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중국계 이민자 에블린은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억척스럽게 사는 엄마다. 이혼을 고민하는 남편, 중2병 걸린 레즈비언 딸은 도무지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에블린이 자주 하는 말은 "바빠, 그럴 시간 없어"이다. 세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에블린은 국세청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멀티버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깨닫는다. 저 너머의 우주에 또 다른 자신이 (유명 배우, 무술인, 요리사, 가수, 손바닥이 핫도그인 외계인, 돌 등등)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고,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멀티버스에 눈을 뜬 에블린은 히어로로 변신한다. 그녀의 임무는 멀티버스의 악당 '조부 투바키'를 막는 것. 마침내 조부 투바키를 만난 에블린. 조부 투바키는 딸에 빙의해 에블린에게 속삭인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Nothing matters) 이미 우주의 모든 것들을 경험한 조부 투바키는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무(無)의 상태에 이르려한다. 블랙홀로 들어가 없어지려는 딸 (조부 투바키가 빙의한)을 막는 에블린. 그러나 딸은 (기존 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완강하게 고집을 피우며 에블린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적들도 에블린을 방해한다.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는 적들과 싸우려는 에블린에게 남편이 다정해지라며 절규하는 것. (Be Kind) 평생을 전투적으로 살아왔던 에블린에게는 그동안 마음의 여유와 다정함이 없었다. 반면에 남편은 현실 감각은 떨어지지만 다정하고 공감능력이 풍부한 사람. 남편의 말에 정신을 차리 에블린은 "당신처럼 싸울 거예요"라고 말하며 적들에게 폭력이 아닌 사랑을 베푼다. 에블린의 사랑에 한 명 한 명 감화되는 적들. 자신을 방해하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결국 에블린은 블랙홀로 들어가려는 딸을 붙잡는다. 딸은 모질게 굴며 도망치려 하지만, 에블린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든든한 사랑의 지지대가 되어 주려 한다. 에블린의 다정함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조부 투바키의 마음을 여는데 성공한다.
다정함, 배려, 친절, 연대, 사랑, 용서, 희망, 용기, 그리고 불완전한 상대방을 포기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 이런 것들이야 말로 무의미한 우주에 허무하게 '내던져진' 우리들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에 가장 신선했다. 실컷 웃다가 한참을 울었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영화를 보며 느꼈던 울림이 빨리 휘발될 까 조심스러워 천천히 곱씹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이기에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영화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천재적인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다정함의 위력을 깨닫고 우주에 다정함을 전파하는 것에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