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의 탄생 #3
"신은 죽었다" 만약 니체가 중세에 이런 말을 했다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현미경과 논리로 무장한 무신론자들은 점점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파헤치고 있기에, 신의 지위는 예전만 하지 못하다. 그런데 신을 뛰어넘어 시공간을 초월한 불멸의 존재가 있으니 바로 돈이다. 돈이라는 종이 쪼가리의 많고 적음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다투며 때로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아마 신은 기막혀할지도 모르겠다.
<호모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이토록 강력한 종이 된 것은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협력하고 공동체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이야기는 종교, 국가, 법 등 우리 사회를 이루는 중요하지만 실체가 없는 관념들이다. 그런데 그는 은행가들이야말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진정한 이야기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 인류가 믿는 유일한 이야기, 돈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돈은 신조차 실패한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돈의 교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그 어떠한 의구심도 가지지 않는다.
돈은 무엇인가? 돈은 사회적 약속을 통해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지불수단이다. 돈은 그 엄청난 신뢰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실체가 없는 허구의 관념이다. 원숭이에게 만원과 바나나 중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바나나를 선택하겠지만, 인간이 만 원짜리 종이를 선택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종이로 더 많은 바나나를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표적 기축통화인 달러도 사실 미국에서 찍어낸 종이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이 전 세계에서 쓰일 수 있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각국이 발행한 화폐의 가치가 제각기 다르고 환율이 형성된 것은 단지 국제사회에서 돈을 발행한 국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신뢰와 믿음의 수준 차이에 기원한다. 그럴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또 일어나서도 안 되겠지만) 만약 이상기후로 인해 일본 전체가 바닷속으로 잠겨버린다면 지금은 대표적 안전자산이라고 여겨지는 엔화는 순식간에 휴짓조각이 될 것이다.
수렵채집을 할 시절, 원시인들은 물물교환을 하며 서로의 필요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다. 바닷가 인근 지역에 사는 원시인 부족은 숲 속에 사는 원시인들과 서로 물고기와 과일을 교환할 수 있었다. 한편, 물물 교환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 화폐가 개발되는데 초기 화폐의 형태는 가축, 조개껍질, 돌 등의 현물이었다. 그러나 무겁고 관리가 어려운 현물 형태의 화폐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은 점차 간편한 지불수단을 생각해냈고, 광물, 동전, 지폐에 돈이라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최근에는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된 화폐까지 새롭게 등장하며 투기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비트코인이 영속성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화폐들이 그러했듯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돈으로 믿게끔 설득해서 합의를 얻어야 한다.
화폐의 기능은 크게 네 가지다. 지불, 가격의 척도, 부의 저축 그리고 교환이다. 돈은 본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얻기 위한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고안됐지만, 이제는 가능한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가급적 더 많은 돈을 풀기 위해 금융가들은 정치권과 결탁해 신용을 장려했고, 레버리지의 힘을 이용해 돈의 힘은 점점 커졌다.
가령 지급준비율이 10% 일 경우, 100의 돈을 가지고 있는 A은행이 10만 보유하고 90을 B은행에 대출해주고 B은행은 9만 남기고 81을 C은행에 대출해주고 C은행은 다시 8만 남기고 나머지 73을 D은행에 대출해주는 식으로 돈은 돈을 낳는다. 그 결과 발행한 돈 대비 시중에 유통되는 돈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그 속에서 국가, 기업, 가계는 서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히며 돈의 번식을 돕는다. 모두가 돈의 교리를 굳게 믿고 전파하며 무너지지 않을 돈의 신전을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확산되면서 돈이 더욱 신격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직업 소명설을 주장한 칼뱅의 기독교 교리가 전파된 국가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이 돋보였다고 밝혔다. 당시 칼뱅의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겐 열심히 일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돈은 그 자체로 목적이자 신이 돼버렸다.
