠오른 탈중앙화 SNS 스팀잇은 전체 직원 70% 이상을 해고했고 결국 수익화를 위해 광고를 도입했다. 이 사례들이 주는 교훈은 탈중앙화 서비스와 사업의 경제적 성과는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탈중앙화는 고객에게 약간의 자유를 선물하는 대가로 상당한 불편함을 전가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따라서 앞으로 블록체인 산업 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해 제국으로 거듭날 소수의 기업은 중앙화 사업 구조를 가진 기업 중에 나올 것이다. 인터넷 산업과 신자유주의의 특징이 국경을 초월한 승자독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블록체인 산업 역시 전 지구적 생태계를 장악한 독점에 가까운 거대한 복과점체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블록체인 기술은 탈중앙화라는 초기 이상보다는, 새롭게 탄생할 제국의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기존의 제국들에게 더욱 큰 권능을 부여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자산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상인은 정치권에 복종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래야만 정치권의 견제 없이 합법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입김이 기업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상황 속에서 상인은 정치인에게 최대한 협조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 이처럼 기업에 정치라는 목줄이 채워지면 고객 정보 보호니, 기업 윤리니 하는 감상적인 가치들은 깡그리 무시되기 마련이다. 향후 블록체인 산업도 인터넷 산업을 옭아맨 정치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이 자명하다.
코인베이스의 사례는 블록체인 산업에 정치권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2017년 미국 국세청은 코인베이스에 고객 개인 정보를 넘길 것을 명령했다. 이에 코인베이스는 지나친 요구라며 항의했지만 결국 패소했고 13,000명의 고객 정보를 넘겨줬다. “세금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사례로 미루어보건대, 코인베이스는 향후 미국 정부가 요청할 경우 언제든 고객의 개인정보를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 보인다.
또한, 2018년 4월 위키리크스 (미공개 정보를 제공하는 국제 비영리단체)는 디지털 자산 지갑 및 코인베이스 계정이 폐쇄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사건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미국 정부의 눈밖에 난 위키리크스는 각종 금융 제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 비트코인을 활용해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는 미국 정부 덕분에 비트코인으로 5만%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며 도발한 바 있다. 그런데 위키리크스가 비트코인의 자금 통로로 이용하고 있던 코인베이스가 갑자기 막혀버린 것이다. 위키리크스를 눈에 가시로 여기던 미국 정치권은 즉각 압력을 가했고 코인베이스는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뿐이 아니다. 2019년 2월 블록체인 분석 업체 뉴트리노 인수한 코인베이스는 거센 비판에 시달렸다. 왜냐하면 뉴트리노 임원들이 과거 논란이 된 ‘해킹팀’ 프로젝트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해킹팀은 독재 정권 및 군부에 몰래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스파이웨어를 판매한 전력이 있다. 코인베이스는 자사의 분석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그리고 고객들의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위해) 이런 점을 알고도 뉴트리노를 인수했다. 그러나 ‘코인베이스를 지워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자 코인베이스는 결국 구설수에 오른 관련 인물들을 해고하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코인베이스의 경영진이 심각한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코인베이스는 미국 정부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야 했고 추가 투자를 유치해야 했으며 대기업 파트너들과 협력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사실 다른 기업이라고 저 상황에서 코인베이스와 다른 행보를 보일 것 같지는 않다. 정치권의 개입은 앞으로 모든 블록체인 기업들이 겪게 될 구조적인 문제이다. 기업이 돈을 벌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에 협조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내키지 않는 일을 할 때가 많지만, ‘어쩔 수 없었다’라는 자조적인 변명으로 합리화하기 마련이다. 합리화가 여러 번 반복되고 익숙해지다 보면 기업은 어느새 탈중앙화라는 블록체인의 가치가 어떤 것이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KYC/AML 에 관한 국제 협력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점을 고려하면, 블록체인 산업 내 정치권의 개입은 가속화될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종국에는 전 세계 블록체인 거버넌스를 담당하는 국제 블록체인 기구가 출현할 수 있다. 문제는 국제 블록체인 기구의 목적이 표면상으로는 자금 세탁, 테러 자금 등의 질서 확립이지만 실상은 강대국의 기술패권을 공고히 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중국, EU, 일본, 중동 등이 블록체인 기술 패권을 쥐기 위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채 인류 공동의 목표를 위해 블록체인 기술 발전에 다 같이 힘을 모으는 모습이 나는 잘 상상되지 않는다.
국제 블록체인 기구와 관련, 인터넷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1998년 설립된 국제 인터넷 주소 관리 기구 ICANN은 IP주소와 도메인을 관리하며 전 세계 인터넷 거버넌스를 관리하는 핵심기구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비영리 기구를 표방하는 ICANN은 사실상 출범 이후부터 미국 정부에 의해 관리되었다. 실제로 ICANN 담당자 및 버락 오바마 대통령 고문을 역임했던 앤드류 매클로플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과거 ICANN의 역할은 웹 사용자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이 기관은 도메인 이름을 운영하는 기업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세계 인터넷의 거버넌스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ICANN은 결국 미국 정부 및 기업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철저히 이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었던 셈이다.
북저널리즘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7월에 책이 출간됩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내용을 일부 삭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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