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의 강제 #1
세계화라는 거대한 경제 시스템 하에 국가들이 무역장벽을 낮추고 자유무역을 하게 된 것은 불과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15세기-18세기에는 보호무역을 중시하는 중상주의가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19세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발간되고, 데이비드 리카도가 비교우위론을 통해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며 “무역은 모두에게 좋은 윈윈 게임이다”라는 생각이 확산됐다. 과연 그럴까?
비교우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자면, 무인도에 젊은이와 노인이 있다. 사냥감을 잡고 열매를 채집하는 것은 모두 체력이 우수한 젊은이가 더 절대 우위를 가진다. 하지만 젊은이는 사냥감을 잡는 것에만 집중하고, 노인은 상대적으로 육체활동이 덜 요구되는 채집에만 집중한 뒤, 서로 생산물을 교환한다면 두 사람은 같은 생산요소로 더욱 많은 생산물을 얻게 된다. 선진국은 고부가 가치 산업에 집중하고, 개도국은 노동집약적인 저부가 가치 산업에 집중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역사적으로 세계화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언제나 강대국이었다. 근대 초기 세계화를 이끈 영국에 관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영제국에 문을 열고 수교하지 않는 나라는 모조리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모습이다. 19세기 중국에서 발생한 아편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한 때 영국은 18세기 전후 인도에서 값싼 면직물이 들어와 자국의 모직물 산업이 붕괴되자, 강력한 보호무역을 실시했었다. 이후 증기기관의 발달로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춘 영국은 그제야 내수 시장의 한계를 느끼고 해외 식민지로 눈을 돌리며 세계화의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한 때 보호무역을 실시했던 영국이 180도 바뀌어, 자유무역에 반하는 나라들을 식민 지배하고 세계화에 동조하게끔 강요한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당선 전, 한미 FTA, NAFTA 등 자유무역을 찬양하던 미국은 사실 한 때 지독한 보호무역주의 국가였다. 미국은 1920년대 지속된 농업부문의 불황 및 1929년 대공황을 타개하고자 자국의 농업 및 제조업을 보호하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1930년에 통과시켰다. 이후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60%로 치솟았고, 다른 국가들마저 보복성으로 관세를 올리며 세계 무역액은 4년 사이 약 40% 이상 급격히 감소했고 경기는 더욱 침체됐다. 심화된 세계 대공황으로 유럽에선 파시즘이 등장했고, 보호무역주의는 비극적 결과를 낳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광범위한 합의를 이룬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다. 1945년 IMF (국제 통화기금), 1947년 GATT (관세무역 일반협정)가 출범했고,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를 거쳐 1995년에는 마침내 WTO (세계 무역기구)가 세워졌다. 이제 세계는 비로소 국경 없는 무역을 통해 세계화라는 단일의 시스템 하에 전체 파이를 키워 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한국과 같은 변변한 자원도 없고 내수시장도 작은 나라는 수출을 통해 세계화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다시 보호무역주의가 꿈틀거리고 있다. 2016년 발생한 브렉시트,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은 분명 세계화에 제동을 거는 사건이다. 공통적인 이슈는 포퓰리즘, 이민자 혐오 등이 있지만 나는 특히 선진국 중심의 반(反) 세계화 정서를 강조하고 싶다. 이러한 갈등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화로 인해 경제 시스템은 거대한 단일 체제를 이뤘지만 정치적, 민족적으로는 여전히 분열됐다는 점. 그리고 최근에 세계화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계층은 선진국의 중하위층 노동자라는 점이다.
자유로운 상품, 자본, 노동의 무역환경 속 개도국과의 경쟁, 자동화로 인해 선진국의 중하위층은 세계화의 혜택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이들에게 로봇이 당신들의 일자리를 줄이고 있다는 이야기보다는, 이민자라는 공동의 적을 만들어내고 군중들의 분노를 이용해 지지를 모으는 것이 훨씬 효과적으로 많은 표를 얻는다는 것을 정치인들은 알고 있다. 가장 강력하게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방법 중 하나는 공통된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인데, 금속의 로봇이나 알고리즘보다는 실존하는 이웃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더욱 직관적이고 비난의 화살을 날릴 과녁도 명확하다.
