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날.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마주쳤고 난 본능적으로 '그'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5초간 눈이 마주쳤다. 이미 내 사진을 봤을 텐데 그는 나를 못 알아보는 듯했다. 오히려 그의 얼굴도 못 본 나는 그를 알아봤고, 나를 알아볼 시간을 주었음에도 그냥 지나쳤다. '설마 아닌가?'. 그리고 바로 온 카톡. ‘방금 엘리베이터 내리셨어요?'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인 어제, 우리의 1일이 시작되었다.
4월 16일. 그와 내가 짝꿍이 된 날 이후로 두 달이 훌쩍 흘렀다. 나의 트라우마같은 징크스는 항상 ‘두 달’이었다. 지금까지의 썸이든 연애든 나의 인연이 아니면 감사하게도 ‘두 달’ 안에 모든 관계가 정리되었다. 예전엔 서러웠는데 지금은 감사한 일이란걸 알았다. 내 마음이 더 다치기 전에 끝나주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얘기했다. 우리가 두 달을 무사히 넘기면 이제 된거라고. 두 달을 넘긴 우리는 아직도 돈독하게 사랑중이다. 비록 그 동안 두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나는 딱히 걱정하지 않는다.
첫 느낌에 끌리는 불같은 사랑만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아팠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단걸 알았다.
소개팅 날에 저녁을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는 막연하게 내가 내향적이니 외향적인 사람을 만나야 좋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나보다 말이 없고 조심스런 편이었다. 유머감각도 딱히 없어 보였다. 잘 들어주고 잘 웃어주는 나랑은 코드가 안 맞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저녁을 다 먹을 때 쯤 속으로, ‘일이 있는 척 하면서 헤어져야 겠다’ 고 생각했다.
‘근처 공원 잠깐 걸으실래요?’ 날이 은근 쌀쌀했고 비교적 얇게 입었기에 약간 꺼려졌다. 그런데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보다 키가 5센치나 컸다. 하지만 그는 그런거에 크게 관심 없어보였다. 공원을 돌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얘기는 없었다. ’이런 뻔한 소개팅을 내가 또 하고 있네..‘ 라고 생각하며 빨리 헤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커피까지 마시잔다. 오늘도 낚이는구나 생각하며 서로의 집이 가까워 동네 카페로 갔다.
난 이미 식당과 공원에서 그 날 말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와 레파토리를 다 써버린 상태였다. 원래 말이 없는데 그 정도 했으면, 앞으로 단 한마디도 하기 싫었을거다. 그런데 내가 딱히 질문을 하지 않으면 대화가 없었다. 그래서 내 특기인 혼잣말을 하다가 그마저도 피곤해져서 그냥 입을 닫아버렸다. 커피만 호로록 마시며 이게 빨리 없어지길 바랬다. 그리고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야 집가고 싶어. 전화좀.’ 거짓말 하고 일찍 일어나려고 전화를 부탁했는데 실패였다. 체념하고 커피만 마셨다. 그 때를 회상하면서 그는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 없단걸 알았다고 했다. 사실이었고 숨길 이유도 없었다. 이렇게 말이 없을거면 왜 오자고 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살짝 짜증이 났다. 집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속옷 벗어던지고 쇼파에 널부러지고 싶었다.
겨우겨우 그 시간을 넘기고 집에 가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차를 두고 온 그는 내 차를 얻어탔다. 나중에 한 얘기지만 내 운전이 너무 안정적이어서 놀랐고 그래서 듬직해서 반했다고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칭찬이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고 이내 온 카톡엔 강아지 산책 같이 하자는 말이 있었다. 나는 또 거절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집에 오니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이상형은 아닌 외모였지만 내가 가장 설레하는 빛을 담은 그의 눈동자가 자꾸 생각났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었다.