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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미움을 산 베짱이

바쁨의 탄생 #2

**신을 믿고 믿지 않을 자유가 누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자유 및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특정 종교를 비방하려는 의도가 아닌, 신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임을 밝힙니다.


개미는 근면을, 베짱이는 게으름을 상징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조차 게으름뱅이 베짱이는 사랑하지 않는다. 왜일까? 신은 가급적 많은 추종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을 숭배할 때 불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숭배하는 무한한 신앙심을 가질 객체가 될 것, 의심하지 말 것을 명령하며, 돈이나 노동력 및 헌신을 요구한다. 종교적 대의는 언제나 인간의 개인적 가치보다 우선시되며 때때로 희생을 요구한다. 종교 집단의 번식에 충실하지 않는 게으름은 곧 악이며, 게으름뱅이의 사후엔 천국이 아닌 지옥이 기다릴 것이라고 신은 경고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게으름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바쁨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은 그런 신을 만들었다.


원시인들에게 신의 존재란 무엇이었을까? 홍수, 지진,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재해를 겪으며 인간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을 법하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 고대시대 동굴의 벽화, 조각, 무덤, 미라 등의 유물은 원시인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미라.jpg 이집트 미라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 및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매일 생존 싸움을 해야 하는 원시인들에게 분명 정신적 위안이 됐을 것이다. 문제는 농업혁명으로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고 작은 집단이 부족이 되고, 사회를 이뤄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신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신은 강자들에게 체제 안정과 지배의 명분 제공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제공하며, 권력과 함께 그 기세를 넓혀나갔다.


생각해보자. 고릴라나 침팬지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한 인간이 생존경쟁에서 이겨 영장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집단을 형성하는 결속력 덕분이었다. 집단을 통해 인간은 자신보다 힘이 센 맹수의 공격에서 효과적으로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었고, 협동하고 함께 발전하며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집단의 개체 수가 적을 때 무리의 리더는 보통 가장 힘이 센 수컷이고, 이는 동물의 왕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진리다. 하지만 개체 수가 천명, 만 명 이상으로 늘어나면 이는 한 개인이 물리적인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규모인데, 인간은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방안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바로 구성원들끼리 동질감과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종교는 문화라는 거대한 관념 속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같은 신을 믿는다는 관념은 구성원에게 실로 강력한 소속감을 부여하고 내부 응집력을 강화했는데,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같은 편을 형성하는 것은 한편으론 다른 편을 만들었고, 강자들은 때때로 다른 편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을 이용했다. 신의 뜻이라는 미명 하에 다른 편을 죽이기 위해 전쟁에 동원되고 수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것은 언제나 약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수 세기에 걸쳐 유럽과 이슬람 지역을 피로 물들인 십자군 전쟁은 신을 향한 삐뚤어진 종교적 광기가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종교적 광기에서 비롯된 비극은 21세기 들어 이슬람 테러 단체들에 의해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강자들은 신이라는 절대자의 존재가 자신들의 권력을 합리화할 훌륭한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모든 권력에는 그럴듯한 명분이 따른다. 권력을 정당화하고 현 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지배를 받는 대중을 설득할 명분이 필요하다. “나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왕족이므로 너희는 나를 위해 돈을 내고, 일을 하고 때로는 군대에 동원돼서 죽을지라도 내게 불만을 가지지 않고 복종해야 한다” 와 “나는 신이 보낸 사자다. 내가 너희를 신의 뜻에 따라 보살피리라. 나에 대한 복종은 곧 신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고 나에게 복종하는 자는 천국이 있을 테지만 불복종하는 자에게는 지옥이 기다릴 것이다”를 비교해보자. 과학과 민주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현대인은 차라리 전자가 솔직한 독재자고 후자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많은 옛날 사람들은 후자를 굳게 믿었다. 실제로 과거 지배계층은 신의 대리인 행세를 함으로써 보다 쉽게 내부 결속력을 다지고 대중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 웨이드는 <종교 유전자>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견해를 밝힌다. “종교는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결합시키는 신념과 실천의 체계다. 사회는 기도와 희생제의를 통해 초자연적인 행위자와 암묵적으로 교섭하고, 그들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신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며 사회 전체의 선을 개인의 이익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한다” 그는 종교가 인간의 도덕성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과격한 무신론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도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는 평범한 약자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지만, 강자에게는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됐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들의 의견에 무척 동의한다.


종교는 공통적으로 도덕규범을 요구하는데, 모든 유력 종교는 나름의 율법이 있으며 신자들에게 이를 절대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한다. 종교는 율법을 통해 신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살생과 도둑질 같은 악행을 금하는 도덕적이고 순종적인 시민들을 길러낸다. 이러한 믿음은 확산되고, 세대를 거쳐 전파되면서 점차 응고된다. 주변 사람 모두가 신을 믿기에 ‘왜 그 신을 믿어야 하냐’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며 이러한 의문은 오히려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발칙함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은 강자들이 신의 성역 뒤에 숨어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체제를 안정화하는데 바람직하다.


향락에 젖은 생활을 하던 고대 로마의 멸망을 목격한 중세시대 가톨릭은 금욕주의 정신을 설파하며 수도원을 짓고, 순종적인 시민들을 길러내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 사람들은 언젠가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날을 꿈꾸며 고된 일상을 이겨냈고, 신이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학적일 정도로 본인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순진한 사람들이 사회의 부조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순순히 신의 종의 노릇을 하는 동안 교회 세력은 부와 권력을 쥐고 부패했다. 당시 교회는 돈을 내면 죄를 면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도입하며 온갖 명목으로 돈을 쓸어 담았다.

교회 면죄부.jpg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파는 교회

곪아 터진 종교계를 개혁하고자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이는 바쁨의 역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칼뱅은 예정설을 통해 인간은 신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의 삶 및 구원의 여부는 이미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의 대상인지 궁금히 여기는 신자들에게 의심하지 말고 충실히 세속적 노동에 집중하라고 설파한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근면하게 직업 노동을 완수하는 것이 구원에 대한 확증이며 이렇게 쌓은 세속적인 부는 신이 내린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교회 가르침과 정반대였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라고 가르치며 정작 뒤로는 자신들의 배를 불린 교회 세력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은 칼뱅의 교리에 열광했다. 이제 시간 낭비는 죄악이 됐고 인간의 삶은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이 시기 이후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했고, 이는 인류가 길고 긴 바쁨의 행군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바쁨의 원초적인 탄생은 신이 한몫을 했고, 근대 이후 돈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시계는 단지 바쁨을 가속화한 장치에 불과하다. 신과 돈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바쁨을 낳는 방식이다. 신은 저 하늘 어딘가에서 인간들을 지켜보며, 추종자들을 이용해 바쁨의 복음을 전파하는 절대적 지배자의 위치다. 반면, 돈은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인간들이 스스로 바쁨의 씨앗을 뿌리도록 교묘히 작용한다.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의 믿음으로 통합하는데 실패한 신과는 달리, 돈은 이미 존재 자체로 유일신이 됐다. 바쁨의 관점에서 봤을 때 돈은 신보다 훨씬 강력한 바쁨의 원천인데, 이는 다음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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