안타까운 것은, 지난 2세기 동안 세계화를 진두지휘했던 강대국들에 의해 다시금 세계화의 흐름이 역행하려 하고 있음에도 개도국은 이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선진국 대비, 힘이 없는 개도국은 국제사회에서 협상력을 가지지 못한다. 선진국은 개도국에 진출한 생산기지를 본국으로 돌릴 옵션과 제조업을 제외한 여러 고부가가치 산업을 보유하고 있지만, 개도국은 이들이 떠난다면 대안이 없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저자 장하준 교수는 선진국들이 보호주의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후, 개도국들에 세계화 및 자유무역을 종용하는 위선에 대해서 고발하는데, 이에 동의한다.
세계화는 의자 앉기 놀이와 비슷하다. 파이가 커질 때는 모두 음악에 맞춰 춤을 추지만 음악이 끝나는 순간, 의자에 앉지 못하는 사람은 매 라운드마다 생기게 마련이고 그 희생양은 보통 개도국이다. 만약에 보호무역주의가 다시 확산된다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것은 개도국이다. 게다가 나날이 발전하는 자동화 및 인공지능 기술은 의자의 수를 점점 줄이고 있고, 개도국은 이러한 기술적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바쁨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가 세계화 진영의 깃발 아래 있다는 것은 바쁨의 강제력 하에 있다는 뜻이다. 이전에 언급했던 <거울 나라의 앨리스> 붉은 여왕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앨리스는 아무리 움직여봤자 제자리에 정체된 상태다. 앨리스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두 배는 빨리, 죽도록 달려야 한다고 붉은 여왕은 말한다.
이처럼, 국경 없는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정체는 곧 죽음이다. 경쟁은 경쟁을 낳고 지구본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 이러한 경쟁 심화 및 가속화는 과거에는 글로벌 기업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이는 이제 국가와 개인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다. 바쁨의 레이스에 뒤쳐져 성장을 게을리 한 나라는 세계화 먹이사슬의 하단에 위치해, 국제사회에서 영영 협상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고 개인은 이민자 혹은 로봇에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게다가 세계화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부분뿐만 아니라 문화적 관념이다. 특히나 제국주의를 거치며 서구 열강의 사고방식이 개도국에 급속히 전파됐는데, 이때 서구는 이미 청교도 정신과 자본주의로 무장한 바쁨의 사제들이었다. 무력으로 지배를 시작한 열강은 식민지에 서서히 “바쁨은 선이요 게으름은 악”이라는 관념을 주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한 때, 풍류와 여유를 즐기고 여백의 미를 알던 한국인도, 20세기 일제강점기를 겪은 이후 바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당시 지식인이었던 이광수는 <민족 개조론>에서 조선인은 천성이 게으르다고 비하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했다. 광복 이후에 전쟁을 거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하며 바쁨의 망령은 특히 한국인의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혔고, 이는 과도하고 획일화된 경쟁, 최장 노동시간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다시 브렉시트와 트럼프 이슈로 돌아와서, 과연 최근에 힘을 얻고 있는 반(反) 세계화 목소리가 바쁨의 엔진을 멈출 수 있을까? 나는 무척 회의적이다. 이미 우리는 세계화라고 쓰인 줄을 각자의 다리에 묶고 서로 의지하며 같은 운동장을 뛰고 있는 셈이다. 2인 3각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쪽이 움직이면 다른 쪽은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한다. 반(反) 세계화로 집단을 이탈하려는 움직임은 있겠지만, 이제 세계화의 줄은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있어 풀래야 풀 수 없다. 또한 과거의 사례들은 보호무역주의가 처참히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민족적 불협화음은 있겠지만 이제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경제 시스템을 구축했고, 지구본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 바쁨은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