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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Apr 02. 2017

"추녀와 야수"였어도 해피엔딩이었을까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단상

최근 개봉한 <미녀와 야수>를 보았다. 원작에 충실한 스토리와 OST, 색감들이 괜찮았는데, 무엇보다 여자 주인공 벨을 연기한 엠마왓슨이 더 이상 <해리포터> 시리즈의 꼬마 헤르미온느가 아닌 매력 넘치는 여배우로 성장해서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그러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벨은 짐승의 모습을 한 왕자의 내면에 반해 사랑에 빠졌지만, 과연 벨이 엠마왓슨 같은 미녀가 아니라 추녀였다면 왕자가 기꺼이 마음을 열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만약 "추녀와 야수"였다면 원작과 같은 해피엔딩이었을까?


최근에 개봉한 미녀와 야수


남자들은 미녀를 좋아한다. 아니, 아름다움 (美)에 끌리는 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남녀의 외모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것들 중 이성에게 매력적이게 어필하는 요소는  (예를 들면 남자의 널찍한 어깨와 큰 키, 여자의 풍만한 가슴이나 엉덩이 등)  모두 종족번식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과도 연관이 있다. 때문에 이제는 제발 이상형이 뭐냐는 질문에 "나는 외모 안보고 느낌이 좋은 사람이 좋아 혹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만하자. 분명 당신의 안에 잠재된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이성의 외모는 있게 마련이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는 아주 기초적인 도덕 명제처럼,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봐야 한다"는 명제는 우리가 당연히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명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우리는 너무도 외모에 집착하는데 이는 참으로 모순이다. 방송을 하는 연예인들은 공공연히 자신의 성형사실을 숨기지 않고 밝히며 이러한 성형 고백이 더 이상 흉이 아닌 쿨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진다. 또한 외모가 중요한 자산인 연예인뿐만 아니라 일반 한국인들에게 쌍꺼풀, 필러 정도는 너무 흔해 미용시술 정도이며, 한국으로 성형시술을 받으러 오는 관광 패키지도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각종 취업이나 시험에서 외모가 못생기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생각이 만연해 자식들이 졸업할 때 선물로 성형수술을 시켜주는 부모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뿐인가. 강남역, 종로, 노량진 같은 곳을 돌아다니다 학원강사들 프로필이 들어간 광고를 보면 가끔은 이게 학원가인지, 유흥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모를 강조하는 광고들이 많다.   

 

걸그룹을 연상시키는 학원강사 프로필


어쩌다 대한민국은 성형공화국이 되었을까? 이렇게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마케팅과 SNS의 확산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우선, 마케터들이 광고주로부터 돈을 받고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골몰하는 덕분에 우리는 매일 광고에 노출돼어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TV를 볼 때,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PC로 인터넷을 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때마다 마케터들은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소비를 조장한다. 그런데, 이런 광고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외모로 따지면 대개 상위 1%인 연예인과 모델들인 경우가 많다. 

성형공화국 한국

그러한 상위 1% 외모의 광고 속 모델들을 끊임없이 접하면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에쁘지 않은 거지?", "왜 나는 저 운동선수처럼 근육질이 아닌 거지?", "저 사람은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도 어쩜 저렇게 동안일까?" 부분의 경우, 당연히 광고 속 잘난 외모의 사람들을 보다가 거울을 보면 한숨이 나오게 마련일 것이고 옆 사람을 보면 오징어처럼 보일 것이다. 마케터들은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잠재적 소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입한다. "우리의 제품을 쓰면 당신도 광고 속에 나오는 멋진 사람들처럼 보일 거예요" 마치 값 비싼 자동차를 사면, 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살면, 스타일리시한 옷을 입으면 금방 평범한 사람들도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저렇게 될 줄 알고 같은 브랜드 속옷 샀다가 거울보고 좌절한 경험이 있다

사전에 신드롬이라는 말을 치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신드롬 (Syndrome):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쓸게 되는 현상