물론 최소한의 돈은 생존하는 데 있어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 보통의 사람들은 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견해를 밝히는데 무척 공감한다. “최하층에서부터 최상층에 이르는 모든 계층에서 경제적 두려움이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밤에는 꿈까지 지배한다. 따라서 일할 땐 초조하고 여가를 즐길 땐 개운치 않다. 이렇게 늘 공포에 시달리는 상태야말로 문명 세계의 넓은 지역을 휩쓸고 잇는 광기 어린 분위기를 유발하는 주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돈은 어떻게 사람들을 조종하고 이것이 만성적인 바쁨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돈은 소비심리를 이용해 사람들을 기나긴 바쁨의 행군으로 몰아넣는다. 돈이 바쁨을 낳는 방식을 간단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부자가 되어 소비에 제약이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사고를 조장-> 돈을 벌고 싶은 욕구 주입 -> 사람들은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교육에 투자하고 열심히 일함 -> 바쁨 -> 경제활동을 하지만 늘 돈이 부족하다고 느낌 ->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음 -> 생산성을 높여야 함 -> 바쁨 (무한 반복)
특히나 광고는 소비를 부추기며 돈의 복음을 전파하는 충실한 역할을 하는데, 광고를 통해 불필요한 욕구는 형성되고 상류층만 향유하던 사치는 곧 대중들의 의무가 된다. 가령 오늘날 여성들은 대부분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는 것에 익숙한데, 이는 관련 제품을 파는 질레트 광고가 만들어낸 인식의 틀일 뿐이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이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질레트는 광고를 통해 “겨드랑이 털 제모=깔끔하고 모던한 여성”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사람들이 자사의 제품을 사도록 부추겼고 결과는 대 성공적이었다. 소비는 또 다른 소비를 낳는 연쇄작용을 야기한다. 이 경우, 겨드랑이 털 제모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면도기, 면도날, 면도크림, 레이저 제모 시술 등의 소비로 이어졌다.
장 보드리아르는 이 점을 명확히 간파했는데, 그는 <소비의 사회>에서 현대사회에서 소비하는 것은 생산물이 아닌 기호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물건에 대한 욕구는 유한한 반면, 기호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다. 예를 들어 손목시계의 역할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외출할 경우 한 개의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면 충분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시계는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여러 개의 손목시계를 팔에 두르고 다니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꼴일 것이다. 하지만 시계에 브랜드 로고가 박히면서 시계의 가격은 천차만별이 되고, 이 기호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 가령, 수 십만 원 가격대의 티쏘 시계를 사면 수백만 원 태그호이어 시계를 가지고 싶고, 태그호이어 시계를 사면 천만 원짜리 로렉스 시계가 그다음은 수천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위블로, 피아제 시계 등등. 이처럼 인간의 기호에 대한 소비 욕구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법이다.
때문에 광고가 대중을 길들이는 것은 무척 쉽다. 면도기뿐 아니라 집, 차, 명품 등 고가의 제품에 대해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브랜딩하고 이 물건을 소유해야만 행복해지고 우월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광고는 끊임없이 주입한다. 인간은 기호를 통해 다른 계층과 자신을 구분 짓고 싶은 심리가 있기 때문에, 기호의 경쟁에 노출되기 쉽다. 때때로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기호의 경쟁에서 뒤처지면 불안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본인의 형편에 맞지 않는 과소비를 한다. 따라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소비는 결코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닌, 집단 내 사회 작용이며 계층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현대인은 공허함을 달래고자 소비를 통해 잠시나마 기쁨을 얻지만 이는 반드시 오래가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에 작은 위안을 느낄 뿐이다. 바바라 크루거의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실로 참인 명제인 셈이다.
문제는 건물주와 같이 뚜렷한 자본소득이 없는 대다수 인간의 굴레는 노동소득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고 일의 강도도 높기 때문에 바쁨은 필수적이다. 돈은 인간에게 바쁨을 권장한다. “부자가 되고 성공해야 한다. 왜? 더 많은 것을 소비할 수 있고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게으름은 낭비요 죄악이다. 바쁘게 살아라. 바쁘게 공부하고 바쁘게 일해라. 성공하고 싶다면 남들보다 바쁘게, 좀 더 바쁘게!” 이러한 돈의 교리 하에 지난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부단히 바쁨의 나팔을 불며 전진했고, 많은 것을 성취했다. 이제는 굶어 죽을 걱정보다 오히려 비만으로 근심인 사람들이 많아졌고, 가정마다 자동차와 PC를 가졌으며, 개개인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왜 우울증은 확산됐고 자살률은 줄지 않는 걸까. 왜 예전보다 훨씬 부유해졌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을 느끼는가. 그리고 내가 줄곧 이야기하는 핵심, 왜 바쁨의 기어는 지칠 줄 모르고 우리의 삶을 가속화시키는가. 번영 속 결핍을 느끼는 우리가 생각해 봄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