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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y 05. 2020

이것은 야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님포매니악 볼륨 1,2>를 보고 

*스포일러 주의*


어느 날 밤, 중년 남성 샐리그먼은 자신의 집 앞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여인 조를 발견한다. 그녀를 부축하고 집에 데려와 환대해주는 샐리그먼. 정신을 차린 조는 샐리그먼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말하는데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성에 눈을 떴으며, 평생을 섹스를 밝히는 색정증 환자로 (Nymphomaniac) 살아왔다는 것이다. 2살 때 유사 자위를 한 기억, 어릴 때 우연히 느꼈던 첫 오르가즘, 유쾌하지 않았던 첫 경험, 하루에도 여러 명의 남자를 갈아치우던 젊은 시절 등등. 샐리그먼은 다소 불쾌할 수 있는 대화 주제에 난색을 표하지 않고 침착하게 조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데, 이는 마치 고해성사를 연상케 한다. 샐리그먼은 자신의 과거에 수치심을 느끼는 조에게 "날개가 있는데 좀 날면 어떤가"하고 말하며 자신은 세상의 잣대로 조를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해준다.

조를 거쳐간 수많은 남자들 중 조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는 제롬이다. 제롬은 영화 초기에는 J로 불리지만 (조는 사람들을 이름이 아닌 이니셜로 설명한다), 영화 중반부터는 제롬으로 불리게 된다. (김춘수 시 <꽃>을 패러디해보자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섹스파트너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남자들과의 섹스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인스턴트 음식이라면, 조와의 섹스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먹는 프렌치 코스 요리 (사랑이라는 달콤한 묘약이 첨가된)와 같다. 조는 우여곡절 끝에 제롬과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정작 남편과의 섹스에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사려 깊은 제롬은 조가 다른 남자와 일시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을 허락하지만, 마음은 심히 불편하다. 정상적인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던 조는 마조히즘을 체험할 기회를 발견하곤 (유명한 남자 사디스트가 있는 아파트에 수많은 여자들이 매를 맞기 위해 온다. 그는 때리기만 할 뿐, 절대 여자 손님과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지 않는다) 상습적으로 이를 이용한다. 그러다 제롬에게 가정을 등한시한 것이 들통난 조는, '가족이냐 섹스냐' 둘 중 선택하라는 그의 말을 듣고 울면서 밖으로 나간다.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하고 절망적인 섹스를 하기 위해. 결국 제롬과 아이는 그녀의 곁을 영영 떠난다.

외톨이가 된 조는 성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해 본다. 색정증 치료 환자 모임에도 나가고 성욕을 유발할 만한 어떤 기회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다른 조의 성욕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빠의 임종을 앞두고도 성적으로 흥분하며 섹스 상대를 찾았고, 섹스를 하기 위해 가족까지 버린 여자다. 조는 결국 성욕을 참지 않기로 선언하고, 이런 자신의 모습까지 사랑한다며 색정증 환자 모임을 탈퇴한다.


이후 조는 떼인 돈 받는 일을 하는데 이 분야에서 경쟁자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며 승승장구한다. 다른 남자들이 채무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주변의 물건을 부수는 방식으로 겁을 줄 때, 조는 채무자를 성적으로 고문하거나 그의 성적 치부를 밝히는 방식으로 고통을 준다. 보스의 신임을 얻은 조는 후임 양성을 위해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살고 있는 어린 여자 "P"를 만나고 그녀에게 사랑을 베푼다. P는 자신에게 한 없이 잘해주는 조를 사랑하고, 조도 이런 그녀가 싫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조는 채권자의 집에 제롬의 명패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곤 일을 P에게 위임한다. 겁만 주고 절대 채권자에게 해코지를 가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조의 마음은 복잡하다.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지만 주체할 수 없는 성욕 때문에 놓쳐버린 남자 제롬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P는 무사히 일을 잘 수행한 듯하다. 제롬이 6번에 걸쳐 빌린 돈을 갚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는 문득 P가 제롬을 만난 이후로 갑자기 변했다는 것을 직감한다. P의 애정이 식었다는 느낌이 든 조는 P가 제롬과 눈이 맞았다는 것을 발견하곤 좌절한다. 제롬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한 조. 그녀는 P의 권총을 가지고 밤거리로 나선다. 골목 너머로 P와 제롬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나, 둘, 셋! 방아쇠를 당기지만 총알은 발사되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이유로 인해 권총이 오작동한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조를 발견한 제롬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조를 흠씬 두들겨 팬다. 제롬과 P는 보란 듯이 피 흘리고 누워있는 조 앞에서 섹스하며 모욕을 준 뒤 떠난다. 다시금 외톨이가 된 조는 처절한 심정으로 절규한다. "내 모든 구멍을 채워줘!" 


샐리그먼이 조를 발견한 것은 이 일이 발생한 직후이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조는 이야기를 경청해 준 샐리그먼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이야기 중간에 샐리그먼이 자신이 무성욕 동정이라고 밝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는 샐리그먼이 야한 이야기에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것을 보곤 의아하게 여긴다), 아마도 그러한 점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편하게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아마도 샐리그먼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일 거라고 조는 말한다. 조는 이야기가 길어졌다며 피곤하다고 말하고 샐리그먼은 조에게 잘 자라고 하고 방을 나온다. 그렇게 영화는 훈훈하게 마무리될 것 같다. 

잠시의 정적. 방문이 슬그머니 열리고 샐리그먼이 들어온다. 하의를 탈의한 그는 자고 있는 조의 옆에 접근해 그녀를 범하려고 한다. 갑자기 화면이 온통 검은색으로 바뀌고 배우들의 음성만 들린다. 화들짝 놀라며 싫다고 말하는 조. 그런 그녀에게 샐리그먼은 비수를 꽂는 말을 한다. "너 수 천명의 남자랑 잤잖아" 탕! 총소리가 들리고 구두를 신은 여자가 급하게 방을 나와 계단을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님포매니악은 개봉 당시 자극적인 포스터와 선정적인 내용으로 이목을 끌었다. 베드신이 어찌나 노골적이었던지, 제롬 역을 맡은 남자 배우의 여자 친구가 영화 촬영장에 찾아와 남자 친구의 출연을 말렸다고 할 정도이다. (결국 둘은 헤어졌고 제롬은 P 역할을 맡은 여배우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것은 야한 영화가 아니다. 섹스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이것은 위선에 대한 영화다. 내 생각에, 감독은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신도 어쩌면 샐리그먼 같은 위선자 아니냐고. 조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척 하지만 내심 그녀를 '걸레'로 평가하지 않냐고, 당신은 성적 본능에서 얼마나 자유롭냐고. 당신의 섹스는 얼마나 떳떳하냐고.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음탕한 상상을 하거나 혹은 이따금씩 상상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않냐고. 성적 (Sexual) 위선만큼 지독한 위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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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Sexual) 위선에 대한 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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