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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Apr 16. 2023

우리는 매일 전투를 치른다

미드 <성난 사람들>을 보고

스포일러 주의


나는 웬만하면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한 편의 스토리로 구성된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는 최소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써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복수의 영화를 보는 편이 낫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똑같은 맛의 초콜렛을 여러 개 먹는 것보다 다양한 맛을 가진 초콜렛을 한 개씩 골고루 먹는 것을 선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영화 대비 드라마는 트렌드에 민감하고 휘발성이 강한 편이라 영화를 더 좋아하기도 한다. 가령, 나는 여전히 20세기 영화를 찾아보지만 동시대의 드라마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종종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스토리가 매우 흥미롭거나 검증된 선수들이 제작에 참여하는 경우이다. <성난 사람들>의 경우, 후자의 이유로 시청을 시작했다. (넷플릭스 알고리즘이 99% 로 추천한 것도 한 몫했다) 최근 감명 깊게 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제작한 A24의 작품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 수준이면 충분히 재밌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러닝 타임이 총 5시간으로 짧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운전을 하다가 시비가 붙은 남과 여. 두 사람은 화가 잔뜩 나있는 상태에서 서로를 마주치고는 한껏 분노를 토해낸다.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고 떠난 여자 주인공 에이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를 바득바득 가는 남자 주인공 대니. 마침내 에이미의 집을 찾아내 소심한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는 그녀의 화장실 바닥에 소변을 보고 도망간다) 그녀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티격태격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을 반복하던 대니와 에이미.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된 사건의 의미는 점점 커지고 그들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인다.


대니와 에이미의 삶은 전혀 다른 것 같다. 대니는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압박감을 느낀다. 그는 동생과 함께 작은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아등바등 산다. 반면, 에이미는 성공한 사업가로 남편과 자식과 함께 넓은 집에서 산다. 젊은 시절 일에 미쳤던 에이미는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회사를 매각한 뒤 가족과 시간을 좀 더 보내려 한다. 대니의 입장에서 에이미는 서민 계층을 무시하는 건방진 여피족이고, 에이미 입장에서 대니는 완벽한 자신의 삶에 불쑥 출현한 불청객이다.


얼핏 보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것 같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떤 관점에서는 대단히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다. 우선,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화가 많다. 두 사람은 화가 나는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분노를 발산한다. (이것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둘째, 두 사람 모두 삶의 태도가 전투적이다. 왜냐하면 자립심이 강하고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대니는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홀로 집안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이다. 에이미는 자수성가했지만 무능한 (하지만 공감능력은 높은) 무명 예술가 남편 대신 가장 역할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모두 애타게 사랑을 갈구한다. 대니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부단히 성공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가 이렇게 성공을 갈구하는 이유는 아마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해"라는 맨 박스, 그리고 동양인 이민자라는 환경 속에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획득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에이미는 남편과 불화를 겪고 심리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조건 없는 사랑 (Unconditional love)'에 대해 언급한다. 그녀는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고 유년 시절 상처가 많다. 심지어 현재 그녀의 남편과 아이에게서도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는 불안은 어린 에이미가 자신을 혹사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녀는 큰 성취를 했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내면에 큰 불안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 중에 인상 깊은 대사가 있다. 대니는 에이미와 화해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대니는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상태다. 대니는 더 이상 예전처럼 에이미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나도 너처럼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에이미의 답변. "모든 건 희미해져. 영원한 것은 없어. 우리는 자기 꼬리를 먹는 뱀이야" 맙소사. 나는 이 대화를 보며 에이미가 너무 가련하여 그녀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드라마의 결말은 극적이다. 대니와 에이미의 삶은 꼬일 대로 꼬여버려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서로를 탓하며 이렇게 된 것이 다 상대방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분노한다. 역설적인 것은, 완전한 붕괴를 체험하고 죽을 고비를 겪은 후에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말 힘들었구나"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데 성공한 두 사람. 에이미는 대니를 꼭 안아준다. 그들은 마침내 조건 없는 사랑을 실현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대니와 에이미처럼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고 날이 서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화가 나면 '마음에 불이 이글 거리는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심호흡을 하며 잊으려고 하는 편이다. 누군가 잘못을 저지를 때도 '그럴 수도 있지'라는 관용을 가지려고 한다. 물론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백 프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믿는다. 과거에는 화가 많고 뾰족한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성격 참 이상하네. 피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대상에 연민을 느낀다. 저렇게 된 데에는 다 딱한 사정이 있을 테니까. 


누군가 그랬다. 우리는 매일 전투를 치르고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을 타인을 위해 친절할 필요가 있다고. 실로 그렇다. 저마다 자기만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른다. 이때, 싸우는 방식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고요하게 전투를 치르며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반면, 누군가는 싸움닭처럼 길길이 날뛰고 분노를 토해내며 힘겹게 전투를 치른다. 어느 쪽이 덜 불행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일까?


"너의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 영화 굿윌헌팅에 나오는 명대사이다. 불운한 환경에서 자란 주인공은 재능이 많지만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하다. 그런 주인공을 향해 선생님은 진심을 담아 말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해 보지 못한 주인공은 선생님의 말에 무장해제가 되어 펑펑 운다. 그는 대오각성하여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꾸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나는 조건 없는 사랑의 힘이 바로 이런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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