제품이나 서비스를 팔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신드롬을 일으키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따라서 마케터들은 멋진 외모를 가진 광고모델을 기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름다운 외모를 하나의 신드롬으로 만들면서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겼다. 예를 들어, 얼짱이라는 단어는 2000년 초에 등장한 얼굴+짱의 신조어로 외모가 뛰어난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비슷한 예로 몸짱 등이 있으며 반대의 예로는 얼꽝이 있다. 얼짱이 하나의 신드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각종 얼짱 대회 및, 방송 프로그램들도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얼짱 출신의 연예인들이 여럿 등장하기도 했다. 너무 외모지상주의가 심화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에 훈남훈녀 (훈훈한 남녀)라는 말이 등장했지만, 초기의 의미와는 달리 (얼굴이 좀 못생겨도 성품이 훌륭하고 훈훈한 느낌이 나는 사람, 박지성이 대표적인 훈남의 예였었다) 현재는 그냥 미남미녀 수준으로 뛰어난 외모를 지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질됐다. 

얼짱들이 출연해서 화제를 모은 <얼짱시대> TV 프로그램

이 뿐만이 아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SNS의 확산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찍어 자유롭게 표현하게 됐고 수많은 인터넷 얼짱들을 양산했다. 방송활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평범하지만 빼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사진을 올리고 수천수만 이상의 팔로워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인플루언서 (influencer)로 자리 잡게 됐다. 자신의 외모를 경쟁력 삼아 SNS 팔로워를 모은 뒤, 쇼핑몰이나 퍼스널 브랜드를 홍보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뷰티 카메라 앱도 다양해져서 과거에 어설프게 하두리 카메라로 셀카를 찍던 것에서 거의 새로운 사람을 재창조하는 수준으로 셀카 기술이 발전했다. 그리고 SNS에 올리는 사진들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찍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 십장 중에 하나 잘 나온, 소위 말하는 "인생 샷"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진빨 덕분에 SNS에서는 유독 미남, 미녀들이 많다.


즉, 아름다움에 관한 소비를 조장하는 마케팅과 SNS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맞물려 외모지상주의는 오늘날 거대한 신드롬이 되었다. 마케팅과 SNS가 발달하지 않았던 20세기 이전 사람들이 외모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기껏해야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이웃들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매일매일 접하는 광고 속 모델 혹은 인터넷 얼짱같이 빼어난 수준의 외모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빈도가 오늘날처럼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과거에는 외모의 집착에 대한 정도가 현재보다 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어쩌면 너무도 쉽게 마케팅과 SNS에 노출돼 있는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외모지상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어불성설 아닐까? 우리가 24시간 어딜 가도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는 마케팅 및 SNS를 끊임없이 접하기 때문에 이러한 프레임을 깨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외모를 타인들과 비교하게 되고, 외모라는 스펙을 위해 성형을 하고, 최신 유행하는 옷을 사고, 머리를 하고, 다이어트 식품을 사고, 운동 레슨을 끊는 등 자본주의의 충실한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결국에 이러한 외모지상주의 트렌드 속에서 웃는 것은 소수의 선택받은 미남미녀 및 아름다움에 관한 재화 및 서비스를 제공하여 돈을 버는 자본가들뿐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과연 벨이 미녀가 아니라 지독한 추녀인, "추녀와 야수"스토리였다면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추녀가 엄청난 내면의 매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어쩌면 왕자는 마음이 안가는 추녀와 평생 살바엔 혼자 고독하게 짐승으로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아름다움을 좇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외모의 향상 (다이어트, 성형 등)은 높은 자존감의 바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한 중독 수준만 아니라면 성형 수술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크게 없는 편이다. 다만, 지나침은 늘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가령 성형외과 광고 속 성형 Before/After 사진을 보며 마치 오른쪽 성형미인의 외모가 바른 것이자 지향해야 하는 것이고 왼쪽의 성형 전 외모는 잘못된, 감추고 싶은, 흑역사의 그런 것으로 치부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개성과 다름을 존중하자.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 묘사된 것처럼 은은한 향기를 내는 풀꽃 같은 사람이 외모와는 별개의,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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